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는 한없이 불행하기만 했던 소년이 지금은 나를 보고 웃는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표정을 짓는 율리시즈를 보면 내가 어쩌다 보니 더 살아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삶 같았다.
금빛의 애늙은이 황자님이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제 곁에 계실 거니까요. 그렇죠?”
“응. 그렇지.”
‘이건 거짓말이잖아.’
‘약속’의 유효 기간은 율리시즈가 성인인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이후의 2년은 내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기간이다.
‘나는 네 곁에 영원히 있어 줄 수 없어.’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차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거 아세요? 스승님이 계셔서 제 세상은 환해졌어요. 황성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있어도, 저를 사랑해 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해요.”
“…….”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 물으신다면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뭔데?”
율리시즈가 나를 꼭 껴안았다. 어린아이의 품은 작아 내 머리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제 미래에 스승님이 계속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로라랑, 윈터랑, 아멜이랑, 엘리엇 할아버지랑. 다 같이 즐겁게 웃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면 해요.”
‘아아.’
심장 위에 새겨진 시계 모양의 인이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미안해, 율리시즈.’
그 소망은 내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들어줄 수 없는 거야.
다른 건 다 들어줄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나는 네가 스물두 살이 되면 죽어서 사라졌을 테니까.’
그게 클로드와 나의 계약이니까. 내 시체는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가루가 되어 사라질 거야.
몸은 어떠한 고통도 없이 천천히 금이 가 부스러질 거야. 풍화되어 가는 돌의 시간을 조금 빨리 돌린 것처럼.
‘내가 바란 죽음이었는데.’
왜 우리가 영영 함께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너를 보면 이렇게 숨이 막힐까.
어째서 이다지도 못된 짓을 저지른 것처럼 고통스러울까.
“뭐야. 페른이랑 데이지는 안 끼워 줘?”
너에게 고통이 될 진실을 도저히 꺼낼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 앞에서 최대한 멀쩡한 어른인 척을 하며, 믿음직한 지지대로서 기능하다 적절한 때에 사라져 주는 것.
“으음, 좋아요. 그 두 사람도 스승님을 좋아하니 끼워 줄게요! 인심 쓴 거예요.”
“좋아. 얄미운 페른을 놀릴 거리가 생겼네. 데이지도 고소해할걸. 제 주인을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햄스터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윈터한테도 알려 주는 게 어떨까요?”
“윈터라면 페른 눈에서 눈물이 쏙 나도록 비꼴 수 있을걸…….”
우리는 마주 보고 후후 웃었다.
황위 계승권이니, 복수를 한다든지,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너무 매몰되지 않도록.
‘있잖아, 유리.’
원작이 거의 틀어지고 있으니, 너는 폭군이 아니라 성군이 될 거야. 제위에 오르기로 한 이상 너는 허투루 시간과 재화를 쓸 사람이 아니니, 국정을 성실히 운영하겠지.
벌써 너라는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네 편에 서려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네 곁에 모여들 거야.
그중에는 네가 마음을 다해 사랑할 사람도 있겠지. 나보다 더 훌륭하고, 네 곁에 오래 있어 줄 사람이 분명 나타날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네 곁을 지키다가, 때가 되면 약속된 나의 죽음을 맞으러 갈 거야.
네가 나의 죽음을 그나마 덜 슬퍼하게 될 순간에.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벌써 하루의 해가 저물어 간다. 나는 유리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자, 궁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윈터에게 오늘 저녁은 핫케이크를 층층이 구워 달라고 해야겠어.”
“그건 제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오랜만에 스승님께서 깨어나신 건데, 스승님께서 먹고 싶은 걸 드셔야죠.”
나의 작은 별 같은 선량한 어린 황자님.
“자고로 스승이란 존재는 제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양껏 먹으면 그것만 봐도 배가 부른 법이거든.”
“에이, 그건 그냥 스승님께서 절 아끼셔서 그런 거잖아요!”
“들켰네. 어떻게 알았어?”
“다 알걸요. 스승님은 너무 티가 나요.”
다행이다.
내가 너에게 언젠가는 떠날 거란 사실을 숨길 수 있어서.
나는 네가 상처받고 슬퍼할 모습을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런가?”
유리의 곁에 남아 있는 시간 동안은 원 없이 웃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혹시라도 나를 떠올렸을 때 웃는 모습만 남도록.
“…….”
“응? 유리? 왜 갑자기 표정이 멍해?”
“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뭐야. 싱겁기는. 많이 배고프구나? 얼른 궁으로 가자.”
