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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8화 (58/90)
  • 58.

    윈터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세진 님께서는 클로드 님이 그렇게 주장했다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고, 클로드 님이 장난으로 하신 말씀인 줄 알았다고 하셨어요.”

    “어째서?”

    “세진 님의 육체는 이미 숨을 거뒀으니까요. 클로드 님이 얻으실 이익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세진 님께서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셨어요.”

    ‘어떤 인간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실행하지 않아. 이타적인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전의 클로드 하센티온은 제멋대로 구는 괴짜였으니 이타적인 선택지와는 거리가 멀어.’

    세진은 그렇게 말했다. 분명 무언가 클로드가 얻는 이득이 있을 거라고. 육신을 버리면서까지 추구하는 게 있었을 거라고.

    “그게 무엇인지는 납치당한 스승님을 되찾으면 알겠지.”

    율리시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겼다. 그리고 황제 휘하의 정예기사단을 불러 모았다.

    “스승님을 구하러 간다. 더불어 반역을 저지르고 달아났던 폐황자 세드릭 또한 체포하러 간다.”

    “예!”

    질서정연하게 모인 병사들은 빳빳하게 곧은 자세로 힘차게 대답했다. 젊고 아름다운 왕은 강하고 영민한 데다가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까지 있었기에, 병사들은 단결했다.

    “세드릭의 생포는 포기한다. 그가 스승님께 위해를 가하려거든 죽여도 좋다. 하지만 스승님만큼은 어떤 상처도 없이 구해야만 한다.”

    ‘스승님.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고 하셨던 약속 지키시리라 믿겠습니다.’

    율리시즈는 타들어 가는 속을 믿음으로 달래며 제발 세진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 * *

    기절한 나는 신기하게도 전생의 일을 꿈으로 꿨다.

    “야, 남세진. 너 오늘도 거지꼴이더라?”

    “우웩. 교복은 언제 빨았냐? 구릿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야.”

    “얘네 아빠가 재벌 3세인가 그러지 않았어? 다른 반에 여동생인 남설아도 있다면서.”

    “성씨만 같은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진짜 오빠면 다구리 당할 때 손 놓고 보기만 하지 않을 거 아니야?”

    하하하하하.

    ‘와…… 꿈인데 너무 생생해서 기분 더럽네.’

    “뭘 꼬라봐? 팍씨.”

    퍼억.

    얼굴도 이젠 기억나지 않는 일진 새끼 하나가 내 머리를 후려쳤다. 피가 흘렀다. 아프지는 않았다. 이미 이건 다 지나간 고통이었으니까.

    나는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우리 엄마는 화류계의 사람이었고, 철저히 돈만을 목적으로 아버지에게 접근해 관계를 가졌고, 나를 낳았다.

    사생아라 할지라도 아들을 낳았으니 대궐 같은 집에 첩으로 앉혀 두고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던 내 어머니는 나만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쫓겨났다.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던 아버지는 난감해했으나, 이내 예정에 없었던 자식이라며 나를 방치했다.

    아직 자식이 없던 본부인의 생각은 좀 달랐는지, 그녀는 딸인 남설아를 낳기 전까지 나를 학대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이 집안에서 내가 아들 낳으라는 소리에 시달릴 일은 없었어!’

    어릴 때부터 폭력에 익숙해진 내게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라는 건 없었다. 본부인, 즉 계모가 남설아를 출산한 뒤에는 나를 이용하려는 친척들이 구더기처럼 들끓었다.

    ‘그래도 장손이니 잘 교육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하. 세진이라고 했지? 난 네 어머니의 친척이란다. 예전에 네 어머니가 어려울 적에 여러모로 도와줬지.’

    웃는 가면을 쓴 가식적인 사람들이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내가 얼마나 이 집에서 힘들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 집 장손’인 아이의 가치에 눈독을 들이는 것일 뿐.

    그들은 내가 이 집안의 후계자가 되어 많은 재산을 물려받길 원했다. 그때가 되면 내게서 은혜라는 이름의 콩고물을 쪽쪽 빨아먹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계모가 늦둥이 아들인 남설우를 낳으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본가는 나만 빼고 잔치 분위기였다. 계모는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는 결과물에 흡족해했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를 이용하려던 친척들은 나를 벌레처럼 경멸하며 떠났다. 외로운 나날이었다.

    나는 그 집에 있는 존재이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집의 아이는 오직 남설아와 남설우뿐이었다.

    그들은 예쁨받으며 귀하게 자랐고, 나는 재벌가의 자식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남은 음식이나 주워 먹으며 궁핍하게 자랐다.

