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율리시즈의 눈동자는 아멜리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자줏빛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완전히 황금빛이 메웠다. 정오의 햇살을 녹여 만든 구슬 같은 눈이 노랗게 빛났다.
“설마 제가 숨겨 둔 수도 없이 무작정 스승님을 구하러 내려왔을 것으로 생각하셨어요?”
날카로운 맹수의 눈 아래로 유리의 입가가 천연덕스럽게 올라갔다. 홀린 듯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율리시즈가 가볍게 검기를 날려 뱀의 몸통을 베었다.
“크아악!”
뱀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나는 그대로 아래로 함께 추락했다.
“으아악!”
아찔한 하강에 두 눈을 꼭 감았는데, 단단한 두 팔이 나를 낚아채 안전하게 땅으로 이끌었다.
“괜찮으세요, 스승님?”
양쪽 눈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율리시즈가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완전한 용의 눈이었다. 나는 그것에 놀라 율리시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고 말을 더듬었다.
“유, 유리. 너… 눈동자가.”
“아. 좀 달라졌죠? 저 뱀 새끼랑 닮아서 꺼림칙하긴 하네요.”
“용도 따지면 뱀처럼 파충류니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녀석 공격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율리시즈가 나를 자기 진영 측에 내려놓더니, 다시 날듯이 튀어나가 뱀에게로 향했다.
반인반룡의 후손이니 진짜 드래곤은 될 수 없을 테다. 각성 후에는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게 전부겠지만, 어쩐지 나비처럼 몸을 날리는 유리의 등 뒤에 날개가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언제 저렇게 컸지.’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뻑끔뻑대던 갓난아기일 때가 어제 같은데.
새삼 아이가 다 자란 성인이 되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 뱀은 씩씩거리며 율리시즈를 향해 포효했다.
“이 건방진 게…! 먹잇감이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화를 자초하는구나.”
“뱀 주제에 뭐라는 건지. 잡아먹을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든가.”
자신만만한 율리시즈의 말에 뱀은 더 자극당한 듯 화를 냈다.
“네 놈은… 수천 번, 수만 번을 되돌려도 늘 똑같구나. 그 자신만만한 모습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어.”
화가 잔뜩 난 뱀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불길한 붉은 구체가 거대한 뱀의 머리통보다 더 커졌다.
“네 스승이 먼지만도 못하게 부스러지는 꼴을 지켜보고 절망해라.”
마력보다는 마기에 가까운 혼탁한 에너지를 압축한 공격이 나와 윈프리드 제국군을 향해 날아왔다.
“으아악! 우리 주인님만은 안 됩니다!”
윈터는 겁에 질렸어도 그 작은 몸으로 나를 보호하려 나섰다. 기특한 짓이었지만, 윈터를 보고 루나는 소리를 꽥 내질렀다.
“바보같이 뭐 하는 거야, 윈터! 세진 님의 마력 구속구를 풀어야 우리가 살 확률도 있는 거 아니겠니!”
“그걸 어떻게 풀어요! 풀기 전에 죽을 거예요!”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죽음의 위기를 앞두고서도 두 모자는 사이좋게 싸웠다.
‘…이상하다.’
신기하게도 나 역시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율리시즈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부서지는 몸이 되었는데도 내가 저 뱀에게 당해 죽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세요.”
율리시즈가 싱긋 웃으며 여유롭게 뱀을 걷어찬 뒤, 신속하게 그 불길한 구체에 다가섰다.
“제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스승님을 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정한 웃음을 보여 준 율리시즈는, 뱀이 날린 구체가 가까이 다가오자 입을 벌렸다.
“{흡수하라.}”
낯선 언어가 들렸다. 마법 주문은 아니었다. 이것은 용언이었다.
용의 피가 희석되고 또 희석되어 아주 극소량의 용언밖에는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각성을 이룬 후손들을 위해 남겨진 유산.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뱀의 공격이 황금빛 글자들 아래에서 점점 쪼그라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태산같이 거대하던 검붉은 에너지 구체는 율리시즈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압축되고 또 압축되어 고작 알사탕만 하게 줄어든 뱀의 공격은 냠, 하고 율리시즈가 먹어 버렸다.
“맛도 없네. 으.”
“그, 그걸 왜 먹어! 유리! 아무거나 주워 먹는 거 아니다!”
불량 식품을 먹은 아이를 다그치듯,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주인님은 황제 폐하를 너무 유리 세공품처럼 여기세요.”
“동감한다, 아들. 사실 율리시즈 님이 각성하셨으니 이젠 강철도 씹어 먹을 수 있지 않니?”
조잘거리는 페럿 모자의 수군거림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탈 나면 어떡해. 얼른 뱉어! 얼른!”
“배탈 난다고 뱉으면 이 일대가 큰 구덩이로 변해 버릴 텐데요?”
“그, 그래도!”
율리시즈가 가볍게 내 앞에 착지하듯 날아왔다.
“괜찮아요. 각성한 이후로는 뭘 먹어도 위장에서 다 깔끔하게 소화가 되어서. 장염 같은 거에 걸릴 염려는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스승님.”
그는 자기 배를 통통 두드리며 웃었다.
