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50화 (50/90)

50.

“왜긴. 율리시즈, 너도 성인식을 치르면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윈프리드 제국의 미혼 남녀들은 성인식을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는 게 관습이었다. 그렇기에 사교계에 어린 영식들과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공들여 준비하여 나오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미래의 배우자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율리시즈의 경우는 황비의 시선이 있다 보니 지금껏 영애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도 어려웠지만.’

이제 황비는 죽었다. 선대 황제인 빈센트는 반란이 일어났을 무렵 병사했다.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집안의 여식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았던 두 방해물이 사라졌으니, 율리시즈에게도 봄이 찾아올 것이다.

“하긴…… 해야겠죠.”

“해야겠죠, 가 아니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상 너에게는 후계자를 생산할 의무가 주어져. 그렇게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 약혼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율리시즈 멋대로 살게 두고 싶었지만……. 율리시즈가 황제가 된 이상 그는 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 세드릭이 행방불명된 상태이나 죽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니, 황비의 잔당이 숨죽이고 있을지 모르는 지금은 맞춰 주는 게 나았다.

창문을 따라 어스름한 새벽빛이 우리를 비췄다. 옅은 푸른색으로 물든 율리시즈의 얼굴이 유난히 힘겨워 보였다.

“제가…… 어서 결혼하기를 바라세요?”

“결혼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야. 나는 네가 안정을 찾길 원하는 거지.”

“꼭 결혼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제가 쌓아 온 업적들을 밀어붙이면 귀족들도 딴소리 못 해요. 상단이나 무역 쪽은 절 지지해 주는 귀족들도 투자해서 같이 엮여 버렸으니까. 이 외에도 자잘한 보은 같은 걸 받겠다고 하면 굳이 제 혼사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딸 가진 집안은 벌써 황후 자리 노리느라 경쟁이 치열하다고 로라가 귀띔해 주던데…….’

본인이 관심이 없다지만, 주위에서 이 미혼의 능력 좋은 젊은 황제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어떻게든 선을 보게 하고 인연을 만들어 황후를 배출하려고 노력하겠지.

구체적인 상상이 길어진다. 율리시즈가 하얀 면사포를 쓴 여성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다. 온 제국민이 두 사람을 축하하고, 나는…… 나는 저 멀리서 박수를 쳐 준다. 그리고 유람을 떠나겠다고 말하고는 죽을 자리를 찾아 사라지면 된다.

내가 떠나도 율리시즈는 괜찮다.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이 있을 테니까.

그게 맞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기뻐해야 할 상상인데 왜 이렇게 거북하지?’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심장이 욱신거려 괴로웠다.

이런 내 상태를 모르는 율리시즈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스승님께서도 결혼하시지 않으셨는데, 제자인 제가 어떻게 먼저 갑니까?”

“나는 나이가 많아. 결혼하기엔 너무 늦었지. 반면에 너는 이제 막 파릇파릇 피어나는 초목이니 가장 좋을 때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며? 나는 결혼 생각이 없는 데다가, 결혼하고 싶어도 그런 상대를 만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아니다. 사실은 조금만 더 지나면 죽을 테니 살아 있는 걸 가정하고 말한 것이다.

내 말에 율리시즈는 더 서글픈 얼굴을 했다. 뭐가 이 녀석을 고뇌에 빠뜨리는 걸까. 울 것 같은 눈매에 손을 가져가자 율리시즈가 내 손을 잡아 자기 뺨에 댔다.

서늘한 새벽빛이 닿은 피부는 차갑기는커녕 뜨거웠다.

“스승님은 제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하셨죠?”

“응.”

“만약…… 제가 바라는 행복이, 스승님을 곤란하게 하는 거라고 해도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답을 들려주세요. 제겐 그게 정말 중요해요.”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담고 간청하듯 시선을 고정했다. 율리시즈는 날 힘들게 한 적 없는 순한 아이였다. 그런 그가 바라는 행복이 날 곤란하게 할 수도 있다니.

‘그래도 괜찮지 않나.’

조금 있으면 죽을 목숨. 저 아이가 곤란하게 해 봤자 뭘 얼마나 성가시게 굴려고.

나는 흔쾌히 긍정을 표시했다.

“괜찮아. 그게 네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이라면, 그렇게 해.”

율리시즈가 내 말에 한숨을 쉬더니 대꾸했다.

“무를 수 없어요.”

“그래.”

“뭔지도 안 들어 보고 괜찮다고 하시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배웠어요, 스승님.”

“너니까 괜찮다.”

“…….”

내 말에 율리시즈는 한참 무엇을 골똘히 생각했다. 머리를 쥐어뜯는 게 엄청난 고뇌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스승님.”

“그래.”

“듣고 화내지 마세요.”

