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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69화 (69/90)
  • 69.

    연신 광대처럼 낄낄거리며 웃던 뱀은, 나와 율리시즈를 죽여 버리겠다고 할 때만큼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단지 표정만을 바꿨을 뿐인데 느껴지는 한기에 나는 부르르 떨었고, 율리시즈를 포함한 지원군은 극도로 분노했다.

    특히 율리시즈가 매섭게 표정을 굳혔다. 나는 세드릭 사건 이후 율리시즈가 저렇게까지 누구 하나 죽이겠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그걸 여기서 처음 볼 줄이야.

    “기어코 스승님을 죽이겠다고……?”

    우습게도, 나는 여기서 율리시즈를 향해 딴지를 걸고 싶었다.

    ‘얘야. 왜 너는 너도 죽이겠다는 미친놈의 말 중에서 나만 쏙 골라 이야기하는 거니?!’

    자기 안위나 챙길 것이지. 뱀이 제 육신을 노리는 줄도 모르고, 나만 챙기느라 눈이 돌아 버린 제자가 안쓰럽고 바보 같기도 했다.

    사랑에 빠지면 나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더 집중하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러는 나 역시, 뱀이 율리시즈를 죽이고 그 몸을 가로챌 것이라 말한 뒤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율리시즈를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가장 급박한 때에서 말랑한 감정이나 깨닫다니. 시기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율리시즈에게 내가 사실은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더라면…….

    우리가 함께 오래오래 살 방법을 찾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빌어먹게도 절망감과 후회가 물밀듯이 올라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설아의 죽음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만 아니었다면 그 애가 꽃다운 나이에 죽는 일 따위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잖아.’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는 싶어 하면서, 정작 그들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긴 어려워하는 바람에 모든 걸 위기로 몰아넣었지.

    어쩌면 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뱀이 말하길, 신이 영혼의 짝 중 하나로 나를 공들여 만들었다 했으나 이리 무능력한 인간이라니 불량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슬픔에 잠식되는 내 눈앞으로 육체가 바스러져 하얀 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꼭 눈가루처럼 내리는 것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정신 차리세요, 스승님!”

    “?!”

    “스승님께서 그러셨잖아요.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어릴 적 동화책을 읽어 주면서 말씀하셨죠.”

    ‘내가 그랬나.’

    잘 생각도 나지 않는 말들을, 저 어린 황제는 너무도 쏙쏙 기억해서 머릿속에서 꺼내곤 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스승님께서 호랑이 같은 놈에게 잡히셨고, 상태로 보아 마법까지 막히셨지만…….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바보 같은 유리. 율리시즈. 나는 거대한 미끼야. 진짜 목표는 너지. 뱀이 회귀를 번복할 때, 항상 뱀을 좇아 나를 찾던 너의 육신을 훔칠 계획으로 이 뻔뻔한 놈이 온 거야.

    ‘나는 덤 같은 걸로, 녀석의 잔인한 호기심을 채워 줄 디저트 같은 거라고.’

    네가 죽어 버리면, 그 가죽을 덮어쓰고 너인 척 나를 기만할 거야. 나는 그게 네가 아님을 알면서도 차마 죽이지 못하고 통곡하다 죽임을 당하겠지.

    우울한 시나리오가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줄줄 써지고 있는데, 율리시즈가 힘껏 소리쳤다.

    “스승님은 너무 잡생각이 많으십니다!”

    “어…… 어?”

    “이 제자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인 스승님께서 가르치신 제자, 율리시즈입니다. 외조부의 수련을 받아 검기 정도는 쉬이 휘두를 수 있는 소드마스터 초입이 된 접니다.”

    “…….”

    “저는 스승님이 걱정하실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스승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황제의 위에 올랐고, 스승님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힘을 길렀습니다.”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아직 품에 넣고 다녀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라 다 큰 성인이었다.

    “저는 강합니다. 저런 무뢰배에게 스승님과 제 목숨을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는 형편없는 사내는 아니란 말입니다.”

    당돌하고도 자신만만한 선언에 윈터와 루나가 거들었다.

    “맞아요, 맞아!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강한 분인 줄은 아십니까? 거기 사악한 무언가!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소중한 분이신 우리 주인님을 납치했다니요!”

    “말 한번 잘했다, 아들아! 예의도 없고 교양도 없는 저 살인자는 멸해야 마땅한 종자다. 퉤퉤! 아직도 동굴 속에서 같이 고초를 겪은 세진 님의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음…… 저기, 얘들아. 날 위하는 건 고마운데, 어째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구나.’

    마지막으로 페른이 쐐기를 박았다.

    “황제 폐하의 연인이 되실 우리 대마법사님을 가지고 협박을 해? 마탑의 추종자……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네놈을 뼛가루째도 남기지 않고 구워 버릴 것이다.”

