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75화 (75/90)
  • 75.

    “다음부터는 절대… 아니, 아예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유리.”

    유리의 옆구리를 찔러 가며 엄포를 놓자, 율리시즈는 순순히 알겠노라 대답하면서도 꼭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저는 또 똑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스승님을 구하는 쪽을 택할 겁니다.”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신념을 담고 반짝거렸다.

    ‘이 고집불통 녀석이….’

    도저히 말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율리시즈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그래. 알았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내가 주의하마.”

    “정말이십니까?”

    “나도 이제 내 목숨 귀한 줄 아니까. 하지만 너도 명심해야 할 거다. 네 목숨도 소중하다는 걸. 그리고… 네가 살아 있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

    “한 나라의 황제라는 자리가 가벼운 줄 아느냐? 너를 기다리고 있을 대신들과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이젠 쉬이 네 목숨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율리시즈의 가슴팍을 콕콕 찌르며 짐짓 엄하게 잔소리를 하자, 유리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행하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제 옆에 계속 함께 같은 풍경을 보겠다고 약조만 해 주신다면요.”

    “…당연히 해 줘야지.”

    여기까지 와서 안 하겠다고 할 리가 있나.

    그런데도 이 젊은 황제 폐하께서는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갛게 붉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저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내가 너의 말을 안 들어줄 수 있을까.’

    언제나 사랑스러운 나의 황자님.

    “좋습니다! 그것만 지켜 주신다면 저 또한 오래오래 건강하게 제 한 몸 아끼며 살아가겠습니다.”

    홍조를 띤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율리시즈를 보니 나 또한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풀어졌다.

    “그래.”

    나는 줄곧 중요한 사실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내 삶을 지탱해 줄 만큼 소중한 이가 있다면,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함께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한 번 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잃을 뻔했으니, 두 번 다시는 이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이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율리시즈’.”

    “예.”

    내 부름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율리시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미련이나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함만 가득했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드디어 유리가 나와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만 할 뿐.

    “…너희들의 드래곤 하트를 받을게.”

    “그 말만을 기다렸습니다. 영원토록 찾아 헤맸던 ‘우리’의 하나뿐인 짝이시여.”

    일그러지고 흉터투성이의 얼굴로도 해사한 웃음은 가려지지 않았다. 찬란한 기쁨이 ‘율리시즈’에게서 뚝뚝 떨어졌다.

    ‘율리시즈’가 나와 유리에게 반으로 쪼갠 드래곤 하트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울퉁불퉁하고 모난 생김새의 붉은 보석은, 차가워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몹시 따뜻하였다. 마치 핫팩처럼. 작은 소동물을 움켜쥔 느낌과도 같아 세게 힘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온기 속에서 두근거림마저도 느껴지는 듯하여 오묘했다.

    “이제 두 사람이 동시에 반으로 쪼개진 드래곤 하트를 삼키면 됩니다.”

    “그거면 되는 건가?”

    유리의 질문에 ‘율리시즈’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렇다. 다만….”

    “다만?”

    “주의할 사항이 있다. 수만 년의 세월을 거친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 드래곤 하트도 마찬가지다. 불분명하지만 그 보석 역시 ‘우리’와 분리되어 있으면서 불분명하게나마 자아를 지니게 되었지.”

    자아를 가지게 된 보석이라니. 드래곤 하트는 역시 범상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래서? 섭취한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물론 율리시즈는 어서 이것을 내게 먹이고 멀쩡히 회복하기만을 바라고 있는지,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아마도 드래곤 하트가 두 사람을 시험할 거다.”

    “시험?”

    “미약하게나마 자아를 가진 이상, 쉽게 두 사람의 힘으로 흡수되려 하지 않을 거다. 오랜 세월 동안 농축된 힘을 가져갈 자격이 되는지 확인해 보려 하겠지.”

    “정말 까다로운 보석이로군.”

    율리시즈가 혀를 차며 손바닥 위의 드래곤 하트를 노려봤다. 우습게도 나는 유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리… 그 보석, 네 성격을 따라가는 것 같다만.’

    이번 사건으로 율리시즈의 고집이 황소 고집 같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주인인 율리시즈를 닮은 드래곤 하트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겠다는 수긍이 들었다.

