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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9화 (59/90)
  • 59.

    “돈도 없는데 나가서 살 집은 어떻게 구하라고. 서울 집값 더럽게 비싸. 코딱지만 한 원룸 월세도 괜찮은 곳으로 얻기 힘들다고.”

    이 집 어른들은 나를 밖에서 낳아 온 아이라고 멸시했다. 그들은 어쨌든 어린애니 성인이 되기 전까지 키워 주는 게 사람이 할 도리라 생각해서 나를 거둬 준 것일 뿐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면, 대학교에 입학하면 바로 내쫓을 생각을 버릇처럼 입 밖으로 내뱉곤 했다. 지금껏 키워 준 은혜가 있으니 양심이 있다면 손 벌릴 생각 말고 알아서 나가 살라고 했다.

    남설아는 투덜거리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가방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줬다.

    “받아.”

    “뭐야. 이거.”

    “세뱃돈이랑 용돈 꾸준히 모은 내 명의 통장이야. 이거면 한 학기 등록금이랑 보증금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야.”

    “…….”

    딸이라고 구박해도 돈은 잘 주는지, 민설아의 통장 내역 액수는 0이 그득했다.

    하지만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 씨발.

    “야, 이거 네 등록금하고 독립 자금이잖아.”

    “어. 그런데?”

    “그런데? 야, 귀한 돈인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날름 받아 처먹어. 돼지 새끼도 아니고.”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빌려주는 거야. 오빠한테 투자하는 거라고. 나가서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달라고 투자하는 거야.”

    “…….”

    “이자는 안 받을 테니까, 수능 잘 쳐서 고액 과외 하는 명문대생 좀 되어 봐. 나도 희망 좀 얻게.”

    “……그래.”

    온통 잿빛투성이던 내 인생에 설아가 희망을 세워 줬다.

    받은 만큼 값을 치러야 하니, 나는 정말 열심히 수능을 준비했다. 남설우는 의욕적인 나를 보며 불만스러워했다.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시험 준비에 만전을 가했다.

    수능 전날, 설아는 깜짝 선물을 내게 준비해 줬다.

    “짠! 이거 오빠 내일 갈 때 하고 가.”

    “웬 목도리야?”

    “수능 당일엔 한파 엄청 심하다잖아. 감기 걸리지 말라고 내가 샀어. 예쁘지?”

    “응. 고맙다.”

    “와. 나한테 고맙대. 수능 직전이라 그런가.”

    “시험 잘 보고 올게. 잘 보면 네 덕이야.”

    “뭐야……. 안 어울리게 왜 감동을 줘? 맨날 시큰둥하던 인간이. 빨리 가서 자. 일찍 자야 내일 수능장 가잖아.”

    설아의 말대로 나는 일찍 잤다. 준비는 완벽했다. 수험표도,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필기도구와 시계도 잘 준비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수험표가 사라졌다.

    “……없어. 수험표가 없어.”

    시험장에 미리 도착해 있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사라진 수험표를 찾느라 허둥거렸다.

    “어디에 둔 거야? 오빠가 아무 데나 놓을 리는 없는데…….”

    “모르겠어. 대체 어디에…….”

    그때, 남설우가 나타나 구겨진 수험표를 흔들었다.

    “야, 이거 찾냐?”

    “너…….”

    “이거 없으면 시험장 가도 쫓겨난다며? 갖고 싶지? 갖고 싶지?”

    “내놔.”

    개자식. 욕설을 삼키며 당장 내놓으라고 했으나 남설우는 돌려주지 않았다.

    “싫어. 난 네가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그러니까 가지고 싶으면 어디 가져가 보든가!”

    “!”

    남설우는 도망치다가 큰 대로에 수험표를 집어 던졌다. 그곳은 차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 줍기가 어려웠다. 구깃구깃하던 수혐표는 자동차 바퀴에 눌려 더 납작해졌다. 내 자존심도 짓밟혔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남설아가 움직였다.

    “저것만 주워 오면 되는 거잖아! 오빠, 내가 가져올게.”

    “야, 위험해! 그만하고 이리 와.”

    “싫어. 저 새끼가 원하는 대로 절대 못 둬.”

    설아는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너 수험표를 주웠다. 차들이 빵빵거렸지만 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수험표를 흔들었다.

    “오빠! 여기……”

    빠아앙-.

    “설아야, 뒤! 피해!”

    무서운 속도로 차량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

    콰직.

    설아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 운전 차량이 낸 사고였다. 설아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나는 도로에서 설아가 죽어 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안 돼…….”

    설아가 죽었다. 오로지 나 때문에. 그 애가 내 인생 꽃피우겠다고 도와주려다 죽었다. 착한 아이였는데. 그렇게 죽을 애가 아니었는데.

