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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74화 (74/90)
  • 74.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묻고 싶은 말도, 해 주고 싶은 말도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은 고작 이거였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누더기 같은 얼굴의 흉터 때문에 비뚜름한 미소를 짓는 ‘율리시즈’를 보고 울컥했다.

    “저를 비롯해 수많은 ‘율리시즈’들이 드디어 진정한 짝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우리’는 사라진 시간선을 꼽아 보며 언제나 당신을 항상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니 정말 괜찮습니다. 마침내 평범하고도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는 최후의 가능성을 찾아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오랫동안 준비했던 말인 듯했다. 자기 심장을 쓰라고 쥐어 주며 한 점의 미련도 없이 해사하게 웃는 것을 보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희생을 결심한 ‘율리시즈’가 너무나 가여워 그를 꼭 끌어안았다.

    조금 우습게도, ‘율리시즈’는 내가 그를 껴안자 놀랍도록 당황스러워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너도 율리시즈니까.”

    긴 시간 동안 외로이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을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지나치리만큼 헌신적인 모습이 가슴을 시큰거리게 해서.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율리시즈가 분개했다.

    “율리시즈는 저 하나뿐이라니까요, 스승님!”

    “미안. 이번만큼은 네 말을 못 들은 척할게.”

    “스승님!”

    내가 아는 율리시즈가 칭얼거리든 말든, 나는 ‘율리시즈’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저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어.”

    “…….”

    “아팠잖아. 힘들었잖아. 괴로웠잖아.”

    뱀이 내게 억지로 주입한 원작 외에도, 이따금 기이하게도 엿본 과거의 편린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이번 시간선의 바로 직전에서의 폭군 율리시즈가 살해당할 적의 기억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부스러져 결국은 내게 닿았던 그 끔찍하고도 참혹했던 기억들.

    그 속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던 율리시즈는 울부짖고 있었다.

    정당하게 누렸어야 할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를 그리워하면서.

    혼자서 쓸쓸하게 맞이한 그 최후가, 괜찮았을 리 없었다.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낡은 ‘율리시즈’의 옷자락을 적셨다.

    “내가… 내가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여정이었을까.

    언젠가는 맞을 행복한 결말에 대한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끝없는 사막과도 같은 길을 헤매고 다니는 건 크나큰 고통이었을 텐데.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하는지, 이것조차 괜찮다고 말해 줬다.

    그것이 진심이어도, 애써 포장한 거짓이어도 나는 네가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뱀의 잘못이지 않았습니까? 당신 역시도 피해자였을 뿐입니다.”

    내가 울자 ‘율리시즈’가 심하게 쩔쩔맸다. 율리시즈를 향해 도와 달라는 눈빛마저 보냈다.

    “스승님을 울린 나쁜 놈은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는데 그걸 옆에서 가만히 내버려 둔다니. 그 정도로 몰상식한 놈일 줄은 몰랐군.”

    “뭐야?!”

    두 명의 율리시즈가 투닥거렸다. 내 입장에서는 둘 다 율리시즈였기에 어이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너희. 같은 율리시즈면서 싸우지 마.”

    내 말에 두 사람 모두 발끈했다.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습니다, 스승님! 어딜 봐서 저런 놈이랑!”

    “…유리, 황제답게 체통을 지키는 게 어떨까?”

    “시간이 멈추었으니 지킬 체통 따위는 없습니다.”

    “…….”

    누구한테 배웠길래 대체 한마디를 안 져 주는 건지.

    “그러다 혼난다.”

    실소를 터트리자 어릴 때도 보이지 않던 유치한 모습을 내보이던 율리시즈가 환히 웃었다.

    “앗! 웃으셨습니다!”

    “응?”

    “스승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줄곧 뱀 때문에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유리….”

    하도 ‘율리시즈’를 질투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그게 다 나를 웃게 하려는 시도였단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이.’

    “우리, ‘율리시즈’가 시간을 멈추기 전에는 죽을 뻔한 거 알고 있어?”

    “알죠. 정말 마지막인 줄만 알았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지금도 잠시 시간을 벌어 둔 것일 뿐, 멈춘 시간만 풀리면 우리 둘 다 죽을 테고.”

    아마도 율리시즈가 먼저 죽을 것이다.

    시간이 멈추기 직전,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새파랗게 질린 율리시즈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길 것 같았으니까.

    ‘그 뒤를 따라서 나도 죽었겠지.’

    여기에 ‘율리시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물론 유리의 무모한 시도 끝에 나타난 존재가 그였으니, 결국 율리시즈가 자신과 나 둘 모두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너는 이 상황에서조차 내 웃음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장난을 친 거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율리시즈가 자줏빛 눈을 반짝였다.

