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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2화 (52/90)
  • 52.

    작은 페럿 집사는 열변을 토한 후 엉엉 울었다.

    “주인님이 행복하기를 바라서 드린 말이었어요. 비난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응. 알아. 고마워.”

    윈터는 훌쩍거리며 내게 진심을 전달하려 애썼다.

    “잘 생각해 보려고 할게. 윈터가 나를 많이 걱정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걸 직접 들었으니까.”

    “정말이죠, 주인님?”

    윈터가 까만 콩 같은 눈을 반짝였다. 눈물이 고여 있어서, 나는 그것을 손수건으로 닦아 줬다.

    “율리시즈와의 일은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고 마주 보려고 해 볼게.”

    “그럼 폐하를 만나러 가시나요?”

    “응. ‘약속’도 다 되어 가기도 하니까. 더는 미룰 수 없겠지.”

    윈터가 폴짝폴짝 뛰었다.

    “율리시즈 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저는 주인님의 패밀리어지만, 주인님과 함께 폐하를 키우며 그분 역시도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었어요.”

    잔소리 많고, 툴툴거리는 게 특징인 윈터. 윈터는 잔정이 많았다. 그러니 나같이 무기력한 사람을 이곳에서 ‘클로드’로서 살아가도록 돕고, 율리시즈 또한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며 지켜봤을 것이다.

    “처음에는 황성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싫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주인님을 행복하게 하는 따뜻한 사람은 율리시즈 님이었으니까요. 저는 두 분 모두의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습니다.”

    윈터는 매일 깔끔하게 다려 입는 집사복의 조그마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주었다.

    “받으세요. 주인님. 주인님께서 어린 율리시즈 님과 함께 정원에서 놀 때, 제가 찾았던 네잎클로버예요.”

    뜯은 지 오래되어 변색된 네잎클로버는 마법으로 코팅되어 책갈피로 만들어져 있었다. 윈터는 그것을 내게 꼭 쥐어 주며 힘내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주인님이 가시는 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할게요.”

    “……고마워.”

    윈터의 응원을 받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저편에 율리시즈의 집무실이 보였다. 오늘도 밀려드는 서류의 산더미에서 율리시즈는 직접 뽑은 유능한 인재들과 함께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공간을 건너 율리시즈의 뒤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유리.”

    “헉, 스승님?”

    율리시즈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중이라, 내가 놀라게 하는 바람에 서류가 우수수 천장으로 날아가 버렸다.

    “[원래대로 돌아와라.]”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미안함에 마법으로 처음과 똑같이 정리된 서류 더미를 율리시즈에게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여기에 오실 줄 몰랐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궁 내부의 규정상, 국정을 주관하는 이 집무실에 들어오려면 미리 알현 신청을 하고 와야 했다. 즉, 불청객은 나인데 방 주인인 율리시즈가 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왜 네가 내게 미안해해.”

    미안해야 하는 건 나인데.

    내 어조는 머쓱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다소 우물쭈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율리시즈는 내가 도망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중충했던 표정이 비 온 뒤 하늘처럼 갰다.

    “아니에요. 제가 저번에는 마음이 급해서 무례를 범했어요. 스승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신데……. 제 마음을 한시라도 더 빨리 고백하고 싶어서, 그래서 밀어붙이기에만 급급했어요.”

    율리시즈는 내가 불편했던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서툴렀던 점을 인정하고 실수라는 변명을 내세우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저를 피하실 때는 서운했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셨어요. 페른이 제게 스승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달려들었다고 상상하면 소름이…… 어후.”

    “폐하. 이 나라 국민도 아닌데 여기 와서 열심히 일하는 마법사의 마음은 안 챙겨 주십니까? 저도 속상함이라는 감정을 느낍니다만…….”

    “페른은 철면피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스승님을 쳐다보면 회복되잖아요.”

    율리시즈가 페른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상큼하게 독설을 날렸다. 페른도 그러려니 하는 걸 보니 저게 두 사람의 대화 방식인 듯했다.

    “절 너무 잘 아시네요, 폐하.”