“……? 알았다.”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거지?’

이쯤 되면 나도 조금 무서워졌다. 착한 아이가 늦게 일탈을 하면 그게 더 무서운 법이라던데. 설마 율리시즈가 내가 몰랐던 새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던 건가?

“있잖아요.”

“그래.”

“전 사실 스승님을 좋아해요!”

……응?

시시하게 이게 웬 애정 고백이지?

“윈터가 시켰어? 나도 율리시즈 너를 좋아한단다.”

“흐어어어어엉.”

애를 윈터가 놀렸나 싶어 대답해 준 것이었는데, 율리시즈는 내 말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우는 거야?”

“제가, 히끅. 좋아한다는 말을 왜 힘겹게 꺼냈겠어요!”

“수줍어서?”

“아니죠! 스승님을 사랑하니까 그래서예요! 사귀고 싶고 같이 데이트를 나가고 싶고 키, 키스도 하고 싶고!”

“…….”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동상처럼 굳어 버린 나를 향해 율리시즈는 이때다 싶었는지 와다다다 자기 할 말을 다 쏟아 냈다. 고백이었다.

“어릴 때부터 쭉 스승님을 좋아했어요.”

“…….”

“망할 세드릭 자식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식 말이 맞아요. 전 스승님께서 제가 죽어 가던 순간 구해 주시고, 환하게 웃어 주셨을 때 반했어요.”

고백하는 율리시즈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다. 사랑에 설레하고, 기대하고, 애달파하는. 그냥 보통의 청년.

“가장 큰 계기는 그 사건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번번이 전 스승님께 반했어요. 어떤 날은 스승님이 제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이 감사해서 좋았어요.”

“그…… 그럼.”

“전 스승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진지하게요.”

안아서 업어서 키운 아기가 어느새 늠름하게 자라 나보고 결혼하자고 한다.

내 새끼가…… 내 새끼가아…….

“평생 잘해 드릴 자신 있습니다!”

“……이건 아니야.”

“나이 차이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스승님은 이종족 급으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초월자시니, 꾸엑!”

“안 된다고!”

머릿속이 엉망진창 우당탕탕 생각 덩어리로 폭발했다. 나는 공간의 문을 열어 그 안에 율리시즈를 집어넣었다.

“스승님! 왜요!”

“네 방으로 돌아가! 나, 나는, 너랑 좀 떨어져 있어야겠어.”

내가 허둥거리는 꼴을 본 율리시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싫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올 거예요!”

오, 신이시여.

‘제가 뭘 잘못했길래 내 새끼처럼 키운 녀석이 왜 저랑 결혼하고 싶어 하나요.’

왜!

* * *

대관식이 다음 날이라 어찌어찌 그날은 율리시즈를 피해 다닐 수 있었다. 난 공식적으로 이 나라에 묶인 사람이 아니니, 까다로운 절차를 치를 의무가 없어서 율리시즈에 비해 자유로웠다.

성대하게 대관식을 치르고, 선대 황제와 황비는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복잡한 절차를 생략해서 절약한 예산은 수도의 빈민들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의 은덕이 영원하길 빌겠습니다!”

백성들의 칭송, 귀족들의 지지, 젊고 강한 왕. 완벽한 삼박자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어.’

하지만 대관식 이후부터 율리시즈는 줄기차게 나를 쫓아다녔다. 먹이를 기가 막히게 찾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데 도망칠 재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내가 가르친 제자였으니까!

결국 율리시즈의 스무 번째 생일날, 나는 제자에게 붙잡혔다. 오늘만큼은 이 아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선물만 두고 오려다 붙잡혔다.

“스승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

“그래, 반가웠으니 이만 가라!”

공간의 문을 열어 탈출하려고 하면 율리시즈가 닫히게 만들어 오도 가도 못했다.

‘이 녀석이 언제 이런 공간 간섭 마법까지 익힌 거야?’

난 이런 거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제자의 응용력에 감탄하면서도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스승님. 스승님을 좋아합니다!”

금발의 청년 황제가 나를 보며 녹을 듯한 눈웃음을 지어 준다. 자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어엿한 성인으로 자란 청년. 그 청년이 스승을 위해 구해 온 오색찬란한 꽃다발은 청년의 눈부신 미모에 미치지 못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남자가 꽃을 한 아름 들고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너를 아껴. 율리시즈…….”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제가 스승님을 좋아한다는 건, 스승님을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연애 상대로 보고 있습니다!”

“제발…….”

“사랑합니다, 스승님! 저와 결혼해 주세요! 줄곧 스승님만을 좋아했습니다.”

꽃다발에 이어 반짝거리는 보석 반지도 준비했다니.

넋이 나가려는 걸 겨우 참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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