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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3화 (53/90)
  • 53.

    “뭔가요?”

    “며칠 떠나 있을까 해. 음, 이것도 미리 말하지만 도망치는 건 아니야.”

    “스승님께서 작정하고 도망치려고 하셨다면 지금 당장 공간을 열고 아무 곳으로든 향하셨겠죠. 알아요.”

    이 녀석은 나를 나보다 잘 아는 것 같았다. 사랑하면 저게 가능한 건가?

    ‘내 어떤 점이 좋아서 저러는 건지…….’

    나는 나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율리시즈의 열성적이고 저돌적인 표현 방식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도 저렇게 반응을 해 줘야 하나 싶어 불안하고 초조했다.

    율리시즈는 이런 나의 사소한 점까지도 알아내 나를 다독였다.

    “스승님, 제가 스승님께 내보이는 모든 애정 표현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부담 느끼지 마세요. 스승님께서는 무뚝뚝한 편이시고, 저는 그런 점마저 좋아하고 있으니 스승님이 원하실 때 말해 주세요.”

    “……율리시즈. 너 굉장히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

    “귀엽다는 뜻이죠? 좋았어. 오늘은 귀엽다는 말을 들어 행복한 날이에요.”

    “귀엽다고 안 했는데.”

    “제겐 그렇게 들려요, 스승님.”

    율리시즈는 행복한 감정을 여과 없이 내뿜으며 단것을 흡입했다. 오물오물 먹는 게 어릴 때랑 똑같았다. 귀여웠다.

    나도 조금씩 디저트를 먹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여기서부터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건 말하기가 어려워…….’

    이제 막 국정을 안정화하는 데 주력하는 율리시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스승 된 도리로서 제자가 나가는 앞길을 닦아 주진 못할망정 더럽혀서는 안 되니까. 나는 황제가 되기로 선택한 율리시즈가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할 것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황성에만 머물렀더니, 좀이 쑤셔서. 윈터를 데리고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기한은 정하지 않았지만, 아주 길지는 않을 거야.”

    여행이란 핑계 아래에서 나는 내 몸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기이한 마법사들이 살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가 볼 예정이라, 어쩌면 그곳에서 실종된 루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일 때문에 지금은 안 될 것 같네요. 아프지 말고, 어디 다치지도 말고 무사히 다녀오세요. 또 윈터가 비상 신호를 보내면 그곳으로 날아갈 테니까요.”

    “……그렇게 해. 내가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나는 뻔뻔함을 유지했다. 율리시즈가 세드릭에게 내가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겠으나, 이런 말에도 그저 나를 믿는다며 자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스승님께서 저를 믿듯이, 저도 스승님을 믿어요. 무사히 돌아오시리라 봐요.”

    “응. 나도 그래.”

    떠난 기간 동안 나는 너를 많이 그리워할까?

    그것도 알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미묘한 감정이 사랑으로 밝혀지기까지는 여러 질문을 던져야 했다. 나는 율리시즈와 떨어져 있게 된다면 그 애의 곁으로 얼마 만에 돌아갈지를 재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안에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영영 돌아갈 수 없겠지.

    * * *

    윈터는 이미 짐을 다 싸놓고 나를 기다렸다.

    “주인님!”

    “윈터. 율리시즈에게는 이야기 끝났어. 내 몸을 치료할 단서가 있는 곳을 가 보자.”

    “저는 대찬성이에요.”

    윈터는 밖을 누비는 걸 좋아했기에, 여행을 빙자한 조사를 반겼다.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윈터가 말린 과일들을 간식으로 챙기며 물었다.

    “루나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거든.”

    몸에 금이 너무나 많이 늘어났다. 이러다 몸의 파편이 도자기처럼 깨져서 굴러다닐 것 같아 무서워졌다.

    “……율리시즈 님께서는 아직도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응. 밝히는 건 여행을 다녀와서 하기로 했어. 내가 말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고…… 또 나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다 찾아본 뒤에 희망을 발견한다면, 그때 율리시즈에게도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밝게 이야기했는데, 윈터는 또 내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챘다.

    “주인님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신다니까요.”

    “또 티 났어?”

    “원체 밝은 분이 아니신데 웃으려고 노력하시니 불안하신 게 보입니다.”

    “윈터는 내 마음을 족집게처럼 잡아내네.”

    “제가 아니라 주인님께서 물처럼 투명하게 속이 보이시는 겁니다.”

