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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4화 (44/90)
  • 44.

    지난 삼 년간 소소하고도 큰 변화가 여럿 있었다.

    첫째, 아멜리아가 독립된 궁을 황제에게 하사받았다. 관심이 눈곱만치도 없었으면서 뒤늦게 생색만 내는 꼴이었다. 오랜만에 용의 피를 각성한 황족에게 황제는 썩 너그러웠고, 아멜리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기만의 궁을 가지게 되었다.

    “괜찮겠어요, 황녀님?”

    아멜리아가 갓난아기일 적 내가 데려올 때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사람인 로라가, 이제는 아멜리아를 앞장서서 걱정하며 보내기 힘들어했다.

    “괜찮아, 로라! 어차피 황성 안이잖아. 나 달리기도 빠르니까,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올게.”

    “언제 이렇게 자라셔서는…….”

    로라는 친딸처럼 아멜리아를 대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가며 아멜리아가 독립하는 걸 아쉬워했다.

    “가서 시중드는 사람들만큼은 신중히 뽑으세요. 중도파를 지키는 귀족들 중에 이 가문들의 사람들이 황녀님께 적합할 거예요.”

    “오, 고마워. 로라!”

    “그리고 황녀님이야 감각이 예민하시니 알아서 잘 피하시겠지만, 독은 정말 조심해야 해요. 황녀님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식약재료에 대한 건 루나가 정리한 사전이 있으니, 시녀장을 들이거든 그것부터 익히게 하시고요.”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두꺼운 사전이 아멜리아의 손에 쥐어졌다. 루나는 흐뭇하게 아멜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후후. 아멜리아 황녀님은 아주 희귀한 반인반룡의 후손으로서 기록할 점이 많았지요. 함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칭찬 맞지? 나도 고마웠어, 루나.”

    힘을 자각한 후 아멜리아는 루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루나의 지식을 바탕으로 반쯤 각성한 용의 힘을 통제하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데에는 그녀의 공이 컸다.

    그 덕에 루나 역시 아멜리아를 각별하게 여겼다.

    “그 연약하던 꼬맹이가 저렇게…….”

    “사탕만 찾던 애가 어엿한 황족이 되셨다니.”

    페른과 윈터는 가짜로 우는 척하며 마지막까지도 아멜리아를 놀렸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만하고 다들 이제 보내 줘! 나도 새 궁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 주면 가장 섭섭해할 게 누군데.”

    “율리시즈 오빠!”

    황태자로서 필요한 업무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사교계의 인사들과 교류를 시작한 율리시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처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심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며 엘리엇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도, 내게 마법을 배우는 것도 놓지 않아서 이러다 황제가 아니라 용사가 되러 가도 될 정도였다.

    “자, 이거 오다 주웠다.”

    “이게 뭔데? 혹시 도롱뇽 알 같은 건 아니겠지?”

    유리와 아멜은 친남매처럼 투닥거리며 자랐다. 둘은 서슴없이 서로에게 장난을 치는 사이가 되었다.

    “헉. 이거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한 활이잖아? 그것도 마력을 이용해 아티팩트로 개조한 거!”

    “독립 축하 선물이야.”

    “오빠는 최고야. 짱이야.”

    “선물받을 때만 최고라고 치켜세우지.”

    율리시즈는 정말 똑똑하고, 타고난 운도 좋은 아이인 것 같았다.

    ‘스승님! 저 이 금광에 투자하고 싶어요!’

    어느 날, 신문지 한 귀퉁이를 오려 오더니 투자를 하기 위해 내게 돈을 꾸고 싶다고 했다.

    ‘윈터, 나 돈 많던가?’

    ‘차고 넘치시죠. 죽을 때까지 다 쓰셔도 남을 겁니다.’

    ‘그럼 유리한테 좀 빌려줘. 무이자로. 안 갚아도 된다고 하고.’

    황태자 개인에게 책정된 예산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건 황비나 황제에게 알려질 것 같아서 내 사비를 이용했다. 나도 정확히 얼마가 있는지 모르는 클로드의 재산은 어마어마해서, 금광 정도야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유리에게 돈을 빌려줄 때,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유리는 부득불 배로 이자까지 쳐서 갚을 거라고 했다.

    ‘유리, 그러다 너 호구로 찍혀.’

    ‘안 그래요! 스승님이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래, 그래.’

    윈터가 차용증을 만들어 줬지만, 난 그걸 찢어 버리고 아예 잊었다.

    그런데 세상에, 몇 달 뒤 율리시즈가 사들인 그 금광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 금광에서 난 돈으로 다른 투자처를 몇 개 알아봤는데 넣는 데마다 족족 대박이 터졌다. 마력석이면 마력석, 동쪽에서 나는 비단과 향신료 등 황금의 손을 가진 것처럼 율리시즈는 시장을 휩쓸었다.

    이런 건 원작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어서, 나는 부자가 된 율리시즈를 보고 감탄했다.

    “와…… 유리. 너 운이 정말 좋구나.”

