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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1화 (51/90)
  • 51.

    거절했지만 율리시즈는 끈질겼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너의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쭉 지켜봐 온 사람이야. 익숙함과 사랑은 달라. 너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해서 이러는 거야.”

    그러자 자색 눈동자가 상처받은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제가 혼동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래.”

    “스승님. 저 율리시즈입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고 스승님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해 준 율리시즈요. 제가 그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를 바보로 보이십니까?”

    율리시즈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게 질렸다. 세드릭과 대치하던 때가 차라리 안색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저 아이는 지금 나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는 이미 성인이 되었어요. 아이라고, 아가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는 지났어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제 감정은 제가 잘 알고 스스로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있어요.”

    “…….”

    “제 사랑을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스승님. 스승님께서 외면하신다 해서 제가 품어 온 사랑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습니다.”

    성장의 벽을 넘어 근사한 금발의 미남이 된 황제가 자줏빛 눈을 빛내며 화사한 꽃다발을 내게 선물해 줬다.

    “스승님께 정식으로 청혼합니다.”

    “……너.”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대답은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스승님께서 편하실 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백을 마친 율리시즈는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서는 줄행랑을 쳤다.

    “도망치고 싶은 건 나라고…….”

    황성의 복도. 그것도 황제의 집무실 바로 앞이었다. 집권 초기인 만큼 많은 인사들이 일 처리를 위해 드나들고 있었기에 많은 귀족들이…… 율리시즈가 내게 고백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흠, 어흠.”

    “저,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싸움은 신성한 일터가 아닌 곳에서 하심이……!”

    “누가 저 새끼 입 좀 막아!”

    우왕좌왕하던 귀족들은 결재를 핑계로 율리시즈를 찾아 도망쳤다. 율리시즈의 고백 폭격에 너덜너덜해진 나는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주인님. 이런 곳에서 잠드시면 입 돌아갑니다.”

    “……윈터? 너 왜 거기서 나와?”

    윈터가 복도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아래로 착지했다.

    “두 분을 피하려다가 그만 천장에서 다 들어 버렸지 뭐예요.”

    “으아악! 아악! 이야기하지 마! 없었던 일로 해!”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고 목격자가 수두룩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주인님께서 고백을 들으셨는데 어떻게 없었던 일로 합니까. 그건 고백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율리시즈가 사람들 모여 있는 데서 공개 처형, 아니 공개 고백 한 건 괜찮아? 어?”

    멘탈이 곱게 가루로 빻아져 주르륵 흘러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쥐구멍, 쥐구멍은 어디 있는 거야. 당장 여기서 날 숨겨 줘.

    하지만 윈터는 내게 잔인했다.

    “그거야 주인님께서 계속 폐하를 피하시니 일단 붙잡고 이야기를 쏟아 내야겠다, 라고 생각하신 거겠죠.”

    “으으으으…….”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야. 머리를 두들기는 나를 윈터가 막아서며 내 두 손을 바르게 로브 주머니 속에 넣어 줬다.

    “어쩌겠어요. 받아들이셔야지요.”

    “……너 너무 냉정해. 이게 쉬워 보여?”

    “주인님을 모시는 패밀리어로서 주인님의 결혼 및 연애는 굉장히 엄청난 이벤트이니 절대 쉬워 보인다는 말은 못 합니다. 어렵죠. 대단히 까다롭고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희귀한 이벤트예요.”

    “…….”

    “전 진지합니다. 율리시즈 폐하 못지않게 이 일에 진지하다고 맹세하죠.”

    그렇다기엔 이 페럿도 자꾸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이 영 수상했다.

    “우리 둘 다 남자인 건 괜찮고?”

    “뭐, 먼저 고백하신 게 제국의 만인지상이신데 누가 뭐라고 한다면 법부터 바꿔 버릴 분이시니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 세상에.”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나는 뒷 목을 붙잡고 마법을 써서 윈터를 끌고 내 방으로 도망쳤다.

