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싫어.”
뱀 새끼는 재고 따질 것도 없다는 듯이 내 간절한 요청을 거절했다.
“네 영혼이 멀쩡하다고 누가 그래?”
“…….”
“말했잖아. 내가 육신을 빼앗고 다른 세계에 가져다 버렸다고. 심지어 내가 몇만 년이라는 시간을 회귀할 동안 육신 없이 떠돈 네 영혼은 여태까지 버틴 게 용할 지경이야.”
“…….”
“죽음을 바란 것도 이상하지 않지. 오히려 그쪽이 정상인데. 다 허물어져 가는 네 영혼 따위 그다지 맛도 없고 힘도 별로야. 율리시즈 쪽이 더 강인한 영혼이라고 그랬잖아. 그 애의 육신은 아직도 생생하고 힘이 넘치지. 그 육신만 빼앗는다면 나는 다시 이곳에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어.”
재잘재잘 신나게 떠드는 뱀 새끼를, 나는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이 새끼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이대로라면 율리시즈는 꼼짝없이 위험에 빠진다. 윈터는 저 자식이 일부러 놓아줬으니, 소식을 전해 들은 율리시즈라면 반드시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 아이라면 그러겠지. 그러고도 남을 거야.’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스승인 나를 죽게 둘 수는 없다며 직접 내려오겠지.
올곧은 성정으로 자란 아이니까.
‘내가 그렇게 가르치며 키웠으니까…….’
누군가 심장을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너무 아팠다.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만 하다 죽는 거구나.’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 그것 하나 때문에.
네가 다 빼앗기고 죽을 위기에 처했구나.
그것이 너무나 끔찍해서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뱀 새끼는 내 고통이 즐거운지 히죽였다. 얄밉게도 이 상황에서 웃는 저놈의 입가를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마법을 봉인당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의 나는 무력했다.
“아아, 많이 힘들지? 아프지?”
“……이 미친 새끼가.”
“걱정하지 마. 네 영혼의 짝은 꼭 우리 앞에 나타날 거야. 너를 끔찍하게 사랑하니까. 몇 번이고 네 육신을 돌려 달라며 내 앞에 나타났던 비범한 존재가 율리시즈니까. 이번에도 나를 쫓아올 거야.”
“……제발 그만둬.”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길고 긴 만남은 비로소 막을 내리겠지. 내가 시작한 악연이니, 내가 끝을 낼 거야. 영혼의 짝 따윈 내 손에서 부스러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거야. 내 창조주가 내게 그러려던 것처럼…….”
“아아아아악!”
결국 참지 못하고 너절한 몸뚱이라도 버둥거려 뭐라도 해 보려는 나를, 뱀 새끼가 다시 걷어찼다. 입가에서 피가 튀었다. 내장이 진탕하는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으…….”
“그래도 넌 내 영혼의 쌍둥이니까 이야기하다 보면 살려 두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단 상상을 했는데. 상상은 역시 상상에 불과하구나.”
허리를 숙여 내 얼굴 앞으로 바짝 고개를 들이민 뱀 새끼가 속살거렸다.
“율리시즈의 육신을 빼앗으면, 그때 그 모습으로 너를 죽여 줄게.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건 어떤 고통일까. 아, 이미 율리시즈는 기억 못 할지라도 여러 번 겪었던가? 하하!”
“…….”
율리시즈, 제발 여기 오지 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의식을 유지하기 더는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히 떠오르는 건 너의 환한 미소였다.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던 네 마지막 모습. 나를 유리 세공품처럼 소중히 여기며 해맑게 좋아한다 말하던 네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여기 오면 안 돼.’
너만은 살아야 했다. 너만큼은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네 앞에 꽃길만이 있기를, 그렇게 바라며 네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끝이 다가온다니…….’
통탄스러워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저 뱀 새끼를 죽이고 싶었다.
“너…… 너…… 죽여 버릴 거야.”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쥐어짠 힘으로 낸 목소리는 겨우 그거였다.
뱀 새끼는 의식을 잃어 가는 나를 보고 한껏 비웃었다.
“그래. 죽여 볼 수 있으면 죽여 보든가. 그 전에 내가 네 짝인 율리시즈와 너를 함께 처리하는 게 더 빠르겠지만.”
“…….”
저 자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몸이 불타 사라진다 하더라도 상관없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며 나는 기절했다.
눈을 뜨면, 제발 율리시즈가 없길 바라면서.
