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클로드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째서 클로드의 육신이 오랜 시간을 겪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지에 대한 모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본인이 오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는 거 아니야?”
“포기하지 마세요, 주인님.”
“윈터 말이 옳습니다. 세진 님, 방법이 없진 않을 겁니다. 제가 다시 외부로 나가 정보를 긁어모아 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아멜리아 황녀 전하를 만나게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저는 희귀한 경우를 탐구하는 게 좋거든요.”
루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짐을 챙겨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종족들을 만나며 나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했다.
“작은 단서라도 건지게 되면 바로 돌아올게요.”
“응.”
하지만 그게 루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몇 년이 또 흘러갔지만, 루나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실종된 루나를 기다리다 지친 윈터는 어머니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시신 없는 묘를 황태자궁 정원 한구석에 마련하고, 루나가 좋아하던 백합을 바쳤다. 윈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
내 앞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내가 루나를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하지 못하게 일부러 더 의연하게 구는 거구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윈터도 울지 못하는데 나라고 울 자격이 있을 리가.
“죄송해요, 주인님.”
“아니야, 괜찮아.”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다고.’
죽음을 원했던 건 나였다. 인제 와서 살려고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지.
“대신, 율리시즈의 곁을 떠나는 걸 좀 더 앞당겨야겠어.”
가능하다면 그 애가 스무 살의 생일을 맞는 것까지 보고 떠나고자 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약속대로 율리시즈가 성인이 되는 순간,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른다. 당장 죽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걸 율리시즈가 보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율리시즈 모르게, 차근차근 떠날 때를 대비했다. 그 아이가 모를 만한 지역을 물색하고, 살아갈 여비를 따로 빼놓고, 그날이 오면 바로 몸만 이동할 수 있도록 가지고 있는 물건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터지면서 평화로웠던 일상은 무너졌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황위를 둘러싼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율리시즈의 나이가 열아홉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황제 빈센트가 병으로 쓰러졌다.
궁의의 진단으로는, 술과 쾌락을 즐기던 황제의 몸이 나이가 들면서 급격히 나빠진 것이라 했다. 한번 쓰러진 황제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지냈다.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라던데요. 시종들 사이로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럼 다음 황제는 누가 되는 것이지?”
황태자는 있으나 그건 내 의지로 밀어붙인 거래의 결과였다. 빈센트는 내내 유리를 못마땅해했으며, 그걸 숨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세드릭을 아낀 것도 아니었다.
후계자가 명확히 지명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황성 전체가 불안함에 잠겼다.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율리시즈는 모두를 모이게 했다.
“황비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다음 대의 황제로 세드릭이 지목되지 않았으니, 반역이라도 일으킬 작정인 것 같고요.”
성인을 1년 앞두고 있는 율리시즈는 그즈음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차기 황제감이었다.
세드릭은 율리시즈를 넘어서지 못했다. 율리시즈가 너무 뛰어나서였다.
부유한 동부 제독의 딸과 결국 결혼했다지만, 율리시즈가 상단을 움직여 버는 돈보단 재산 규모가 적었다. 쓰러진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보는 것도 율리시즈의 몫이었다. 황비가 볼멘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사안을 완벽히 처리하는 율리시즈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뿐 황제의 역할을 이미 수행 중이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밤, 율리시즈가 나를 찾아왔다.
“카밀라는 세드릭을 앞세워 반역을 일으킬 거예요.”
“네가 다 이긴 싸움 아니야?”
“스승님, 형세가 기울었다고 해서 황비가 포기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지금의 너랑 싸우는 건 바보짓이야. 반역을 일으킨다고 해도 위험이 너무 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빌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모든 것을 걸고 저를 죽이려 하겠죠.”
율리시즈의 정보망에 황비의 움직임이 훤히 읽혔다. 카밀라는 황제가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사돈인 동부 제독의 사병을 일으켜 황성을 차지하고 율리시즈를 처리해 세드릭을 황제로 만들 계획이었다.
더는 물러날 구석이 없는 황비가 던진 최후의 수였다. 반역을 일으키는 것.
“그렇겠지. 율리시즈 너만 없어지면 세드릭만 남을 테니까.”
그렇지만 헛된 꿈이었다. 율리시즈는 부와 명예, 군권까지 휘어잡았다. 지난 몇 년간 황태자로서 귀족들에게 쌓아 올린 신뢰의 이미지는 굳건했고,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꾸준히 불어났다.
