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6화 (56/90)

56.

퀴퀴한 검은 연기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연기를 천처럼 감싸고 내게 돌격한 사람은 율리시즈와 내가 찾고 있던 반역자 세드릭이었다.

“클로드 하센티온!”

“……세드릭.”

세드릭은 못 보던 검은 칼자루를 들고 나를 내리치려 했다. 나는 스태프를 들어 그 칼을 막았다. 카캉, 하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귀가 아팠다.

“너를 죽이러 왔다. 네가 율리시즈와 떨어져 있기만을 기다렸지.”

“그럴 줄 알았어.”

넌 비겁한 놈이니까.

어릴 적, 율리시즈와 아멜리아를 폐궁에 가두고 마력 폭탄으로 없앨 궁리를 해낸 걸 보면 당연히 각개 격파를 시도할 거라고 봤다.

“약한 놈부터 먼저 상대해서 강한 놈을 제압하는 게 네 특기잖아.”

“닥쳐! 주둥아리를 뜯어 버리기 전에.”

“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서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게 네 앞에서는 아니야.”

“[수호하라.]”

푸른빛의 돔 형태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어막 결계가 생겨났다. 윈터는 ‘허락’된 존재이니 재빨리 돔 안으로 뛰어들어 와 나를 보조할 태세를 갖췄다.

세드릭은 인간답지 않게 검은 연기로 공중에 떠 있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한번 사술사의 부적으로도 깨진 결계를, 또 펼친다고 해서 네가 당하지 않을 줄 알아?”

“나도 두 번은 못 당하고 사는 사람이어서.”

“[공격. 사특한 것을 멸하라.]”

뜨거운 푸른 불꽃이 달린 불화살들이 빠른 속도로 내게서 튀어 나갔다. 목표는 세드릭이었다.

‘정화의 불꽃을 달았으니 세드릭에게서 사악한 혼이 떨어져야 할 텐데.’

그런 소망을 가지고 쏜 화살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세드릭을 칭칭 감고 있는 검은 연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검은 연기는 거대한 뱀처럼 형상을 갖추더니, 내가 쏜 푸른 불꽃 화살을 와구와구 먹어 치웠다.

그걸 본 세드릭은 두 눈이 풀린 채로 웃었다.

“이거 봐!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남겨 준 유산이야. 아주 강하고 순종적이라 마음에 들어.”

“…….”

“대마법사 네가 지금 멀쩡한 상태인데도 공격이 무력화된 걸 보면 내가 데리고 있는 이 혼이 더 강하다는 말이겠지. 사술이 이렇게 강한 수단이 될 줄 알았다면 진즉에 써먹을 것을 그랬어. 그랬다면 못생긴 여자와 결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정략결혼 상대인 동부 제독의 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자기 남편인 세드릭을 옹호하다 잡혀 반역자의 가족이 맞는 최후대로 변방의 노역자가 되었다.

“……그 사람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끝까지 너를 기다리다 벌을 받았어.”

“잘됐네. 더럽게 못생겨서 얼굴만 보면 토악질이 나왔거든. 그딴 여자랑 왜 결혼시켰는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알겠어. 이런 거대한 힘을 줄 계획이 있으셨으니 그깟 계집이야 언제든 죽이라고 한 거겠지.”

‘완전히 살육에 물들어 있군. 저 검은 연기에 의해 이성을 좀먹히고 있는 건가?’

세드릭이 원래도 좋은 놈은 아니었다지만, 지금은 피를 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빈센트에게서 물려받은 밝은 금발과 새파란 창공 같았던 눈동자는 검은 기운에 침식되어 점점 탁하고 칙칙하게 색이 빠지고 있었다.

‘세드릭을 물리치려면 저 알 수 없는 소환된 영혼부터 해치워야 해.’

나는 세드릭 말고 그 검은 연기를 향해 소리쳤다.

“원하는 게 뭐지? 세드릭을 숙주로 삼은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내가 더 훌륭한 먹이를 제시할 수 있어.”

“주인님!”

윈터가 기겁했다. 마법사로서 주술사가 만들어 낸 더러운 소환 존재와 대화한다는 거 자체가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니까.

“괜찮아. 윈터.”

“꼭…… 꼭 무사하셔야 합니다.”

등이 따끔거렸다. 몸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느껴져 서글퍼졌다.

“응.”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하더라도 차마 그러긴 어렵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검은 연기는 내 말에 반응하여 뱀의 형상으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너는 내게 뭘 해 줄 수 있는데?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너…… 클로드지?”

내 말에 검은 연기가 푸쉬식 가라앉더니 꿀렁거리며 요동쳤다.

<알아보겠어? 내가 클로드인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 보고자 했으나, 클로드는 내 뜻을 거부했다.