    “그렇다면 ‘율리시즈’, 드래곤 하트가 우리에게 낼 시험이 뭔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통과하지 못한다면?”

    내 말에 ‘율리시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드래곤 하트가 낼 시험이 무엇일지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보석에게 자아가 생겼음은 인지했으나, 그게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보석의 의지를 느낄 수는 있게 되었으나, 그게 당신들에게 무엇을 바랄지는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궁금하신 것에 대한 대답이 미흡하여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두근거리는 작은 심장과도 같은 드래곤 하트를 쥐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이 보석이라면 무엇을 요구할까.’

    수만 년 동안 농축된 힘의 원천. 그 힘을 바르게 써 줄 자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올바른 곳에 힘을 쓸 자격이 있지 않은 자라면, 그걸 시험하는 게 율리시즈를 닮은 드래곤 하트라면… 자격 미달인 자는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드래곤 하트 내에 잠재된 힘이야 엄청나니, 폭사도 가능하겠지.’

    자아를 갖춘 보석이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고집불통은 반드시 자기 소신대로 밀고 갈 게 분명하니까.

    생각 정리를 마친 후, 나는 ‘율리시즈’에게 말했다.

    “좋아. 나는 준비됐어.”

    “…괜찮으시겠습니까?”

    ‘율리시즈’는 우리에게 이 드래곤 하트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했으면서, 정작 내가 먹겠다고 하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괜찮아.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국 너에게서 나온 드래곤 하트이니 우릴 해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세진 님.”

    내내 침착하고 차분하던 ‘율리시즈’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이 드래곤 하트도 ‘너희’를 닮았을 테니, 걱정하지 않을래. 어떤 시험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알겠습니다.”

    “나 또한 준비됐다.”

    율리시즈도 드래곤 하트를 쥐고 ‘율리시즈’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건가?”

    “…그래.”

    ‘율리시즈’는 율리시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 모두 제가 신호하면, 그때 함께 드래곤 하트를 삼켜 주십시오.”

    ‘율리시즈’의 지도하에 우리는 입가에 보석을 가져갔다.

    “자, 이제 삼켜 주십시오.”

    꿀꺽.

    망설임 없이 입 안에 드래곤 하트를 집어넣자, 보석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려 식도 너머로 넘어갔다.

    그 맛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시면서도 매웠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맛을 느낀 후에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어둠만이 펼쳐졌다.

    ‘드래곤 하트의 시험이 시작된 건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무엇이 다가올지 궁금해하며 기다렸다.

    그때, 적막을 뚫고 어린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 당신이 우릴 삼킨 사람? ]

    “어?”

    [ 당신이 우릴 삼킨 사람이냐고 물었어. ]

    “그래.”

    ‘드래곤 하트의 목소리구나.’

    보석은 마치 ‘율리시즈’처럼 자기 자신을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지칭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드래곤 하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우릴 왜 삼켰지? ]

    “살고 싶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서.”

    [ 많이 다쳤던 건가? 목숨이 경각에 이를 정도로? ]

    “…그랬지. 그래서 간절히 살고 싶다 빌었더니, ‘율리시즈’가 나타나 ‘너희’를 먹으면 나와 율리시즈 둘 다 살 수 있다고 했어.”

    [ 우리를 어떻게든 흡수할 거야? ]

    “할 거야.”

    내가 사랑하는 율리시즈와 미래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 우리가 거부한다면? ]

    “힘으로 겁박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지금 많이 곤란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너를 흡수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로 돌아갈 거야.”

    내 따스한 햇볕 황자님. 내가 돌아갈 장소를 만들어 준 유일한 사람.

    이제는 너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나 또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만 해.”

    어둠 속에서 나는 은빛의 스태프를 꺼내 들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너희’가 어떤 시험을 제시하든 간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 폭력적이야…. ]

    “그렇게 욕해도 상관없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을 위해서 이젠 못 할 게 없어졌거든.

    내 말을 들은 드래곤 하트는 아무 답도 없다가, 돌연 이렇게 말했다.

    [ 폭력적이지만 낭만적이네. ]

    “음… 칭찬 고마워?”

    [ ‘우릴’ 따라와. ‘우릴’ 삼키려거든, 꼭 보고 가야 할 것이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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