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기절한 후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뱀에게 맞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통과 배고픔, 피로 때문에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여전히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동굴 안이었다. 윈터가 골라 줬던 깨끗했던 여행자용 의복은 진흙과 먼지로 얼룩덜룩해졌고, 깨져 가는 몸은 아프지는 않았으나 삐걱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안도했다.
‘아아, 율리시즈가 없어.’
정오에 떠오른 태양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보석보다도 반짝이는 빛을 품고 있는 제비꽃색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애가 아직 여기까지 도착하진 못한 거야.’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졌다.
비록 내 몸뚱이는 너절해졌고, 아직 교활한 뱀 새끼의 계략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아직 무사해. 괜찮아. 율리시즈는 무사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상황을 견뎌 낼 용기가 피어났다.
‘우선…… 이 밧줄부터 풀어야 해. 주변에 날카로운 것이 없나?’
마력 구속구 역할을 하는 밧줄이라도 풀어 보려 애쓰던 와중,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희망에 찬 눈을 하고 있으니 재수 없어.”
틱틱 쏘아붙이는 말에 화낼 기력도 없었다. 못 들은 척 무시하려 하자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뱀 꼬리가 나를 낚아챘다.
“내 말 무시해?”
“으윽…….”
“네가 진짜라고 뭐라도 된 줄 알아?”
뱀은 현재 실체가 없는 영체였으나, 세드릭과의 거래를 통해 영혼과 육체의 통제권을 먹어 치운 상태였다.
그래서 뱀은 세드릭의 육신을 이용해 자신의 몸뚱어리 일부를 실체화하는 게 가능했다.
‘숨 막혀…….’
뱀의 꼬리가 옥죄는 힘은 대단했다. 이미 밧줄에 묶여 있던 터라 그 압박감은 더 커졌다. 온몸의 뼈라도 부수려는 건가 싶은 순간, 뱀은 나를 돌바닥으로 내리쳤다.
쿠우웅.
“커헉…….”
계약으로 맺은 저주는 몸의 감각을 둔화해 고통을 덜어 주었지만, 뱀의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그때만 잠시 저주를 멈추기라도 하는 건지, 나는 일방적인 폭력의 빗줄기 속에서 신음해야만 했다.
쩌저저적.
“아…….”
설상가상으로 몸에 연달아 극심한 충격이 이어지자, 연약해진 신체가 버티질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충격 속에 허우적거릴 때, 뱀은 이런 나의 비참한 모습을 즐겁게 관람했다.
“저런, 동방의 도자기 인형 같은 꼴이로구나.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아. 하하하.”
실제의 나는 도자기 인형같이 우아한 모습은 아니었다. 며칠 내내 씻지 못해 엉망인 꼴에, 밧줄에 묶여 있어 꾸물꾸물 기어 다녀야 하는 모습이 딱 벌레와 같았으므로.
‘어떻게든 내 마음을 상처 입히고 긁어내려 도발하는구나.’
분노 대신에 이성을 마음의 저울 위에 얹고 차분히 상황을 분석했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저런, 네가 동의한 사항이었는걸?”
‘저 사기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놈의 미운 입을 틀어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한이었다.
밧줄로 꽁꽁 묶인 몸을 간신히 일으켜 뱀에게 물었다.
“……율리시즈는 어떻게 한 거야?”
“일어나자마자 그 애부터 찾는구나.”
“빨리 말해. 네가 아무 짓도 꾸미지 않을 리 없잖아. 율리시즈를 어떻게 이곳으로 유인할 계획인 거지?”
필사적으로 초조함을 감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나 보다. 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침착하게 정보를 캐내려는 내 모습을 비웃었다.
“많이 궁금한가 봐?”
‘안 궁금하겠냐, 이 망할 새끼야…….’
욕설이 치밀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현재 상황에서 완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저 녀석이었다. 저놈이 마음만 바꾼다면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의 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비위를 맞춰 주는 시늉이 기꺼웠는지, 뱀이 흥얼거리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음, 편지를 보냈지. 나름 정중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를 적어 놨고.”
“…….”
“지금쯤이면 그 어린 황제의 손에 편지가 넘어가고도 남았을 거야.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얗게 질려 울먹였을까. 아니면 분노에 차 당장이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너를 왕자님처럼 구하러 오겠다고 성화를 부렸을까.”
녀석의 말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나를 더 화나게 하고 절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넘어가면 안 돼.’
그렇게 다짐하며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지 않게 조심했다. 괴로워하며 울상을 짓는 것. 그거야말로 저 괴물이 바라는 것일 테다.
징그럽게도 끔찍한 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뱀의 오만한 말에 적당히 맞춰 주며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맞은 자국들이 욱신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넘어져 있을 때 결박된 두 손을 이용해 겨우 날카로운 돌도 하나 건졌다.