    “하하. 스승님을 더 잘 알죠.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되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

    “어…… 그래. 고맙다. 그런데 좀 낯부끄럽구나.”

    내가 자각하지 못했는데, 율리시즈는 숨 쉬듯이 나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마음이 흘러넘쳐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앗. 하지 말까요? 스승님께서 싫어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전 스승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 말은, 내가 뭘 시켜도 그 뜻대로 다 하겠다는 뜻이야? 죽으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장난으로 한 말에, 율리시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죽어서 스승님이 행복해지신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결말이죠.”

    그 파격적인 발언에 율리시즈와 함께 일하던 신흥 귀족들은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나도 광적인 율리시즈의 애정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너를 아끼는데, 네가 죽기를 바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저도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어요. 그만큼, 스승님께서는 제게 절대적인 존재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응.”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손끝이 간질간질해져 긁고 싶어졌다.

    “저, 폐하. 실례지만 저희가 먼저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일하다가 말고 어딜 가나?”

    “그럼 폐하께서 대마법사님과 단둘이 계실 수 있도록 저희가 일거리를 들고 빠져 드리는 게…….”

    하급 귀족이 덜덜 떨면서도 있는 용기를 다 털어 율리시즈에게 건의했다. 앉아 있던 다른 귀족들도 생각은 같았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나, 나랑 티타임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율리시즈.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한 것 같아.”

    “좋습니다! 시종장, 주방에 연락해서 티 테이블 세트를 준비해 달라고 해. 단 건 전부 내가 먹는 거니까 유의해 달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물러가고, 나는 율리시즈와 함께 우리가 같이 놀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황태자궁의 정원으로 갔다.

    황제와 대마법사의 티타임이라 해서 이것저것 준비된 게 많았다. 베이지색의 파라솔이 강한 햇빛을 막아 주고, 그 밑에 설치된 둥근 테이블 위로 파티시에가 정성을 다해 만든 마카롱이나 다쿠아즈, 푸딩 등이 먹음직스러운 색감을 뽐냈다.

    차는 히비스커스였다. 우리는 각자 찻잔을 들고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

    “율리시즈.”

    “아, 스승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고마워. 그러면 내 용건부터 말할게.”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이 말을 전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내게 고백에 대한 답을 편할 때 달라고 했지.”

    “네!”

    “내 대답은…… 미안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는 거야.”

    율리시즈의 눈이 약간 가늘게 떨렸다. 유리는 내 말, 표정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긴장 중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율리시즈 네가 내게 품은 감정과 같은 사랑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붙어 있고 싶은 그런 달콤한 감정을 누구에게서도 느껴 본 적 없기에 당황스러웠고, 무서웠어.”

    입버릇처럼 했던 말. 율리시즈에게 너만큼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율리시즈의 관계를 정의했다.

    우리는 서로를 소중히 여겼으나, 나는 여기서 더 관계가 발전되길 원하지 않았다. 사랑하게 되면 헤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데, 나는 율리시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 데다가 지금의 사이가 깨지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서, 너와 연애를 해 보는 건 아직 무리라고 생각해.”

    “그 말씀은……?”

    “하지만 내가 위험에 처했던 순간 떠올랐던 건 바로 너였어.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어린 시절의 네가 아니라 지금 네 모습이.”

    ‘약속’으로 인해 내게 살아갈 유일한 의미가 되어 준 너를,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규정한 것 같아.

    그걸 감히 사랑의 시작이라고 봐도 될까?

    내가 너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는 건 어떠냐고 물어도 될까?

    “나는 그런 걸 물어보고 싶어서 네게 왔어.”

    “……당연히 괜찮죠!”

    애매한 대답이라 율리시즈가 실망할 줄 알았는데, 그 애는 기뻐했다. 자색 눈에 별빛이 서렸다.

    “뭐든 괜찮아요. 저는 스승님과의 관계를 연인으로 재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좋아요. 스승님이 저를 경멸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우리는 비슷한 것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더 빨리 율리시즈에게 오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리고 율리시즈,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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