    불쌍한 내 여동생.

    “너 같은 새끼만 아니었어도 설아는 안 죽었어!”

    설아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아버지란 작자는 날 죽도록 팼다. 평소에는 설아에게 그다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막상 딸이 죽자 그간 잘해 주지 못하고 데면데면하게 굴던 걸 슬퍼하며 통곡했다.

    나는 울 자격도 없어서 치밀어 오르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킬 뿐이었다. 남설우는 가식적이게도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저 새끼 때문에 설아가 죽었는데…….

    하지만 집안 전체는 나를 씹어 죽여도 부족한 개새끼로 몰아갔고, 또 얻어맞고 지내는 나날이 반복됐다. 수능은 결국 못 치렀다. 나는 폐인이 됐다. 때려도 반응이 없자 남설우는 지겨워졌는지 친구들과 PC방에 갔다.

    “…….”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설아가 준 통장을 꺼냈다. 그리고 미리 졸업 축하 겸 수능 대박 축하 선물로 준 에어팟도 포장을 까서 귀에 꽂았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메고,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한강이 보이는 다리 위로 갔다.

    ‘더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

    희망이 다 꺼졌다. 설아가 나 때문에 죽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사는 건 더는 못 하겠다.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져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신발은 벗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내 흔적 같은 건 남겨 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뚝뚝. 얼굴 위로 차가운 물방울 같은 게 떨어졌다.

    ‘……꿈이었나.’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전생을 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눈을 뜨자 나와…… 아니, 클로드가 히죽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남세진?”

    “……너 왜 여기 있어. 클로드.”

    “오. 역시 똑똑해서 알아보는구나. 모습이 조금 달라졌어도 말이야.”

    클로드의 머리 색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길어지고, 손톱도 뾰족한 게 날카로운 가위손 같았다. 눈동자는 뱀의 형상을 취했을 때처럼 섬찟한 녹색이었다.

    “왜 여기 다시 돌아왔냐고 물었어.”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까.”

    “너는 나와 계약을 했잖아. 나보고 율리시즈를 구해서 멸망할 나라를 구해 달라고.”

    “너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진짜 목표가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걸 얻기 위한 1차적인 조건이었지.”

    1차적인 조건?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클로드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기분 좋은 흥얼거림을 내뱉으며 뜬금없이 태곳적의 전설 이야기를 꺼냈다.

    “이 세계에는 초월자가 있다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음, 네가 대마법사로 초월자로까지 인정받았잖아? 그런데 초월자가 더 있을 텐데 모두 실종 상태였지.”

    “……그랬지.”

    “그거, 내가 다 먹었어.”

    냠냠. 아가리를 쫙 벌려 입맛을 다신 클로드가 자기 입 속을 가리켰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새끼가 ‘진짜’ 클로드 하센티온은 아님을 짐작했다.

    “너 뭐야.”

    “나도 몰라. 이름이 없거든. 날 만든 창조자는 나보고 실패작이니, 쓰레기니 하며 부르다가 ‘사악한 영혼’이라고만 지칭했거든.”

    카밀라가 부른 사악한 영혼의 정체는 클로드가 맞았구나.

    내가 입을 다문 사이 ‘클로드’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주 아주 먼 옛날, 창조주가 처음 생명체의 영혼을 만들기 시작할 때였어. 수많은 영혼을 만들어 내기가 지겨웠는지, 창조주는 조금 특별한 영혼 한 쌍을 만들어 냈지.”

    “…….”

    “그 영혼 한 쌍은 ‘운명의 짝’이라고 해서,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낸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혼이었어. 한 사람은 전무후무한 대마법사가 되어 초월자의 격을 하사받고, 다른 한 사람은 대대로 칭송받는 최고의 성군이 될 운명을 받았지.”

    킥킥. ‘클로드’가 웃었다. 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뱀 새끼야.’

    나는 포박당한 상태로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있었기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클로드’를 뱀 새끼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입에 착 달라붙었다.

    뱀 새끼는 나른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원래는 그 둘이 맺어져서 아주아주아주 행복해져야 하는 운명이야. 운명의 실로 꼼꼼히 묶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운명이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방해했어.”

    뱀 새끼가 자기의 긴 손톱 하나를 분질렀다. 조각난 손톱은 독이 되어 녹아 사라지고, 다시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나는 대마법사가 될 운명을 타고난 쪽 영혼의 쌍둥이로 태어났어. 영혼체니까 태어났다는 말은 좀 이상한가? 어쨌든, 이례적이긴 했지만 나는 나도 그 완벽한 운명을 타고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

    “…….”

    “그런데 창조주는 내가 너무 사악하고 타락한 영혼이라며 너는 실패작이니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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