“드래곤은 최상위 포식자이니 어떤 에너지도 먹어 치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가능해서요.”
“…정말?”
“네. 정말이죠. 이를테면… 이런 것도 가능하답니다?”
율리시즈가 두 손에 아까 뱀이 보냈던 것과 비슷한 구체를 만들었다. 뱀이 쏘아 보냈던 것과는 다르게, 황금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것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이 주먹 같은 구체가 만들어지자, 율리시즈는 그것을 캐치볼을 하듯이 휙 뱀에게로 던져 버렸다.
“이게 무슨 잔재주… 크아아악!”
거대한 뱀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저도 그 공격을 받아 삼키려다가 실패하여 아가리가 쭉 찢어졌다.
율리시즈가 역으로 보낸 공격이 너무나 강력하니 차마 뱀으로서는 소화시키지 못하여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
“받은 공격 그대로 고스란히 되돌려 줬습니다. 자업자득이죠.”
“어, 음…. 그래.”
“저 잘했죠, 스승님?”
엄청난 위력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쳐 낸 제자는 평소처럼 눈을 반짝이며 내게 칭찬을 요구했다.
“그래…. 잘했다.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쓰다듬어 주세요.”
“그, 그래.”
손을 들어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자 율리시즈가 고롱고롱 고양이 같은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나는 율리시즈의 체면을 생각해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 했는데, 유리는 그게 못마땅한지 다시 내 손을 붙들어 자기 머리에 얹었다.
“왜 거두십니까? 다시 쓰다듬어 주십시오.”
“…일국의 황제라는 녀석이 채신머리없게 귀여움받는 모습을 보여 줘서 되겠느냐?”
내 말에 율리시즈는 자기 군대를 휙 쏘아봤다. 그와 감히 눈을 마주치려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외면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눈을 돌렸다고 해서 귀까지 막힌 건 아닐 텐데.”
“귀도 막으라 하면 되지요. 그러면 스승님께 마음 편히 귀염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아가리가 터졌으나 다시 회복 중인, 극도로 분노한 뱀이 시뻘건 눈으로 우릴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애꿎은 병사들과 페른, 데이지, 윈터와 루나 모자에 엘리엇까지 우리에게 기민하게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져 뺨이 다 화끈거렸다.
“너는… 다 자란 것 같다가도 내 앞에서는 어린아이 적처럼 구는구나.”
“스승님 앞이니까요. 스승님께는 언제나 어여쁨만 받는 사내고 싶습니다.”
황금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나를 향한, 온전히 애정으로만 찬 그 모습에 심장이 떨렸다.
“…내가 뭐가 좋다고.”
“다. 다 좋습니다. 스승님이라면 무엇이든지 전부 좋습니다. 무사하신 것도 기쁘고, 이 상황에서도 제가 배탈 날 것을 염려하시는 것도 귀엽습니다. 스승님의 존재 자체가 제게는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낯간지러운 말이 귀를 침범했다. 페른은 해탈한 표정이었고, 데이지는 뺨을 붉혔으며, 윈터는 씩씩거렸고 루나는 그런 윈터를 붙잡았다.
엘리엇 피델리움 변경백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황제 폐하께서 행복하시다면야 저는 신하로서 반길 뿐입니다.”
오래전에 번뇌를 내려놓은 듯한 말에 율리시즈는 헤헤 웃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끄응.”
“…엘리엇에게 대체 언제 무슨 말을 한 거야?”
“있어요, 그런 게. 하하.”
율리시즈는 뱀이 끙끙거리며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나를 번쩍 들어 빙빙 돌았다.
“스승님이 이 세상에 계셔서 이 제자는 행복합니다.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 그만해. 뭐 하는 거야…….”
부끄러움에 율리시즈의 두 팔을 퍽퍽 내리쳤지만, 어찌나 근육이 단단하던지. 율리시즈는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내 제자가 너무 강해져서 곤란했다.
황금빛 용의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 채 진지하게 물었다.
“저와 결혼해 주지 않으실래요, 스승님?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유리… 너….”
“스승님의 곁을 평생 지키고 싶습니다. 오늘처럼… 제자 된 도리로서 구하려는 명분이 아니라요. 저는 스승님의 반려로서 당연한 의무로 당신을 구하고 싶습니다.”
“…….”
내가 납치된 일이 많이 충격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장난스럽게 청혼하는 듯하지만, 나를 끌어안은 두 팔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입가는 울음기를 참으려는 듯 더욱 과장스럽게 올라가 있었으니까.
“율리시즈.”
“이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적법한 배우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나요.”
“나는….”
나는 다 부서져 가는 인간인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도 너를 사랑할 자격이 될까.
그게 너를 더 슬프게 하지는 않을까.
어물거리는 나를 향해 율리시즈는 슬픔을 감춘 눈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님이 어떤 상태시든지요. 아프시다면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당신이 나을 방법을 강구할 것이고,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같이 눈을 감을 겁니다.”
우리가 염병 아닌 염병을 떨고 있을 때, 찢어진 아가리를 겨우 회복한 뱀이 다시금 살기를 뿜어냈다.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느끼게 해 주마, 이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