* * *
병사들을 꾸려 세진을 구하려던 율리시즈의 앞으로 알 수 없는 편지가 전해졌다.
“웬 편지지?”
황제의 집무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편지는, 단단히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으나 어떤 가문의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로라는 왠지 모를 기이한 기분에 그 편지를 쉬이 율리시즈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살펴봤다. 황제에게 전해지는 서신은 엄격한 절차를 거쳐 집무실로 올려지기에, 이렇게 딱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질 일은 없었다.
‘시종장이 황제 폐하께 보내진 다른 서신들과 함께 전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나만 올려질 리가 없어.’
로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우편물을 관리하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혹시 이 편지를 황제 폐하의 집무실에 올린 자가 있습니까?”
수석 시녀가 내민 편지를 보고 우편물을 관리하던 이들은 물음표만 띄웠다.
“글쎄요……? 오늘 황제 폐하 앞으로 온 서신 중에는 그런 편지가 없었습니다.”
“장부에 모든 서신의 기록을 남기는데, 보낸 이의 이름조차 없는 그런 편지는 저희가 올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미심쩍다는 이유로 소각장에 가서 태웁니다.”
“저희가 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편지는 처음 봅니다.”
율리시즈에게 누군가 겁 없이 장난이라도 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관리들의 말에 로라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로라는 며칠 전 극도로 예민해진 율리시즈를 떠올렸다. 또한, 그가 했던 이야기도.
‘스승님께서 납치당하셨다.’
‘……예에?’
로라와 윈터, 페른과 데이지, 엘리엇을 급히 모은 자리에서 율리시즈가 내뱉은 말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윈터가 말해 줬어. 스승님께서 폐황자 세드릭에 의해 납치당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랍니까?’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대마법사님께서!’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율리시즈가 말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스승님은 근래 들어 쇠약해지고 계셨다.’
‘……!’
율리시즈는 놀랄 이야기만 꺼냈다. 그 대마법사가 약해지고 있었다니.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도 나타난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충격받아 아무 말도 못 하는 이들에게 윈터와 율리시즈는 차근차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털어놓았다.
세진이 어떤 ‘약속’을 하고 이 세계에 클로드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점점 몸이 부서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죽음을 원했으나 최근에는 율리시즈의 존재로 마음을 고쳐먹고 살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윈터와 함께 살아날 방도를 찾아 내려갔다가 세드릭을 감싼 검은 연기에 의해 변을 당했다는 것을.
‘……이 모든 건 사실이다. 스승님께서는 납치당하셨고, 상황은 좋지 못하다.’
측근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한 율리시즈의 얼굴은 어두웠다. 항상 반짝이던 자색 눈동자는 살기로 뒤덮여 있었고, 고운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무서웠다.
‘내가 직접 스승님을 구하러 가야 한다.’
‘황제 폐하!’
‘뭐라고 말려도 들을 생각은 없다. 전부 기각한다. 감히 스승님을 납치해 간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건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것일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스승님을 구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거기다 폐황자인 세드릭이 연루되어 있다니요. 자칫하다간 폐하께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로라를 비롯해, 엘리엇 역시 우려의 뜻을 내비쳤다. 겨우 정권이 안정되어 가고 있는 시국에 율리시즈가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에게 해를 당한다면, 윈프리드 제국은 큰 혼란에 빠져 휘청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 섞인 목소리에도 율리시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 나보고 스승님을 포기하라는 건가?’
‘황제 폐하! 저희는 그런 뜻이 아니오라…….’
‘로라, 엘리엇. 그대들은 나를 숱한 위기 속에서 구해 오고 보살폈다는 것을 안다.’
젊은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보라색 눈동자 앞에서 모두들 숨을 죽였다. 위엄 넘치는 황제가 된 율리시즈에게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대들의 공로를 인정해. 내게 소중한 사람인 것 또한 마찬가지다.’
‘…….’
‘하지만 거기까지야. 내 결정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스승님은 내 은인이시고, 내 하늘이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율리시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겨우 삼키며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다시는 허무하게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어. 그대들 역시도 스승님께 은혜를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런데 나보고 스승님을 포기하라고?’
‘……폐하.’
‘나는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 스승님을 버릴 수는 없어. 내가 이 나라의 황제가 된 까닭은 어머니의 복수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분 곁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해서이기도 했으니까.’
율리시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앉아 있는 황좌의 가치가, 그저 사랑하는 사람 옆에 서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