나는 공간의 문을 열어 빠르게 귀가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윈터가 초장부터 잔소리를 퍼부었다. 음식은 잔칫상처럼 차려 놓고는, 식으면 어쩔 뻔했냐며 나를 마구 갈궜다.
“미안, 미안. 유리랑 이야기 좀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네.”
“흥. 패밀리어도 좀 챙겨 주시죠. 저도 주인님께서 잠들어 계신 동안 많이 걱정했다고요.”
“응. 윈터 착한 거 나도 잘 알지.”
“……놀리지 마시죠.”
“왜? 윈터. 좀 솔직해지렴. 네 꼬리가 기분 좋을 때 파닥거린다는 걸 엄마인 내가 모를 줄 아니?”
“엄마는 조용히 해 주세요……. 아들 편을 들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집주인과 이곳의 실세인 분의 편이라.”
루나는 황태자궁에 남기로 했다. 방이야 남아돌고, 식구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예산에 문제 될 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윈터는 질색했지만.
“독립한 지 몇십 년 만에 다시 엄마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니. 이런 패밀리어는 세상에 저밖에 없을 거예요!”
“클로드 님, 제게 윈터의 아주 귀여운 순간을 콕 집어넣은 영상 아티팩트가 몇 개 있사온데…….”
“취소. 취소.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윈터가 기분이라고 잔뜩 차려 놓은 산해진미를 먹으며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당장의 걱정거리 따윈 내려놓고,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리면서.
‘언제나 이렇기만을.’
나는 간절히 바랐다.
* * *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이었으나, 내 주위의 어른들은 늙어 가고,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저, 여기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요.”
율리시즈가 열세 살, 아멜리아가 열두 살이 되는 해였다. 돌연 아멜리아가 바다 건너 나라인 에슬라의 아카데미로 진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멜리아가 내게 건넨 학교 홍보 책자를 율리시즈가 중간에서 낚아챘다.
“왜 하필 이 나라야? 너무 멀잖아. 아멜, 윈프리드 제국 내에도 훌륭한 아카데미는 있어.”
“거긴 철저히 귀족들만을 위해 세워진 기관이잖아. 에슬라에 있는 아카데미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든 시험을 쳐서 들어가.”
“그래서?”
“나는 그런 곳에서 공부하고 싶어. 거기엔 멋진 인재들이 많을 거야!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고, 신분을 가리지 않는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곱슬거리는 붉은색 아래로 점차 짙어지는 금빛 머리칼, 짙은 녹색과 금색의 눈을 가진 어여쁜 소녀로 성장한 아멜이 유리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아멜리아 샬롯 윈프리드, 너…….”
“제발. 오빠. 나 여기 가고 싶어, 응?”
“위험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리가. 내가 나한테 까부는 놈을 패면 팼지, 당하진 않으리란 걸 오빠도 잘 알 텐데?”
“잘 아니까 그렇지.”
“율리시즈 오빠!”
빽 소리를 지른 아멜이 내게 달려와 등 뒤로 숨었다. 그리고 유리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참나. 클로드 님! 유리 오빠가 저 놀려먹어요!”
“재밌잖아.”
“얘들아……. 싸우지들 마라…….”
“그렇지만 오빠가 또 먼저!”
“그래그래. 유리가 또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율리시즈, 동생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 스승님이 몇 번을 말했지?”
“962번이요.”
어…… 대답하라고 낸 질문이 아니었는데. 율리시즈는 이상한 것까지 기억을 잘했다.
“……그걸 설마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 진짜면 오빠 소름 돋아. 으으.”
“진짠데? 난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은 전부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니까.”
“우웨엑. 클로드 님, 도망가세요. 오빠는 틀려먹었어요! 언젠가부터 사람이 버터만 처먹은 것처럼 느끼해졌어!”
아멜리아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날 들고 율리시즈에게서 멀어졌다.
올해 열두 살인 아멜리아는 힘이 장사여서, 더 키가 큰 나를 가벼운 손가방 들듯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얘들아. 963번째로 부탁할게. 둘이 제발 사이좋게 대화로 풀면 안 되겠니?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날 중간에 끼워서 고래 사이에 갇힌 새우 신세로 만들지?”
“스승님도 따지면 고래 아닌가요? 새우라뇨. 새우는 약하고 말랑말랑하잖아요. 새우가 들으면 놀랄 거예요.”
“오빠는 좀 입을 다물 필요가 있어! 귀족들 앞에선 서릿발보다 차가운 사람이 이렇게 장난치길 좋아한다는 걸 우리만 안다니. 수많은 영애들은 절대 안 믿어 줄 거야.”
‘그래. 나도 잘 안 믿긴다.’
너희 둘 다 이렇게 개구쟁이로 자랄 줄은 정말 몰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