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65화 (65/90)
  • 65.

    ‘이거 쉽지가 않네…….’

    한참 동안을 밧줄을 끊기 위해 날카로운 돌로 밧줄을 문질렀으나, 소득은 그다지 없었다.

    ‘히, 힘들다.’

    망할 클로드 하센티온의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어째서 이렇게 약한 거야?

    마법 없이는 신체를 강화할 수도 없어 지금의 육신은 팔랑팔랑한 종이 인형에 가까웠다. 구슬땀을 비처럼 흘리며, 불을 피우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밧줄을 끊으려 애썼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결박당한 두 손은 내 맘처럼 움직여 주지 못했다. 겨우 한 줄 끊었지만, 이대로라면 다 끊을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할 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답답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건조한 입 안이 느껴졌다.

    ‘역시…… 팔을 탈골시켜서라도 밧줄에서 풀려나는 게 나으려나?’

    몸을 쇠하게 만드는 저주로 인해 둔감해진 상태니, 해 볼 만한 시도였다. 잠시만, 아주 잠깐만 고생스러울 테니 탈출이 최우선인 내게는 구미가 당기는 거래였다.

    뱀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묶인 상태로 어디 도망치지도 못할 거라 판단했는지, 넓은 지하 동굴에는 나밖에 없었다.

    ‘탈골…… 팔을 탈골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클로드’의 지식을 살피면서 나는 효과적으로 내 팔을 부러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세진 님?”

    ‘응?’

    나 혼자만 있어야 할 공간에,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환청을 듣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목소리…… 세진 님이 맞으시죠?”

    “……누구야?”

    익숙한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접니다. 루나. 윈터의 어머니이자, 당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나섰던 패밀리어 의사요.”

    ‘세상에.’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루나? 정말 루나야?”

    “예…… 살아 있었습니다. 죽은 줄만 아셨죠?”

    “그걸 말이라고……. 모두 네가 죽은 줄만 알았어.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으니 결국 죽었을 거라고 윈터마저 체념했단 말이야. 무덤도 만들고, 비석도 세웠어. 주인 없는 무덤에 윈터는 매일같이 싱싱한 꽃을 올려.”

    “저런, 꽃이 안됐네요. 저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는데.”

    루나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지만, 생기가 꺼지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히 농담을 하는 루나 덕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여기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그러는 세진 님이야말로 그 뱀 새끼와 대체 어떤 악연으로 묶이신 거예요? 큽…… 쿨럭, 쿨럭.”

    명랑하게 말을 이어 가던 루나는 돌연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했다.

    ‘여기 오래 갇혀 있었구나.’

    나는 루나가 나처럼 이곳에 발이 묶여 있었음을 직감하고 결박된 몸을 어기적어기적 이끌며 루나를 찾으려 했다.

    “……더 말하지 마. 상태가 안 좋아 보여. 내가 루나를 찾아볼게.”

    “참나. 의사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예요? 세진 님의 주치의로서 자존심이 상하네요…….”

    “그냥 하는 말인 거, 다 알아. 금방 찾아서 꺼내 줄게.”

    “어떻게요? 세진 님께서도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이실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볼게.”

    묶인 몸을 이끌고 얼마나 두리번거렸을까.

    ‘아, 찾았다.’

    나는 곧 동굴 천장 구석에 산 채로 박혀 있는 루나를 발견했다.

    “세진 님!”

    “루나… 만나서 반가운데, 네 앞발과 뒷다리가…….”

    루나는 머리만 남긴 채 사지가 돌로 덮여 결박된 상태였다. 나보다 심했다. 마찬가지로 마법을 봉인당한 것인지 루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비쩍 말라 있었다.

    “강제적으로 다이어트를 좀 했네요.”

    “윈터가 알면 슬퍼할 거야. 걔가 자기 털이 엄마한테서 물려받아서 윤기 나고 보들보들하다면서 쓰다듬어 달라고 한 게 몇 번인데.”

    “좋은 정보네요. 집에 돌아가면 그걸로 또 마구 놀려 줘야겠어요.”

    루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루나가 너무 반가워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헉. 설마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아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루나가 죽은 줄만 알았거든. 어쩌다 이곳에 납치된 거야? 그 새끼가 한 짓이야?”

    “음…… 결론적으로 따지면 그 뱀 새끼가 한 짓이 맞긴 합니다.”

    루나가 그 나쁜 자식을 부르는 호칭이 나와 같아서 좋았다. 동지애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제가 세티아 화산 근처에 오게 된 건, 세진 님과 다를 바 없는 목적이었어요.”

    태곳적의 기록이 남아 있는 마을에서 단서를 찾는 것. 그게 루나가 내 몸의 치료를 위해 떠나면서 목표로 한 일이었다.