    “그거야, 제가 스승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니까요.”

    “…….”

    “저는 스승님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스승님을 연모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저는 스승님이 항상 행복하시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저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걸 오래 볼 수 없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슬퍼하는 원인이 제 자신이라면 용서할 수 없어서요, 라고 율리시즈가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보고는 드래곤 하트를 주는 짓이 멍청하다면서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정작 또 다른 제 자신이 하는 짓거리가 심장을 내주는 일이라니. 이건 스승님을 울리겠다는 선전포고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야.”

    “그러니 저놈이 싫다는 건 반쯤은 진심입니다! 스승님을 울리는 자, 그 누구라도 제겐 적입니다.”

    “…어휴.”

    어떻게 잘 나가다가 이렇게 산통을 깨는 재주가 있는지!

    ‘나 때문인가. 다 내 죄인가.’

    시간이 멈춰 윈터가 석상처럼 굳어 버린 것이 아쉬웠다. 윈터가 옆에서 평소처럼 있어 주었다면, 필시 율리시즈의 주둥아리를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너는 내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바보 같아지는구나.”

    “사랑하는 스승님 옆이니까요.”

    “…그 사랑한다는 말 좀 그만해라. 낯뜨거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

    내 말에 유리가 ‘율리시즈’를 향해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도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까는 같은 저라고 하셨잖습니까. 새삼스럽게 같은 인물 앞에서 쑥스러워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너 진짜 얄밉다.”

    율리시즈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은 꿀밤 한 대가 간절했다.

    하지만 내 투덜거림에도 황금빛 햇살을 닮은 율리시즈는 해사하게 웃기만 했다.

    “어어, 또 웃으셨습니다! 제가 스승님을 또 웃게 해 드렸습니다.”

    “…내가 웃었다고?”

    “예. 활짝 웃으셨습니다. 입꼬리가 아주 예쁘게 반월처럼 올라가셨습니다!”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율리시즈는 순수하게 내 미소를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서 나는 상황의 심각성조차 잊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기에, 이깟 웃음 따위는 얼마든지 지어 줄 수 있었으니까.

    우리를 지켜보던 ‘율리시즈’가 조용히 있다가 슬쩍 끼어들었다.

    “화목해 보여서 좋습니다. 사이가 좋군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아, 아니 이건!”

    “부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은 유대가 각별하다는 건, 이곳의 ‘내’가 막무가내로라도 심장을 꺼내 바치려 했을 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너는… 괜찮아?”

    많은 것을 함축한 질문이었다.

    수많은 ‘율리시즈’의 바람이 뭉쳐 생겨난 존재. 그는 억울하지 않을까? 나라면 억울했을 텐데. 내가 가지지 못한 행복을 누리는 또 다른 ‘나’를 보는 건… 상당히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남은 자투리 천을 이어붙인 것 같은 얼굴이 내가 아는 율리시즈처럼 행복으로 물들었다.

    “제가 바랐던… ‘우리’들이 바랐던 결말을 당신들은 기어이 이끌어 냈습니다.”

    운명으로 엮인 짝과 만나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는 평온한 일상.

    “그것을 실현해 불가능이 아니라 증명해 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수만 년에 걸친 고생이 무용해지지 않았으니까요.”

    “율리시즈….”

    “‘우리’는 꿈꾸던 바람이 헛된 이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 당신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울퉁불퉁하고 모난 드래곤 하트를, ‘율리시즈’는 다시 내게 내밀었다.

    “그러니 부디, 이것을 받아 이곳의 ‘나’와 같이 반으로 나눠 섭취하십시오.”

    “이걸?”

    드래곤 하트는 붉은빛의 어른 주먹만 한 두께를 자랑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정확히 반으로 쪼갤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수만 개의 드래곤 하트가 농축되어 있는 것이니, 두 사람 모두 몸을 회복하고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내 고민을 털어 주려는 듯, ‘율리시즈’가 드래곤 하트를 가볍게 두드리자 보석은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드래곤 하트의 힘은 보석을 입에 넣는 순간 각자에게 흡수될 겁니다. 물론, 본래 소유자인 ‘우리’가 허락한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다는 건…?”

    “저 녀석이 한 짓이 멍청한 짓이라 욕한 건 그래서였습니다. 자살을 감수하면서까지 꺼낸 드래곤 하트는 그냥 평범한 보석에 불과하거든요. ‘우리’의 심장은 유산처럼 남겨진 드래곤 하트가 겹겹이 쌓여 결정화된 것이기 때문에, 사용이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리의 희생이 헛된 개죽음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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