    ‘저건 왜 태어나서……. 쯧.’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조차 나를 보면 인상을 찌푸렸다. 있어서는 안 되는 쓰레기가 꽃 옆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설아와 설우의 곁에 내가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밖에서 낳아 온 자식 주제에!”

    아, 남설우는 애지중지 길러진 탓에 오만하게 자라 나를 때리길 좋아했다. 왜냐하면 내가 남설우보다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성적 가지고 남설우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사건건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나를 이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남설우가 그냥 내게 관심을 끄길 바랐다. 피곤했다.

    그나마 이 집에서 날 사람 비슷한 것 취급을 해 주는 건 남설아뿐이었는데, 이 애는 나를 동정했다.

    “남세진.”

    “응.”

    “다쳤는데 병원 안 가?”

    “병원비가 없으니까.”

    “내가 대 줄게. 같이 가자.”

    “너 이러는 거 알면 주인 나리들께서 싫어하셔.”

    나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주인 나리들이라고 불러야 했다. 불공평한 처사란 걸 알았지만 외로움과 공허함에 무뎌진 나는 그러려니 했다. 세상은 불공정한 곳이니까. 나처럼 불행을 다 끌어모은 것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겠지.

    “몰래 가면 돼. 사람이 사람 꼴은 하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

    사람 꼴을 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별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완강하게 남설아가 동행해 주겠다고 하여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내게 혹시 집에서 가정폭력을 당하느냐, 아니면 학교폭력을 당한다면 신고해 주겠다며 걱정스레 쳐다봤다. 쓸데없는 호의였기에 거절했다.

    그날 남설아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남세진.”

    “왜.”

    “왜 신고하지 않아? 억울하지도 않아?”

    “해 봤자 경찰에겐 씨알도 안 먹혀. 주인 나리들 집안이 보통이냐. 해 봤자 나만 버르장머리 없는 원숭이 새끼 취급받고 몰매 맞겠지.”

    “……이건 잘못된 일이야. 바로잡아야 해.”

    “남설아. 정의의 용사, 뭐 그런 게 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거기서 난 빼 줘. 네가 자꾸 나한테 동정 섞인 호의를 베푸니까 남설우나 다른 애들이 날 더 괴롭히고 우습게 보는 거야.”

    “…….”

    남설우는 내가 자기보다 성적이 좋자 열등감을 가지고 대했다. 존나 팼다는 이야기였다. 자기가 질 때마다 때리는 게, 내가 겁먹어서라도 성적을 낮춰 주길 바란 듯했다.

    개새끼. 내가 들어줄 줄 알고? 절대 응해 줄 일 없었다.

    “사생아 새끼보다 못하면 어쩌누. 쯧쯧.”

    본부인의 늦둥이 아들로서 온갖 기대를 받던 남설우는 부담에 짓눌려 있었다. 게다가 나와 자꾸 비교를 당하니 남설우는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신경을 내 탓으로 몰아가며 폭력으로 풀고자 했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가리지 않고 패는 바람에 나는 전교에서 왕따가 되었다.

    “너 같은 새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이딴 말도 계속 듣다 보면 그런가?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그것조차 넘어서서 이젠 묵묵히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맞을 수 있었다.

    언젠가 성인이 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는 있긴 했다.

    “괜찮아?”

    남설아는 이런 나를 가엾게 여겨 자꾸 도와주려 했다. 이 녀석도 나보다 성적이 낮은 데다가 가부장적인 집안 아래서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단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남설아는 내게 못되게 굴지 않고 잘해 주려고 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어? 너 내 오빠잖아. 엄마는 다르지만.”

    “오빠라고 한 번도 안 불렀으면서 고작 그 이유로 나를 돕는다고?”

    “그러면 안 돼?”

    “……몰라. 맘대로 해.”

    남설아는 그래도 주머니에 용돈이 두둑했다. 나는 아니었다. 이 점을 이용해 남설아는 내가 꼭 필요한 참고서나 수험 서적 등을 구해다 주며 조금씩 나를 길들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자, 나는 남설아를 여동생이자 친구로 인정했다. 우리는 미치도록 괴로울 때 밤길을 실컷 뛰어다니기도 하고, 남설우를 욕하는 낙서를 화장실 벽에 할 때도 있었다.

    내가 고3이 되어 수능을 얼마 앞둔 날, 남설아는 초콜릿을 선물로 주며 시험 잘 보라고 응원했다.

    “남설우보다 못 치면 죽여 버릴 거야.”

    “네 깡마른 팔로는 주먹 날려도 안 아프거든?”

    “시험 잘 쳐서, 최고로 좋은 대학 가. 그리고 이 거지 같은 집에서 독립해.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남설아는 이 답답한 집안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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