<네가 알 건 없어.>

“야, 너 진짜 이기적이다. 사람한테 말 그따위로 할래? 다짜고짜 나보고 진짜니 구원이니 하면서 여기다, 네 몸에다 밀어 놓고는 넌 황비와 행동을 같이 하고 있잖아.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적으로. 어차피 시작부터 넌 내 적이었는데, 내가 알려 주지 않아 몰랐을 뿐이야.>

“뭐라고……?”

검은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초록색의 독액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까지 온 건 장해. 하지만 내 일을 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저리 비켜.>

“피하세요, 주인님!”

윈터가 나를 밀쳤다. 하지만 거대한 뱀의 꼬리는 우리가 달음박질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퍼억. 살갗을 독한 연기가 부식시키는 걸 느끼며 우리는 의식을 잃었다.

* * *

황제가 된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는 고민이 많다.

그중 가장 으뜸인 고민은 뭐니뭐니 해도 스승님인 클로드에게 청혼한 일의 결과가 지지부진하다는 점이었다.

“푸하하. 연애 고민으로 속 썩는 걸 보니 시원하다!”

“아멜리아 샬롯 윈프리드. 에슬라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 용돈 두둑이 타 가고 싶으면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돈으로 협박하다니, 진짜 치사하다.”

아멜리아는 투덜거리면서도 율리시즈와 함께 서류 더미를 조금씩 털어 냈다. 선대 황제가 통치랍시고 뿌려 놓은 폭탄 같은 문젯거리를 자식들이 해결해야 한다니, 실로 불공평했다.

“죽기 전에 이런 거나 해결하고 갈 것이지.”

“안 했으니까 죽을 때 곁에 아무도 없었겠지.”

병사한 빈센트의 육신은 황실 사람들만이 묻히는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묘지에 그게 전대 황제의 묘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율리시즈는 결재의 늪에 빠져 있다가 시무룩해진 어깨로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아멜리아.”

“연애 관련 질문 하지 마. 난 오빠의 연애가 궁금하지 않아. 제발!”

“스승님께서 어디가 아프신 것 같은데, 그걸 내게 숨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아멜리아가 순간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서류를 찢어 버렸다.

흉년이 올 것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했다가 제국민에게 싼값에 빌려주는 게 어떻겠냐는 요지의 서류였다. 율리시즈는 묵묵히 그 서류를 마법으로 고친 다음 딱딱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스승님께서 세드릭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셨지.”

“그거, 마법 구속구 때문 아니었어? 아티팩트 등급이 워낙 높은 데다가 그때 세드릭이 주술로 인한 증폭을 받아서……”

“스승님은 마력 구속구의 등급이 얼마나 높든, 그걸 1초 만에 가루로 부숴 버리는 분이셔.”

“…….”

“그런데 세드릭 앞에서 그걸 푸는 데 시간이 걸려 지체되고, 결국 칼까지 맞을 뻔했다?”

으드득. 율리시즈가 이를 갈았다. 자색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스승님이 어떤 이유에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쇠약해지셨어. 예전의 그 강력한 대마법사가 아니야. 자칫하다간 죽임당할 수 있다고.”

“그런…… 그럴 수는 없잖아. 대마법사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강력한 저주를 걸 수 있는 건 그 상위의 초월자뿐이야. 그런데 초월자는 보이지 않은 지 꽤 되었어.”

“알아.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지. 왜 스승님은 나 때문에 살고 싶어 하면서도 나를 속이시는 것인지. 또 스승님을 곤란하게 하는 저주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서. 스승이 제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 함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서. 율리시즈는 걱정으로 들끓는 마음을 차가운 이성으로 가리고 스승을 대해야 했다.

아멜리아는 쩔쩔매다가 겨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클로드 님은 지금 여행을 나가셨다며, 위험하니 잡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분 하는 행동 보면 뻔하지……. 도망쳐서 붙잡히지 않는 세드릭을 잡으러 가신 거야. 본인이 훌륭한 미끼라고 보셨겠지. 내가 스승님이 약해지신 줄 전혀 모르는 줄 알고.”

“오……. 클로드 님 돌아오시면 큰일 나겠네.”

‘이 오빠 눈이 맛이 갔어.’

아멜리아는 슬금슬금 율리시즈로부터 멀어졌다. 사랑을 시작한 또라이는 더 미친놈이 되는 법이라, 잘난 오빠지만 당분간은 멀리해야 할 성싶었다.

“스승님께서 내게 숨기시는 게 뭘까. 그것 때문에 미치겠단 말이지.”

“오빠는 원래 좀 광기가 있었잖아.”

“너는 없는 줄 아니? 우리 다 같이 하하호호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라는 걸 스승님이 아시면 잘도 기뻐하시겠구나.”

“그분은 안 믿으실걸. 오빠가 아직도 천진난만한 일곱 살 소년인 줄 알잖아.”

“조금 있으면 남자로 봐 주실 거야.”

투닥거리던 남매는 잠시 후 비보를 듣게 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스승님께서 사라지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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