    다들 으르렁거리며 뱀 앞에서 기죽지 않고 욕설을 쏟아 냈다. 뱀은 약간 멍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어느 시간대에서도 이렇게까지 한데 뭉쳐서 너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오로지 율리시즈만이 외롭게 혼자 달려와 너를 돌려 달라고 애걸했는데…. 이젠 저 아이마저 울지 않고 너를 내놓으라 내게 으름장을 쓰는군.”

    그것이 몹시 신기하고 희귀한 일처럼, 뱀은 인상을 썼다. 나 또한 그의 반응에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오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어.’

    그놈의 원작. 아마도 이전의 율리시즈가 겪었을 회귀 전의 시간대에서의 일은 전부 어그러졌다.

    율리시즈와 아멜리아는 무사히, 훌륭하게 자라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황족이 되었다. 세드릭과 카밀라는 죽고, 남은 잔해라고는 오직 과거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고 싶어 하는 늙고 간사한 뱀뿐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 역시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나는, 죽고 싶었었다. 때가 되면 몸이 부서져 사라진다는 무서운 저주를 걸어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죽고 싶었었다.

    설아를 허망하게 잃고, 내 인생의 희망을 잃은 뒤로 살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사라졌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 있어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력해졌으니까.

    하지만 율리시즈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을 더 만나고,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알 기회가 생겼다.

    아이가 나를 향해 웃으며 달려오는 그 평범한 순간이 얼마나 값진지를 느꼈다. 다시 지켜야 할 사랑스러운 사람이 생긴다는 건 내게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오늘은 무엇을 해 주면 좋아할까, 기뻐할까 하는 소소한 고민은 내게 반짝이는 별빛 같은 만족감을 선사했다.

    “스승님께서는 꼭 사셔야 하는 분입니다!”

    “우리 주인님에게 어떤 해라도 끼치면 손가락부터 가만두지 않겠어요!”

    “환자를 그냥 내버려 두는 의사는 없다는 거 알지? 이 비열한 뱀.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메스로 확 토막을 내 버릴 줄 알아!”

    “황제 폐하의 곁을 항상 지켜 주신 은인을 죽이려는 자는 내 원수나 다름없소. 이 늙은이의 검을 오랜만에 빼 들 때가 왔군.”

    “마법사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다 같이 파이어볼이라도 날려서 네놈을 통구이로 만들 작정이니까.”

    나와 함께 일상을 보내 준 이들이, 이제는 나를, 내 일상이 계속 이어지도록 돕기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게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다들…….’

    “너무 시끄럽군.”

    감동적인 분위기가 거슬렸는지, 뱀은 나를 붙잡고 모두에게 말했다.

    “이 자를 살리고 싶다면,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를 내놓아라.”

    “헛소리! 우리의 황제 폐하를 내놓을 수는 없다!”

    “저런 막돼먹은 자가 있나! 제국의 황제 폐하께 저런 무례를 끼치다니!”

    뱀의 무서움을 모르는 이들은 힘껏 목청을 높여 그를 비난했다.

    “조용히 해.”

    쿠웅.

    쓰러진 동굴의 잔해에서 거대한 돌기둥이 몇 개 솟아올랐다. 마치 길고 뾰족한 송곳처럼 생긴 그 돌기둥을, 뱀은 아무런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내리찍었다.

    “[죽어라.]”

    “으, 으아아아아!”

    병사들을 향해 무자비한 돌기둥 폭격이 이어졌다. 페른과 함께 지원을 나온 마법사들과 율리시즈가 곧바로 실드를 펼쳐 큰일은 피했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돌기둥의 날카로운 단면에 어느 병사는 졸도하기도 했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율리시즈와 대마법사뿐이다. 다른 개미 새끼들은 목숨이 아깝다면 저 멀리로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가진 마법의 힘, 그리고 먼 옛날 초월자들을 잡아먹어 생긴 힘까지 더해진 불길한 기운이 뱀의 손 위에서 작고 붉은 구로 압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젠장, 저건 피해야 해!’

    “모두 피하세요! 마력을 응축한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나는 뱀의 옆구리에서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젠장… 힘만 봉인되지 않았어도. 나도 당장에 저기로 가서 율리시즈의 군대를 도와 싸울 텐데…….’

    “율리시즈!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 이대로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날 거야!”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말한 것이었는데, 유리는 싱긋 웃기만 했다.

    ‘……웃고 있어?’

    “스승님. 스승님은 저를 너무 모르신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유리는 검으로 땅을 내려치더니,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서 내게 순식간에 다가왔다.

    “용혈의 각성은 저도 할 줄 아는 것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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