‘희망을 잃으면 안 돼.’
그것만이 나를 지탱했다.
“율리시즈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호오, 어째서?”
‘역시나…… 자기 예상과 다르게 일이 틀어지면 관심을 보이는군.’
무수히 오랜 세월 동안 뱀은 나와 율리시즈를 지켜봤다.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지는 이미 훤히 뀄을 터.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추한 영혼체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큼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였음이 분명했다.
죽고 싶었던 내가 율리시즈를 키우며 조금씩이나마 삶을 향한 의지를 되찾았던 일처럼.
‘그러니까 지금은 죽을 수 없어.’
부스러지는 몸을 가지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크게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어느 순간에서든 침착하게 대응하도록 가르쳤으니까. 감정보다는 이성을, 분노보다는 냉정을 가까이 두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기실 내가 가르쳤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율리시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그런지, 상당히 조숙한 편이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기민하게 파악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러니 내가 가르쳤다는 건 순전히 밥 위에 양념을 조금 얹은 것에 불과했다.
그 아이라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나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어.”
내 말에 뱀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믿음만큼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다고.”
“어리석지 않아. 두고 보면 알겠지. 율리시즈는 분명 나를 구하러 올 거야. 너를 궤멸할 군대를 이끌고서. 이번에야말로 너를 죽일 테지.”
“근거 없는 망상일 뿐이야. 너는 마법을 봉인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 신세잖아? 거기다 그 몸뚱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검? 창? 무얼 잡아도 급소도 찌르지 못할 만큼 연약하겠지.”
그건 옳은 말이었다. 클로드 하센티온의 육체…… 아니, 내 진짜 육신은 마법 없이는 영 젬병이었으니까. 뼈대도 가늘고 희멀겋기만 한 게 연약한 몸이라는 티가 풀풀 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뱀은 실컷 비웃었다.
“인정해, 세진.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미 무수한 회귀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야. 너희는 내게 이길 수 없고,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
“믿음? 사랑? 그딴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면 진작 되고도 남았어야지. 내가 열등감에 미쳐 기어이 네 육신을 차지했을 때, 힘을 더 키우러 다른 초월자들조차 먹어 치울 때 신이라는 작자가 나를 저지해야 마땅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결과를 봐. 이제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나를 막을 자가 아무도 없어. 하하……하하하하!”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뱀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광소를 터트렸다. 오래도 묵은 뱀의 입 속은 시커멓고 어두웠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 옆에는 폐황자 세드릭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영혼과 육신의 통제권을 모두 넘겨준 탓인지 풀린 눈을 하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내 시선이 세드릭을 향하자, 뱀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너도 곧 이 멍청이처럼 만들어 줄게. 네가 외롭지 않게, 이곳을 찾아올 율리시즈도 같이.”
“…….”
“율리시즈의 몸까지 내가 차지하게 되면, 나는 신이 되어 이 세상을 다시 만들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대로 만들어진 세계는 나를 무척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지.”
꿈꾸듯 말하는 뱀의 목소리는 구역질이 나올 만큼 달콤하고 상냥했다.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만 추구하는 놈이 역겨워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참, 넌 바닥에 벌레처럼 엎드려 우는 게 잘 어울려. 쓸데없이 서 있으려 하지 마.”
뱀은 꼿꼿이 서 있던 내가 거슬렸는지, 꼬리로 나를 넘어뜨렸다. 나는 돌바닥에 힘없이 무너졌다. 생채기가 더 늘어서 나중에 유리가 보면 무척 속상해할 것 같았다.
“너랑 이야기하는 것도 이제 재미가 없다. 흠, 율리시즈가 오면 그때 다시 찾아올게. 그때까지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 그 연약해진 몸으로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엿이나 처먹어. 개자식아.”
“저런. 상스러운 말을 해 봤자 달라질 건 없단다.”
마지막까지 짜증 나는 말만 남긴 뱀은 넋이 나간 세드릭의 육체를 움직여 동굴 밖으로 나갔다.
쓰라린 상처를 안고 어두침침한 동굴에 속박당한 상태로 남겨진 나는 아까 주웠던 날카로운 돌을 꺼냈다.
‘어서 이 밧줄을 끊고 달아나야 해.’
율리시즈가 나를 구하러 올 때까지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탈출을 모색해야 했다. 마법 구속구는 평범한 도구로 파괴할 수 있으니, 이 돌로 어서 밧줄을 끊고 도망칠 길을 찾아야 했다.
‘정 안 된다면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나가야 해.’
마법을 되찾아야 했다. 율리시즈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테니까.
나도 그 아이와 함께 저 망할 놈을 없애야 하지 않겠나.
사각사각. 돌로 밧줄 가는 소리가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