    “윈터, 너도 알잖아.”

    내가 옷을 풀어 헤쳐 가슴팍을 드러냈다. 그 위엔 시계 모양의 문신이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었다.

    12시 자정까지 남은 칸은 고작 2개.

    ‘그리고 몸에 금이 가며 마력이 새는 이상 증세가 나타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란 점.’

    “2년이 뭐야. 하루도 안 남았을 수도 있어. 내가 율리시즈와 결혼한다고? 그건 그 애에게 더 큰 상처만 입힐 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어 버릴 때의 고통을 알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의 얼굴을, 목소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살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이야…….”

    예정된 이별이 죽음이란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실 죽기 위해 너를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들려줄 수는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윈터는 나를 토닥이며 바르게 누워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콩벌레처럼 몸을 만다고 해서 주인님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허리만 더 아프죠.”

    “……윈터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얼굴을 뒤덮은 두 손을 떼고 윈터에게 묻자, 윈터는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내게 답해 줬다.

    “우선, 고백에 대한 답을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절이든, 승낙이든, 보류든. 그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니까요.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2의 고백 처형 사태가 일어날 뿐이에요.

    윈터의 말에 팔에 닭살이 쫙 돋았다. 정면 돌파밖에 없다, 이건가.

    “그, 그래서?”

    “그다음으로는…… 저는 주인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뭔데?”

    “율리시즈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뚝.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싹 사라지고 윈터가 내게 던진 그 질문 하나만 남았다.

    “주인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내가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사랑스러운 아이. 내가 지켜 줘야 할 대상.’

    여태까지는 그랬다. 이게 기본값이었다. 우리의 사이는 여기서 더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관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율리시즈가 내게 고백을 하기 전의 이야기.

    “난…… 나는…….”

    율리시즈가 나를 세드릭으로부터 구해 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죽음을 앞두고, 내가 가장 간절히 보고 싶었던 건 율리시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장면은 내가 지켜 줘야 할 어린애 시절의 율리시즈가 아니었다.

    내가 떠올렸던 건, 다 커 버린 지금의 율리시즈가 나를 향해 환히 웃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율리시즈는 멋지게 나를 구해 내가 마지막 순간에 보고 싶다고 소망하던 그 미소를 보여 줬다.

    “율리시즈 폐하를 보고 두근거린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율리시즈에게 설렜던 순간이…… 있었다.

    나를 구하고, 어째서 세드릭에게 죽을 뻔했냐 묻지도 않고 그저 다 괜찮을 거라고, 따뜻하게 햇살처럼 감싸 주는 모습에서 나는 진정으로 구원받았다.

    내가 ‘클로드’가 되기 전 바랐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서로를 채워 주고, 괴로울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고, 나 또한 그 사람의 지지대가 되어 아껴 주는 사랑.

    “…….”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본 윈터가 정리해 주었다.

    “좋아하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면요. 주인님, 그건 사랑이에요.”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곧 죽어 버릴……”

    “그런 건 상관없어요!”

    윈터는 성큼성큼 내 몸 위를 기어오르더니, 뺨을 찰싹 때렸다.

    “사랑하는 자격이 주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주인님께서는 도망치고 계세요! 주인님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율리시즈 님께도 상처가 되지 않을지를 고민해 봐야 해요. 계속 포기하고 체념한 채로 무기력하게 미래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돌이킬 수 없어요!”

    헉. 헉. 윈터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여 윈터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주인님께서 어떻게 보이는 줄 아세요? 율리시즈 님을 이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분을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신경 쓰고 계시잖아요.”

    “…….”

    “그런데 주인님은 죽음을 이유로, 사랑을 선택하면 책임을 질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워서 회피하고 있어요. 두려우시겠죠. 하지만 선택의 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와요.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이미…… 가장 이기적인 형태의 자기만족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게 사랑하는 상대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독이 될 거예요.”

    “……윈터.”

    “사랑한다면, 다가가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주인님께서…… 괴로우실 이유도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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