    나는 정을 준 주변 사람들이 아니면 늘 표정의 변화 없이 무심하게 대하곤 했는데, 윈터는 내 속이 다 보인다고 말했다.

    ‘윈터의 관찰력이 좋은 것도 있겠지만, 내가 윈터에게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서겠지?’

    그걸 생각하면 내가 윈터에게 진짜 주인으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구나, 싶어서 고맙고 미안했다. 죽을 날을 받아서 온 주인이라니. 처음 봤을 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막막했을까.

    마법을 사용해 효율적으로 추가적인 간식거리와 비상 약품을 챙기는 윈터는 분주했다. 나는 윈터에게 다가가 꼭 안아 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번 여행에서 작은 단서라도 찾길 기도하자.”

    “작은 단서로는 안 됩니다. 주인님을 살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구해야 해요.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겁니다. 반드시.”

    윈터의 갈색 털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패밀리어도 주인 된 마법사의 영향을 받아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기에, 나와 윈터의 외양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변했다. 계약의 대가로 죽음을 기다리던 나는, 도움을 받아 살아갈 방도를 찾으려 한다. 윈터는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걱정한다. 이것만으로도 클로드가 생억지를 부려 가며 나를 더 살게 한 건 충분히 가치 있었다.

    “응. 있을 거야. 있을 거라고 믿어.”

    나는 윈터의 갈색 털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윈터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젤리 같은 앞발로 내 머리를 토닥였다.

    “주인님 머리카락은 제가 관리해서 그런지 부드럽고 윤기가 나네요.”

    “자화자찬하는 게 취미야?”

    “주인님께 저, 윈터가 패밀리어로서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걸 강조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무사히 살아남으시면 그때 제게 고마워서 선물을 내리시겠죠? 엄청 비싸고 좋은 걸 요구할 겁니다. 각오하세요.”

    나는 윈터처럼 세심하지 못하지만, 윈터가 부러 고약한 심보를 드러내는 게 나를 안심시키려 던지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클로드는 어째서 이런 존재들이 곁에 있음에도 너무나 쉽게 몸을 버리고 떠날 생각을 했을까.’

    그게 미심쩍었다. 윈터는 클로드가 괴짜여도 명성에 걸맞게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며 의심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달랐다.

    ‘정의와 선의 잣대를 철저히 자기 기준으로 자기 육신에 적용하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니, 악이라도 규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육체가 무너져 가는 속도를 올리는 게 클로드에게 이로운 결과라면, 하지 못할 건 없었다.

    ‘내가 클로드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직감은 그를 향해 이상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후우우. 윈터의 털에 코를 묻고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하자 윈터가 인제 그만하라며 나를 떨어뜨렸다. 짐 덩어리는 아공간 주머니와 같은 아티팩트에 챙겨 간소화했다.

    “움직이셔야지요. 지금도 주인님의 몸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내 몸은 정말 바위가 풍화되어 모래로 변하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소실되어 가고 있었다. 머리와 손, 발 등을 제외한 몸통은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듯이 금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 기다란 소매의 로브를 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율리시즈가 순진무구해서 참 다행이지. 내가 왜 긴 옷만 입는지 물어보지 않아서 곤란해질 일이 없었잖아.”

    여행용 의복으로 갈아입는 내가 중얼거리자, 윈터는 인상을 쓰더니 모르겠다는 식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순진……무구……한 때는 오래전에 지나셨죠. 주인님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율리시즈 폐하를 여전히 말랑말랑하게만 보는 건 주인님이 유일하십니다.”

    “로라는? 로라도 율리시즈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봤잖아.”

    “로라는 사리 분별이 냉정하고 정확합니다. 그녀는 율리시즈 폐하를 마음 깊이 이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율리시즈 님께서 순진하다고 보지는 않죠. 제가 봐도 율리시즈 님은 준비된 군주입니다. 공사 구분이 확실하시죠. 율리시즈 님이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는 건 주인님이 유일할 겁니다.”

    “음…… 그렇게 말해 주니 부끄럽네.”

    율리시즈가 정말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야 윈터가 왜 그렇게 내게 율리시즈와 있을 때 답답해 죽겠다고 했는지 알겠다. 율리시즈는 나에게만큼은 모든 마음을 열고서 사랑한다는 티를 냈는데, 정작 나는 전혀 몰랐으니까.

    윈터는 내 머리카락과 의복을 정돈해 준 뒤, 익숙한 집사복이 아니라 편안한 여행자의 옷을 걸치고 말했다.

    “가시죠, 주인님. 후딱 다녀오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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