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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4화 (54/90)
  • 54.

    윈터와 내가 여행 갈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율리시즈가 맵시 있는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

    “율리시즈.”

    “오늘도 눈부시세요. 스승님을 위해 준비한 꽃인데,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고마워.”

    율리시즈가 내민 꽃다발은 리시안셔스였다. 옅은 분홍색의 꽃이 소복한 게 예뼜다.

    윈터는 리시안셔스를 보자마자 못 말린다는 듯 쫑알거렸다.

    “꽃말이 영원한 사랑, 인 것을 들고 온 걸 보면 율리시즈 폐하께서는 주인님이 사실 나가지 않기를 바라시나 봐요.”

    “왜?”

    “아직 주인님께서 폐하를 연인으로 삼지도 않으셨으니, 율리시즈 님의 마음은 견고할 거라고 주인님께 보여 드리는 거죠. 많이 사랑받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윈터. 다 들리잖아.”

    리시안셔스 꽃다발보다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 듣는 나는 창피한데, 율리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었다.

    “설명 고마워, 윈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전해 주네.”

    “이렇게 말 안 하면 주인님께서 율리시즈 님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십 년은 늦게 알아차릴 것 같아서 말이죠. 두 분 사이의 중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율리시즈 폐하께서 주인님을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이 귀찮음을 무릅쓰겠습니다.”

    윈터가 앞발을 주먹처럼 불끈 쥐고 퍽 대단한 결심을 외치는 것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사랑의 큐피드 역할이라. 윈터 너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주려다가 참기로 했다.

    ‘이걸 다 말해 주는 것부터가 몽글몽글한 분위기는 다 깨 버리는 거 아닌가.’

    연애를 안 해 봐서 모르겠다. 이 어설프고 엉망진창인 것 같은 시작이 과연 괜찮은 걸까.

    “스승님. 저는 뭐가 되었든 괜찮아요.”

    율리시즈가 이런 나를 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꽃보다 내 제자가 더 아름다웠다.

    “스승님이 제 마음을 들어 주시고, 진지하게 고려 중이시니 저는 요즘 아주 행복해요. 업무로 바쁘다가도 스승님 생각만 하면 힘이 솟구치는걸요. 스승님의 존재가 저를 행복하게 해요.”

    “그, 그래.”

    열정적인 애정 표현은 역시 어색했다. 지나치게 단 음식을 먹어 이가 썩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아픈 건지 좋은 건지 모를 정도로 뛰었다. 윈터의 표정은 또 썩었다.

    “우리 토끼 같고 맹한 주인님, 저렇게 애지중지 키운 자식 같은 인간에게 홀라당 넘어갈 줄은…….”

    “누가 홀라당 넘어간다는 거야. 딸 빼앗긴 아빠처럼 말하지 마, 윈터.”

    “빼앗아가는 줄은 아시나 봅니다, 황제 폐하.”

    윈터와 율리시즈가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였다. 두 사람, 친하면서 내가 끼게 되면 서로 엄청나게 경계한단 말이지.

    “싸우지 말아야지.”

    “싸우는 거 아닙니다.”

    “말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법이죠.”

    주먹이랑 발이 먼저 나가는 싸움이 아니어도 입씨름하느라 난리인 건 모르는 척하지 말아 줄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어쩐지 이런 티격태격한 싸움을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것 같아서, 나는 공간의 문이나 열기 위해 스태프를 꺼냈다.

    “마차를 준비해 놨는데, 그건 필요 없으시겠죠?”

    율리시즈의 말에 시종들이 백색에 금 장식이 달린 화려한 황실 전용 마차를 몰고 왔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저런 건…… 국혼식에서나 몰아야 하는 거 아니야?”

    지나치게 눈에 띄잖아. 마차 창문에 장식된 거, 설마 작은 꽃들은 아니겠지? 생화가 아니라 보석으로 만든 꽃 같은데. 내 시력이 잘못된 거면 좋겠다.

    ‘저런 마차를 타고 간다면 산적들이 입에 침을 줄줄 흘리면서 달려들 거야.’

    내가 이동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라 다행이었다. 와, 저런 마차를 끌고 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윈터가 나를 툭툭 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주인님.”

    “어어…….”

    “마력은 최대한 아끼시고, 마법도 자제해야 하는 몸이시란 거, 잊지는 않으셨겠죠?”

    “…….”

    나보고 저걸 타라고?

    목을 삐그덕삐그덕 돌려 윈터를 쳐다보자, 윈터 또한 마뜩잖다는 표정이었으나 시종으로부터 순순히 마차 열쇠를 받았다.

    “색은 바꿔 주십시오, 폐하. 흰색은 금방 때도 타고 더러워지기 쉬워서 여행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 의견 바로 수렴하도록 할게. 때마침 검은색 마차도 쌍으로 구입한 게 있거든. 물론, 내 사비를 지출한 거야.”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합니다, 폐하.”

