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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66화 (66/90)
  • 66.

    “나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뱀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율리시즈에게 날 구하러 오라는 협박 편지까지 보낸 놈이야.’

    착한 율리시즈는 나를 외면하지 못하고 구하러 올 거다. 반드시.

    그러니 내가 율리시즈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옳은 결정이었다.

    ‘뱀과의 악연을 끊으려면, 힘을 되찾은 지금이 적기이기도 하고.’

    뱀의 힘이 강대하다는 것은 안다. 이미 몸으로 혹독하게 겪어 본 사실이니까. 다만, 구속구를 차고 당한 거니 진짜인 내가 대마법사의 힘을 운용한다면 맞붙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면.’

    아니, 다 같이 힘을 합쳐 덤빈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율리시즈는 실력 있는 출중한 마검사다. 페른이나 윈터, 데이지 등도 뒤따라올 테고 어쩌면 마탑의 협조를 받아 마법사들도 참전할지 모른다. 병사들이야 당연히 올 테니 수적으로는 우리가 우세했다.

    괴물 같은 놈이라 해도 현재 기생하고 있는 숙주는 폐황자 세드릭에 불과했다. 세드릭과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면, 뱀이 이 세계에 남아 있을 명분은 사라진다.

    물론 완전한 소멸을 위해서는 공격을 퍼부어서 가능한지 살펴봐야 할 일이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희망적이었다.

    “세진 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동굴 벽에서 풀려난 루나의 몸은 마법으로 강화해 주고, 물과 곱게 갈아진 수프를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하지만 혼자 가라는 말에 루나는 윈터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점은 모자가 똑같았다.

    “괜찮아. 아까처럼 묶인 척 가장하면 뱀은 의심하지 못할 거야. 진짜처럼 마력도 숨길 거고.”

    “그래도 저는 걱정입니다. 편찮으신 몸으로 그 뱀과 싸울 수 있으실지…… 세진 님의 몸이 어디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가 참으로 걱정됩니다.”

    투두둑. 투둑.

    루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팔을 부러뜨린 탓인지, 내 몸이 부서지는 게 가속도가 붙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가루가 흩날렸다. 서서히 부서져 가는 몸뚱어리의 흔적에 루나는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이런 몸으로 어떻게…….”

    “괜찮아.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가서 애들에게 안부 좀 전해 줘.”

    “그럴게요!”

    “윈터에겐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전해 줘. 걔가 루나도 없어서 쓸데없이 자기 때문에 날 잃었다고 생각할 텐데, 가서 꿀밤 먹여 주면서 그딴 생각하지 말고 어서 구하러 오기나 하라고 해.”

    “네!”

    “그리고 페른에게는 내키지 않겠지만, 마탑에서 내게 호의적인 마법사들을 추려 이곳으로 와 달라고 말해 줘. 전력은 풍부할수록 좋으니까. 지금은 힘을 가려 받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나가 훌쩍거리며 노트에 필기구로 내가 지시한 사항을 모두 적었다. 내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루나가 가지고 다니던 물품과 똑같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리에게는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줘. 나는 무사하니, 너와 같이 이 무도한 놈을 짓밟아 버릴 때를 고대하고 있겠다고.”

    “물론입니다!”

    마지막 당부에 루나는 눈에 불을 켜고 좋아했다. 루나도 당한 것이 많으니, 뱀을 없애 버리겠다는 말에 신난 것 같았다.

    공간의 문을 열어 루나를 그 안에 들어가게 했다. 좌표는 윈프리드 제국 황성,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잘 부탁할게, 루나.”

    “맡겨만 주십시오, 세진 님! 제가 원군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무사하셔야 합니다! 약속입니다! 어기시면 안 됩니다!”

    “응. 약속할게. 마법사의 이름으로.”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눈물이 많아진 루나는 내 약속을 듣자마자 힘껏 문 속으로 달려들었다.

    루나가 사라진 자리는 다시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작게 불을 켠 상태로 내가 갇힌 지하 동굴을 탐색했다.

    “더럽게 꼬인 곳이네.”

    지하 동굴은 빠져나가는 길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것도 높은 천장에 성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있는 게 전부였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영영 나갈 수 없는 길이었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 뱀 새끼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자칫 잘못했다면 어둠 속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아사했을 수도 있었다. 팔이 부러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가정이었다.

    “밥, 밥부터 챙겨 먹고 힘을 내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가 졌다. 입술은 말라붙어 각질이 일어나 엉망이었다. 나는 서둘러 물과 먹을거리를 마법으로 만들어 급한 허기를 채웠다.

    ‘그 녀석에게 들키면 안 돼.’

    혹시라도 뱀이 들어올까 싶어 나는 아예 잠시 시간을 멈추고 흔적을 지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위장하는 건 기본이었다. 마력 구속구 밧줄도, 갇힌 루나도, 내가 먹고 난 빵가루까지 깨끗하게 치우고 마법을 쓴 흔적조차 남지 않게 정돈했다.

