76.
드래곤 하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둠만 가득하던 공간에 빛의 길이 하나 생겼다.
“알았어. 너를 따라갈게.”
[ ‘우리’ 뒤를 놓치지 말고 따라와. 길을 잃으면 주워 주지 않을 테야. ]
“응.”
빛 아래서 드러난 드래곤 하트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어른이 된 지금보다 조금 더 환한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대략 9살의 귀여운 율리시즈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감색 멜빵 바지를 입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드래곤 하트는 내게 무엇을 보여 주려는 걸까.’
호기심을 실 삼아 드래곤 하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빛으로 반짝거리는 길 끝에는, 하얀 문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문은 ‘율리시즈’처럼 깨지고 부서진 자국을 수리하여 겨우 버티고 있었다.
어린 유리의 모습을 한 드래곤 하트가 내게 말했다.
[ 여기로 들어가면 돼. ]
“이곳에선 무엇을 보게 되는 거니?”
[ 당신이 몰랐던 ‘율리시즈’들의 삶. ]
덤덤한 대답에 나는 바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수만 년 동안 고생했던 ‘율리시즈’들의 삶을, 볼 수 있다고…?”
[ 응. ]
드래곤 하트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보랏빛 눈을 반짝였다.
[ ‘우리’의 힘을 삼키고 싶다면, 마땅히 그래야만 해. ]
“…….”
[ ‘우리’가 쌓이고 쌓여 거대한 힘을 농축시킨 것이 된 순간부터 정한 일이야. ]
수많은 ‘율리시즈’가 남긴 힘의 파편은, 유산은… 그들을 남긴 주인의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우리의 시험은 고되고 견디기 힘들 거야. 그래도, 하겠어? ]
“…물론이야.”
목이 메어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드래곤 하트에게 대답해 주었다.
“보여 준다면 얼마든지 나는 좋아. 내가 만나지 못했던 ‘율리시즈’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끝을 맞이했는지 알고 싶어.”
[ 정말? ]
“그럼. 내가 사랑하는 건 율리시즈니까. 사라진 시간선의 ‘율리시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눈물이 고여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걸 시험으로 내게 보여 주려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게.”
[ ……. ]
나를 빤히 바라보던 드래곤 하트는, 말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끝없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 이 안에는 깊은 슬픔과 절망만이 들어차 있다고 해도? ]
“괜찮아. 감당할 수 있어.”
율리시즈를 사랑하니까. 괜찮았다.
단호한 내 대답을 들은 드래곤 하트는 눈을 깜빡이다가, 내 등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밀었다.
작은 손은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셌다.
“앗!”
[ 지켜보겠어. ]
문 안으로 떠밀어진 나는 아래로, 또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위험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잡아 주는 것처럼 안정된 느낌이었다.
쭉 아래로 내려가자, 어느 순간부터는 환한 풍경이 드러났다.
“아….”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건, 바로 직전 시간선의 ‘율리시즈’였다.
‘율리시즈’의 주체가 되는, 가장 비참하게 죽은 율리시즈.
그가 내 눈앞에 있었다.
“어머니….”
카밀라 황비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비참해진 몰골로 덜덜 떠는 어릴 적의 모습으로.
***
드래곤 하트가 보여 주는 ‘율리시즈’의 생애는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빨리감기 영상을 돌린 것처럼 쉭쉭 지나가는 장면들을 나는 홀린 듯이 바라봤다.
‘율리시즈’는 엄청난 핍박과 구박을 받으며 황궁에서 그림자처럼 자라야만 했다.
“저 천한 것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벌레보다도 끈질긴 생명력이구나.”
카밀라는 겨우 살아남은 ‘율리시즈’를 멸시하며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황궁 시녀들에게 일렀다. 궁 내의 실세가 된 황비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던 시녀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율리시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배고파…. 추워….”
앙상하게 마른 겨울나무처럼 홀쭉해졌어도, ‘율리시즈’는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유년 시절에는 황궁의 시종들이 남긴 음식을 주워 먹고, 아플 때면 황궁의의 약방에 몰래 숨어들어 가 허겁지겁 약을 훔쳐 오고, 눈동냥으로 세드릭이 받는 검술 지도를 보며 힘을 길렀다.
청소년기가 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괴롭힘이 더 심해졌을 뿐.
황비 모자, 그리고 부황인 빈센트로부터 받는 멸시와 조롱이 만만찮았지만, ‘율리시즈’는 굴하지 않고 잡초처럼 자랐다.
‘외로워….’
완연히 성장한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곁에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단 사실이었다.
끝내 카밀라와 세드릭을 궁지에 몰아넣고, 반역을 일으켜 어머니를 비참하게 죽게 만든 원흉인 빈센트를 죽였어도 그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찾아야 해….’