    ‘윈터. 아무리 내가 아기 시절부터 키웠어도 이젠 한 나라의 황제인데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아웅다웅 둘이 다투는 중에 끼어들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몸도 좋지 않은데 기력마저 소모할 수는 없었다.

    “그래……. 마차는 검은색으로 하자.”

    “사실 스승님의 머리 색에 맞춘 하얀색이 더 예쁜데…….”

    율리시즈가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 나는 영혼 없이 웃었다.

    “네가 저거 타고 시찰 나간다고 하면 나도 탈게.”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율리시즈가 들뜬 마음에 뭘 내미는 건 귀엽게 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눈에 확 띄는 마차를 받으라는 건, 마음은 고맙기는 했지만……. 못 할 짓이었다.

    결국 율리시즈가 준 마차는 검은색으로 결정되었고, 윈터와 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율리시즈는 잘 갔다 오라고 의젓하게 보내 줄 때는 언제고, 막상 내가 궁 밖으로 나서려 하니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울먹거렸다.

    “스승님…… 건강하게 무사히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뒤에 선 시종들이나 로라의 표정 등이 괴상해졌다. 누가 들으면 병약하고 연로한 노인 하나를 보내는 줄 알겠다.

    “그렇게 할게. 율리시즈 너야말로 별문제 없이 지내면 좋겠다.”

    “아멜리아가 에슬라에서 잠시 귀국한다고 했으니, 그 애한테도 업무를 떠맡기면 저도 좀 한가해지겠죠.”

    몸을 쓰는 게 적성인 아멜리아는 율리시즈가 일을 시키면 질색하겠지. 도망치려는 아멜리아를 잡아다가 서류 지옥에 밀어 넣을 율리시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율리시즈, 이마 좀 가까이 대 봐.”

    “앗, 뽀뽀해 주시려는 건가요?!”

    설레발을 치며 냉큼 이마를 가까이 댄 율리시즈에게 나는 입술 대신 손가락을 따악 날렸다.

    “아야! 아픕니다, 스승님!”

    엄살도 황제급이다. 체력 따위 저질인 이 육신으로는 딱밤 날려 봤자 민들레 홀씨가 잠깐 앉았다 날아가는 수준일 텐데.

    “아멜리아 너무 못살게 굴지 마. 알았어?”

    “저도 서류의 산더미 틈에 매일같이 신료들과 함께 앉아 있는 건 별로라고요. 아멜리아도 황족이니 저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귀엽게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린 율리시즈가 피곤함을 토로했다. 야근을 면하면 다행이라며, 스승님에 대한 소식을 꼬박꼬박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바로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개인 자유 시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게 다 망할 선대 황제 때문입니다! 제가 그 인간이 싸지른 오물을 다 치우고 있어요.”

    “율리시즈, 말 예쁘게 하자. 너도 위엄이란 게 있잖아.”

    로라와 페른이 다 해탈했다는 듯 초연한 웃음을 허허 지었다.

    “우리 폐하께는 그런 게 없습니다…….”

    “위엄? 그게 뭡니까? 적어도 클로드 님 앞에서는 먹는 것보다 못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이상하다. 율리시즈는 분명 착하고 성실하고 바른 아이로 자랐는데 주변 평가가 박했다. 어휴, 저 또라이 일은 깔끔하게 잘하니 우리가 모신다. 이런 분위기라 나는 마냥 웃겼다.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율리시즈가 이끄는 새로운 황실이 아직까지 잡음이 없는 걸 보면, 이 아이의 방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힘들거든 언제든 연락해. 통신용 아티팩트로 잠시 동안은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나는 윈터가 내 개인 금고에서 가져온 최상급 통신용 아티팩트 한쪽을 내밀었다. 율리시즈가 못내 걱정되기도 하고, 율리시즈 또한 내가 없으면 분리불안증에 시달릴 것 같다는 윈터의 의견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율리시즈는 내가 준 아티팩트를 지고의 보물이라도 하사받은 것처럼 행복해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도 바쁘실 테니 너무 자주 연락드리진 않을게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걸어도 괜찮아.”

    “안 됩니다. 페른이 말하기를, 질척거리는 구애는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하하. 폐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하하하.”

    율리시즈의 입을 페른이 황급히 막아서고는 미묘하게 굳은 웃음을 흘렸다. 페른의 어깨 위에 있는 데이지는 난 모른다며 발뺌하고, 윈터는 페른을 향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날렸다.

    ‘복작복작하니 율리시즈가 외로울 틈은 없겠다.’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해서 가자. 걱정해 봤자 해결되는 일도 없을 텐데.

    윈터가 이동 마법을 대신 쓰기로 하고, 대신 능력을 증폭시켜 줄 아티팩트와 마력석을 몇 개 소모하여 긴 거리를 이동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루나가 처음 향했던, 세계의 태곳적 기록이 남아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잘 다녀올……”

    스르륵.

    ‘음?’

    인사하고 이동하려는 순간, 아주 불길하고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희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세드릭. 세드릭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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