    의사면서, 동시에 모험가이기도 했던 루나는 이종족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던 태곳적의 기록을 찾아 해석했다.

    “태곳적의 기록이 있는 마을이란 마을은 전부 뒤졌어요. 이종족들의 도움까지 받으니 인간은 발견하지 못했던 기록들마저 합쳐지더라고요. 그것들을 전부 하나로 모으니 어떤 신화 속 이야기가 보이더군요.”

    “……영혼의 짝과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악한 자에 대한 이야기였어?”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뱀 새끼가 친절하게 알려 줄 리가 없었을 텐데. 제가 이 기록을 모두 해석하자마자 그 녀석이 쳐들어와서는 저를 이 동굴 천장에다가 가둬 버렸다고요! 망할!”

    ‘……친절하진 않았지만 내가 붙잡히니 알려 주긴 했지.’

    망할 새끼.

    루나가 분개하며 씩씩거렸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터라, 나는 씁쓸히 웃으며 루나를 달랬다.

    “그래서 연락이 끊긴 거였구나. 우린 네가 영락없이 죽은 줄만 알았어.”

    “죽을 뻔하긴 했죠. 그 썩을 뱀 새끼가 저를 이곳에 가두고는 아예 잊어버렸거든요. 죽으라고 고사를 지낸 거죠. 퉷.”

    억눌려 있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는지, 루나는 이전에 ‘클로드였던’ 가짜를 씹어 죽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그 새끼를 족치든가 말든가 할 텐데…….”

    루나의 중얼거림 속에는 뱀 고기가 구우면 맛있다던데. 이런 소리도 섞여 있었다. 나는 루나를 만류했다.

    “그런 거 먹으면 배탈 나. 영혼체라 먹을 수도 없어.”

    내 말에 루나는 시무룩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이대로는 꼼짝없이 그 뱀 새끼가 죽이러 올 날만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나는 루나를 찬찬히 살펴봤다. 잔뜩 말라 버린 몸, 거칠어진 털, 유쾌하게 굴고 있으나 기력이 없어 후들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보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다.

    “……괜찮아. 내가 루나를 구할게. 우리 여기서 같이 빠져나가는 거야.”

    “어떻게요?”

    “잘.”

    “……설마.”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묶인 몸을 이끌어 단단한 돌기둥 옆으로 갔다. 몇 번 부딪히면 그대로 팔의 뼈가 부러질 만한 곳으로.

    “잘될 거야.”

    “저기…… 세진 님? 설마 지금 팔을 부러뜨려서 밧줄을 풀려는 건 아니시죠?”

    “맞아.”

    순순한 긍정에 루나의 두 눈이 뒤집히려고 했다.

    “미치셨습니까?! 세진 님의 육신은 얇은 달걀 껍데기처럼 약해진 상태입니다. 깨지는 몸을 이끌고 아예 팔을 부러뜨린다고요? 그러다 세진 님 몸의 일부를 완전히 소실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자칫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죽겠지.”

    “…….”

    덤덤하게 사실을 인정하자 루나가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뱀이 우릴 죽여 버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 못 하겠어.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뭐라도 하는 게 나는 더 현명하다고 보니까.”

    “세진 님…….”

    “걱정하지 마. 루나. 나 대마법사잖아. 이 밧줄만 풀어내면 곧바로 치료 가능해. 잘 해결할 수 있어.”

    팔을 부러뜨리는 게 괜찮을 리 없었다. 고통이 둔화된 몸이라 하더라도 충격이 가해질 것이다. 루나 말처럼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진 내 몸이 서서히 부서져 이곳에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살아남고 말 거야.’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용기가 솟아났다. 내가 죽을 거라는 걱정보다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와 유리를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시작할게.”

    “세진 님!”

    셋까지 셀 필요도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돌기둥으로 뛰어가 내 팔을 전력으로 부딪혔다.

    우드득.

    “끄으…… 아아아아아악!”

    고통은 예상보다 더 강렬했다. 하지만 밧줄을 풀고 나오기에 아직 팔이 덜 부서졌다.

    ‘조금만 더.’

    나는 연이어 팔을 힘껏 부딪혔고, 그때마다 우드득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마침내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축 늘어지자, 나는 그 팔을 밧줄 밖으로 빼냈다. 아프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고통을 참으며 늘어진 밧줄을 조금 걷어내자마자 마력이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치료하라.]

    뼈가 짜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부러졌던 한쪽 팔이 다시 멀쩡히 돌아왔다. 나는 마법으로 밧줄을 반으로 가른 뒤, 완전히 빠져나와 루나를 구출했다.

    “세진 님…….”

    루나의 눈가가 물기로 흥건했다. 내 비명을 듣고 몹시 괴로워했던 흔적 같았다.

    “난 괜찮아, 루나. 너야말로 상태가 좋지 않은걸. 서둘러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그럼 세진 님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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