무엇을?
그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하면서도, ‘율리시즈’는 무작정 자신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아껴 줄 존재를 본능적으로 찾았다.
뱀이 ‘율리시즈’가 본래 가졌어야 할 영광을 빼앗았음에도, 뱀이 시간을 돌리는 바람에 또 나에 대한 그리움을 잊었음에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율리시즈’는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 헤맸다.
‘찾아야 해….’
기이한 갈망은 해결되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율리시즈’는 아마도 제 어머니가 바랐을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복수를 멈추진 않았다.
너무 긴 시간 동안 고통받았기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지나치리만큼 완벽하게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하는 황제를 보며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새로이 등극한 황제는 우리가 예전에 황비와 함께 황후를 죽이는 데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면 다 죽여 버릴 거요!”
“아직 황비 모자가 유폐되어 살아 있다지만, 피바람이 불지 않겠습니까?”
“이미 몇 죽어 나간 사람들이 있소.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치는 수밖에.”
‘율리시즈’가 오랜 시간 버텨 기어이 제 자리를 되찾은 만큼, 황궁은 깊이 썩어 있었다.
외조부인 엘리엇은 이미 그들에게 밀려 사망한 지 오래였다. 황궁에 지속적인 물갈이를 했으나, 황비와 연줄이 닿아 있지 않은 자가 없었다. 시녀들과 시종들마저도 유폐된 황비 모자의 눈과 귀였으니. ‘율리시즈’는 파내도 파내도 끝이 없는 기분에 절망스러워졌다.
‘어머니… 해야만 하는 복수임에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율리시즈’는 지쳐 갔다. 이번 생에서 박탈당한 영광은 그에게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다 빼앗아 갔다.
엘리엇도, 로라도, 셀레스틴도 전부 죽어 떠나간 자리는 황폐했다.
외롭고 무거운 황제의 관을 떠받치며, ‘율리시즈’는 나를 찾고 싶어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꼭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는 건 확실해.’
그는 자신이 서서히 미쳐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군지, 이름이 무엇인지, 생김새가 어떠한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니. 외로움에 미쳐 가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기이한 욕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율리시즈’가 그를 배신하고 뒤를 치려는 인간들을 베고 또 베는 날의 연속에서 그것만이 그를 지탱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피에 미친 폭군을 처단하러 내가 왔노라!”
유폐됐던 2황자 세드릭이 기어이 도망쳐 반란군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왔다.
흰 백마 위에 올라탄 세드릭은 그의 어머니인 황비 카밀라와 함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율리시즈’를 단죄하러 왔다고 소리쳤다.
더는 피의 숙청을 두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다.
‘나는 정당한 복수를 했을 뿐인데…….’
‘율리시즈’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폭군을 물리쳐 그의 목을 베리라!”
“그를 죽여 목을 바치는 자에겐 큰 포상이 있으리라!”
“세드릭 황자 전하께 무궁한 영광이 있으리!”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황궁엔 믿을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일찍이 반란군에게 포섭되었거나, 그들의 세작이었거나, 이번 기회를 통해 반란군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들에게 있어 ‘율리시즈’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아아. 어머니.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삶이 너무나 힘겨웠다. 반란군과 싸워 봤지만,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율리시즈’는 화살을 여러 대 맞은 고슴도치 같은 꼴이 되었다.
“죽어라, 암군!”
푹, 푹, 푹. 수많은 칼이 ‘율리시즈’의 폐부를 찢고 들어왔다. 쿨럭거리며 검붉은 핏덩어리가 입에서 떨어졌다. 무릎을 꿇고 의식을 잃어 가는 ‘율리시즈’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네가 죽는구나…!”
카밀라 황비는 환호했으며,
“어서 죽어라. 이 버러지 같은 것.”
이복동생인 세드릭은 잔인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핏빛과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서 ‘율리시즈’는 다 꺼져 가는 의식을 붙들고 빌었다.
‘내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평생을 그리워했으나, 끝내 실체도 붙잡지 못하고 그림자조차 잡지 못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보다 더 처참하게 몰락할 수 없는 순간인데도, 죽어 가는 중인데도… 나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찾고 있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를, 반드시 찾아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서 생각하다니요.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율리시즈’는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도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내게도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고 아껴 줄 사람이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그의 숨이 끊어질 쯤에서야,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는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아. 그러했던가.’
마지막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떨어져 다른 파편들과 붙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간절히 나를 만나길 바랐던 마음이,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아 한이 된 마음이 뒤섞여 완성된 드래곤 하트를 건네줄 ‘율리시즈’의 의식의 주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