민심조차 율리시즈의 편이었다. 세드릭에게는 그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조차 없었다. 카밀라만이 자기 아들을 황좌로 올리고 싶어 했다.
“급하긴 했나 봐. 율리시즈, 내게 어제 세드릭이 찾아왔었어.”
내 말에 유리가 입매를 굳혔다.
“그 자식이 무슨 행패라도 부렸나요, 스승님께?”
“아니. 애원하더라고.”
“뭘요?”
“널 버리고 자길 선택하라고 했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테니 대신 나보고 널 죽이라고 하더라.”
웃기지도 않는 요구였다. 카밀라는 이미 실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아들이 저리 멍청하게 자랄 수 있을 리가. 능력이 받쳐 주지 않아 기껏 생각해 낸 게 이런 형편없는 애원이라니. 세드릭이 내릴 수 있는 결정 중 가장 최악의 선택지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거절했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오만상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답하자 율리시즈는 좋아했다.
“스승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니까요?”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구나.”
내 말에 율리시즈는 잠시 숨을 멈췄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반응하길래 나는 얘가 왜 이러지 싶었다.
“내가 너를 맡아서 보호하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러게요.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율리시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이 전부 율리시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왜 저런 표정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디 아픈 거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잊어 주세요. 괜찮습니다.”
열이라도 나는지 보려고 이마로 손을 뻗자, 율리시즈는 한 걸음 물러나며 이를 사양했다.
“저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스승님.”
“그래, 다 컸지. 그러니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요지를 확실히 하는 게 어떨까?”
몰라서 물어본 질문에, 율리시즈는 쓰게 웃었다.
“세드릭과의 싸움이 끝나면 드릴 말씀이 있어요.”
“궁금한데.”
“다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푹 쉬세요.”
율리시즈가 우산을 펼치고 빗길 아래로 걸어갔다. 나는 율리시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내 몸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야.’
깨져 버릴 유리처럼 몸에 자잘한 실금이 더 생겼다. 마력이 빠져나가는 양이 늘었다. 간혹 이유 없이 마른 밀짚 인형처럼 쓰러지는 순간이 생겼다.
나는 움직이기 귀찮다는 핑계를 대며 외출을 자제했다. 내가 약해졌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황비가 알게 되면 이걸 노려 나를 죽이든지, 인질로 삼든지 둘 중 하나는 실행할 거야.’
율리시즈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방에 보호 결계를 치고 잠을 자며 흩어지는 마력을 주워 담으려 했다.
초대한 적 없는 불쾌한 손님만 오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이 가 줘야겠습니다, 대마법사님.”
세드릭이 내가 머무는 곳으로 쳐들어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술사의 부적을 두 손에 칭칭 동여매고서. 부적에 감긴 손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흉했다.
“거절한다.”
“왜! 왜 나는 안 되는 겁니까!”
세드릭은 내 거절에 발광했다.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르는 마력 구속구를 가져와 내게 채우고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려 했다.
예전이었다면 그깟 구속구 따위, 단번에 가루로 만들고 세드릭의 얼굴을 뭉개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그어진 실금은 점점 더 그 개수가 많아지고 커졌다. 틈 사이로 마력이 줄줄 샜다. 그래서 마력 구속구를 찼을 때 나는 일시적으로 무장 해제 상태가 되었다. 마법을 못 쓰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대마법사, 당신 약해지고 있었구나.”
“헛소리.”
“곧 죽을 위기에 처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세드릭은 내 이상을 눈치채고 날 끌고 가려 했다. 힘을 잃은 나는 최고의 인질이었으니까. 율리시즈가 나를 끔찍이 여기는 걸 아니 나를 패로 삼아 상황을 뒤집어 보려 하는 것일 테다.
“내가 약해졌어도 너 같은 놈한테 발목 잡힐 수준은 아직 아니야.”
나는 다소 힘겹게 구속구를 뜯어내고, 세드릭을 마법으로 때려눕힌 뒤 경고했다.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율리시즈에게 투항해. 그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걸.”
“나와 내 어머니는 율리시즈의 원수일 텐데? 그가 우릴 살려 줄 턱이 없잖아. 대마법사,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계란 껍질이 벗겨지듯 몸에서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안 돼. 육신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대화도 시도해 보지 않고 단정하지 마.”
“늦었어. 나와 내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날 설득하려거든 죽이는 게 나을걸.”
‘젠장. 하필이면 지금……!’
몸이 욱신거린다. 통제를 벗어난 육신이 허물어졌다. 세드릭이 입가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율리시즈가 졌어.”
세드릭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