    “스승님께서 준 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충분한 자금을 모았다 느낀 율리시즈는, 이후 그 돈으로 자기 사람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아카데미에 장학금을 기부하거나, 상단을 차려 독자적인 자금 유통 경로를 마련하고, 잘될 싹은 보이나 가난하여 정계에 진출하기 어려워했던 지방 귀족에게 후원하기도 했다.

    ‘이거…… 너무 잘 살아서 딱히 내 보호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는걸.’

    뭐가 기폭제가 된 것인지는 몰라도, 율리시즈는 하루를 알뜰하게 쪼개서 굳건한 자기 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예전에야 귀족들이 율리시즈를 무시했지만, 현재는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선다.

    “율리시즈.”

    “네, 스승님.”

    “솔직히 말해. 너, 인생 2회차지?”

    심지어 회귀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이런 내 질문에 그게 뭐냐며 갸웃거린 걸 보면 아닌 듯했지만. 너무 날개 돋친 것처럼 시원시원하게 일을 벌이고 성공하니 무서울 정도였다.

    ‘이렇게 잘될 수 있는 애였는데, 원작에서는 비참한 엔딩이었다니.’

    이젠 클로드가 내게 억지로 읽게 만든 책 내용이 꿈처럼 여겨졌다. 승승장구하는 율리시즈와 달리, 황비 일파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카밀라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카밀라가 나이를 먹고 늙어 감에 따라 외모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더 젊고 어린 여자를 골라 정부로 삼았고, 여럿을 갈아 치웠다.

    “저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네 미모가 쇠하면 짐의 관심도 떨어질 것이라는 걸.”

    황제와 황비의 사이는 나날이 멀어졌다. 새로 들어온 황제의 정부들은 천한 신분이었던 카밀라를 무시했다. 총애가 떨어진 황비는 무서울 것도 없다면서 세드릭도 홀대했다.

    점차 카밀라는 세력을 잃어 갔다. 눈부시게 빛나는 율리시즈에게로 대다수의 황비파 귀족들이 빠져나갔다. 율리시즈는 그들을 받아 주는 척하다 적당히 단물만 빨아먹고 흡수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작아져 보여요.”

    율리시즈는 종종 내게 그런 말을 했다. 한때 황후를 독살하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여자는 이제 늙고 힘이 빠진 뱀이 되었다.

    아직 눈에 서린 독기는 형형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카밀라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세드릭이 귀한 약재를 구하다 먹여도 통 낫지 않아 진통제를 달고 산다고 들었다.

    “그래도 완전히 추락하지는 않았으니 제가 복수할 거리는 남겠죠.”

    세드릭은 약혼했다. 황비를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인 동부의 제독의 딸과 일찍 약혼을 치렀다.

    제독의 딸은 박색에 성격이 포악하여 혼처 찾기 글렀다고 알려졌으나, 그 아비인 제독이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이 막대하여 세드릭은 그녀와 약혼했다.

    제법 번듯하게 잘생긴 세드릭을 본 제독의 딸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요새는 결혼하자 보챈다고 했다. 세드릭은 결혼을 최대한 미루며 뒤로는 수많은 여자들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헤헤. 제가 정보 사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요.”

    “유리가 너무 무섭게 잘 자랐어. 스승님은 할 게 없어서 은퇴해도 되겠어.”

    “안 돼. 스승님은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셔야죠. 저 혼자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율리시즈는 조금 컸어도 여전히 나를 잘 따르고, 좋아했다. 몇 년만 더 지나면 키도 덩치도 훌쩍 커서 나를 능가할 것 같다.

    ‘시간은 놀랍도록 빠르게 흐르는구나.’

    20년. 너무 긴 시간일 줄 알았는데 율리시즈를 보고 있으면 세월이 손에 담긴 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실감 났다.

    “네가 너한테 마법 가르칠 것도 이젠 없는데 스승이란 직함으로 불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부지런히 검술과 마법을 배우던 율리시즈는 이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다 배워서였다. 검으로는 검기를 만들어 내고, 마법으로는 웬만한 마탑 중급 마법사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는 실력자가 되었다.

    난 은퇴해도 되겠다, 싶어 말한 거였는데 율리시즈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스승님이 옆에 있어야 제가 행복해요!”

    “왜? 뭐가? 어떤 점이? 구체적으로 말해 봐.”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던진 질문이었는데, 소년 황태자 씨는 아무 말도 못 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 있어요! 그런 게!”

    ‘없네. 없어.’

    쟤가 얼마나 똑똑한데. 답을 못 낼 리가. 자기가 생각해도 이젠 내가 필요 없어지니까 저러는 거겠지.

    “아멜리아도 네가 알아서 경비 다 챙겨서 에슬라 아카데미로 유학 보냈잖아.”

    “그거야 스승님이 빌려주신 초기 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너는 나한테 돈을 몇 배로 불려 주고 싶어서 빌린 것 같다만.’

    그때 빌린 돈은 이자가 두툼하게 붙어 돈이 썩어난다는 내 명의의 은행 통장에 쌓인다고 했다. 난 말만 스승이지 날백수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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