    “으…… 꼬질꼬질한 상태로 있는 건 질색인데.”

    세척 마법을 쓰고 더러운 꼴은 환상을 써서 위장할까 싶었지만, 이내 관뒀다.

    상대는 몇만 년을 남의 몸을 차지해서 영화를 누린 녀석이었다. 어설픈 위장 따윈 금방 걸릴 수도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냄새나는 더러운 상태로 나는 다시 꽁꽁 묶인 행세를 하며 차가운 돌바닥 위에 드러누웠다. 떡진 머리카락의 감촉이 매우 기분 더러웠다.

    ‘율리시즈가 이런 내 꼴을 보면 당장 씻기고 싶어 할 텐데.’

    어른으로서, 보호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이런 추태라니. 거기다 내가 구해져야 할 공주님 역할에 처하다니.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이렇게 느긋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안도했다.

    누워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대마법사, 거기 있지?”

    누군가 나를 불렀다.

    “……폐황자 세드릭?”

    주술로 인해 뱀의 숙주가 되어 완전히 자아를 상실했을 세드릭이 비척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도, 도와줘……. 제발.”

    ***

    율리시즈는 편지를 읽은 직후, 궁 내의 정예 병사만을 골라 특별 대대를 편성했다.

    “그대들은 나의 스승님이자, 대마법사로 이름이 드높은 클로드 하센티온을 구출하러 갈 것이다.”

    엄숙한 명령은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엄포와 함께 떨어졌다.

    세드릭과 카밀라 모자의 반역을 겪으며 충성심이 두터워진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젊은 황제의 말을 따랐다.

    “폐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 그 길을 따르겠나이다.”

    병사들 전원이 반역의 날, 율리시즈의 곁을 지키며 용맹스럽게 싸웠던 이들이었다.

    어린 율리시즈가 번 돈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입은 은혜가 많았던 이들이었기에, 배신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쓸데없이 어째서 대마법사가 납치되었는지 따져 묻지 않고 언제 싸우면 될지만을 물었다.

    “언제 출정하면 되겠습니까, 폐하?”

    “출정은 다음 날 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같이 간다.”

    율리시즈의 단호한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율리시즈의 옆에 서 있던 페른은 피로한 낯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 정국이 안정되어 가는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운다면…… 틀림없이 폐황자의 세력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스승님을 납치한 자가 전한 말로는, 폐황자 세드릭 또한 그 일에 가담했다고 하니.”

    게다가 에슬라에서 급히 귀국한 아멜리아가 황제 대행을 해낼 것이니, 빈틈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멜리아가 후계자의 자리는 거부했어도, 이런 부탁은 마다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율리시즈가 속으로 여동생에게 감사하던 중, 페른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폐황자가 감히 대마법사님을 납치했단 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폐황자를 살려 두고자 했으나,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스승님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나, 폐황자 세드릭은 죽여도 될 것임을 명시하는 바이다.”

    율리시즈의 말에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허무하게 놓친 반역도의 우두머리, 세드릭을 붙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병사들 내에선 거셌기 때문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대마법사님을 구출하겠습니다!”

    “우리의 폐하 만세!”

    훌륭한 실력을 지닌 기사들로 구성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율리시즈는 이에 만족스러워하며 다음 공지를 알렸다.

    “또한,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선 마탑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마탑을……?”

    “대마법사님께서 유랑하며 전 대륙을 다닐 때도 코빼기도 안 비치며 신경조차 쓰지 않던 마법사들을?”

    술렁거리는 병사들에게 율리시즈는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 있는 상급 마법사, 페른 아르힘은 스승님의 (자칭) 제자로서 마탑과의 연이 깊은 자이다.”

    “페른 아르힘입니다. 마탑의 다음 대 탑주 후보이며, 클로드 님의 (자칭) 제자입니다.”

    “……페른은 (자칭) 제자로서 나와 같이 스승님의 곤란함을 두고 볼 수 없기에 다음 대 마탑주 후보로서의 권한을 사용해 실력 있는 마법사들을 불러 구출하는 데 도움을 받기로 했다.”

    “공간 마법을 이용한다면, 폐하께서 목표로 하시는 출발 시간 전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믿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형식적인 말투의 대화가 지나간 후, 율리시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스승님의 안위를 위협한 자, 그자는 절대 살려 두지 않고 목을 베어 돌아올 것이다. 경들이 나를 도와 그 여정에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의 곁을 따르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함성 소리가 거대한 홀을 가득 메웠다.

    율리시즈는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단상 밑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이거면 됐을까, 루나?”

    단상 밑에 숨어 있던 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옆에는 윈터가 엄마 손을 꼭 잡고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이제 스승님을 구하러 가자.”

    그분이 홀로 남겨져 있는 건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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