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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2화 (42/90)
  • 42.

    “유리, 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세드릭에게 사과를 받았고.”

    “네. 스승님.”

    “응징도 했고.”

    애들은 세드릭에 대한 응징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는 말을 끝까지 안 해 줬다. 착한 아이들이 화가 나면 더 무섭다더니. 상쾌한 표정을 봐서는 세드릭에게 우리 애들이 겪었던 일보다 더한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마법으로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밝히길 꺼려 하는 것 같으니 묻어 두자.’

    율리시즈나 아멜리아나, 내가 두 아이들의 보호자다 보니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강했다.

    이전에는 착하고 성실한, 평범한 어린아이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세드릭이 벌인 사건으로 인해 조금 엇나간 것 같기는 하다만……. 워낙 이 윈프리드 제국 황성이 콩가루 집안이어서 내가 뭐라고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이게 황실이냐. 정글이지.’

    현 황제가 반란 일으키기 전에는 평화로웠다던데, 이번 대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기라도 하는지 살벌했다.

    “이번 일로 깨달았어요. 아멜리아와 전 세드릭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걸요.”

    “맞아요, 클로드 님. 2황자는 지금쯤 유리 오빠와 저를 갈아 마시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걸요?”

    유리와 아멜은 이 상황을 체념하고 받아들인 것인지,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

    아멜리아의 말투가 이전과 비교했을 때 제일 달라졌다. 아멜은 더는 단것을 더 달라 보채지도 않고,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루나의 말로는 황족의 혈통에 흐르는 용의 피가 불완전 각성을 이루어서라고 했다. 축하할 만한 기적이라고 루나는 꼬리를 파닥였지만, 애들이 충격받고 넋이 나갔던 때를 생각해 보면 절대 축복은 아니었다.

    “내가 깊게 잠든 사이 이거 말고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며.”

    “아, 네. 황위 계승권 때문에요.”

    유리가 그 주제를 언급하기 상당히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윈프리드의 황위 계승권은 정식 절차로 인정받은 황족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황실 혈통을 이어받은 황족이어야 하고, 적법한 법적 절차를 밟아 혼인한 이가 낳은 아이어야 했다.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가 후계자로 지목받기 더 유리했다. 반드시 부모로부터 미들 네임을 받는 것까지 마쳐야 황위 계승권이 부여되는 황족이 될 수 있었다.

    현 세대의 황족들은 황제로 등극한 빈센트가 싸그리 숙청하면서 빈센트의 자식들밖에 남지 않았다.

    황태자인 율리시즈는 신원이 확실하니 통과. 2황자인 세드릭은 비록 황후는 아니나 그에 준하는 황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조건을 충족했기에 이 역시 통과.

    애매한 건 아멜리아였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용의 피를 각성하면서 예외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오래도록 나오지 않던 각성자였기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즉각 아멜리아에게 황위 계승권을 내려 줬다. 단순히 자기 혈통이 우수한 걸 증명하니 좋은 모양이었다.

    딸이라고 해서 거들떠도 보지 않을 땐 언제고, 황녀에게 힘을 실어 주려 하자 귀족들도 어느 줄을 잡아야 하나 살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저는 제 오라버니이신 율리시즈 황태자 전하께 목숨을 빚져, 그분을 위해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2황자인 세드릭은 절대 후계자로 지목받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아멜리아의 단호한 결정에 세드릭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술렁였다.

    ‘이렇게 되면 황태자 쪽이 훨씬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니오?’

    ‘대마법사가 1황자 전하를 지키기 위해 놓은 수라고만 생각해서 실질적으로는 허울뿐인 자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황태자궁의 동향을 면밀히 살펴야겠소.’

    ‘돌아가신 황후 폐하로 인한 원한이 있을 텐데,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 보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걸 재고해 봐야겠군.’

    아무 힘도 없던 황녀 아멜리아가 용혈 각성으로 급부상하면서 황비 일파는 입지가 좁아졌다.

    더구나 세드릭이 율리시즈에 비해 학업이나 검술 성취가 낮다는 것까지 알음알음 퍼지자, 다음 대의 황제로는 현 황태자가 낫지 않냐는 의견이 확산됐다.

    “그 아이가 세드릭의 앞길에 방해가 될 줄 알았더라면 살려 두지 않을 것을…….”

    카밀라는 반성보다는 후회를 했다. 그녀는 분하고 억울했으나 자신이 버린 딸이 또 세드릭을 찾아올까 두려워 숨을 죽였다.

    이 사실이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사리에 밝은 일부 가문들은 아예 황비 지지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위해 보내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새로운 줄에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에 보낸 뇌물들이 황태자궁으로 줄을 이었다. 진귀한 특산품을 비롯한 각종 사치품들이 황태자에게 바쳐졌다.

    “……셀레스틴 황후 폐하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도움의 손길 한 번 내민 적 없던 인간들이…….”

    몰려든 선물들을 보며 로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율리시즈나 아멜리아 역시 그 선물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전부 반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사들은 꾸준히 생겨났다.

    이로 인해 카밀라가 궁지에 몰린 건 나쁘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귀족들의 면모에 율리시즈는 씁쓸해졌다.

    “저는 변한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이제 멋대로 제게 황제가 되길 바라며 기대를 품고 있어요.”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가 가진 배경과 가치는 훌륭하니까.’

    유서 깊은 피델리움 백작가의 혈통, 황후의 아들이라는 정통성, 그리고 율리시즈 개인이 가진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두뇌.

    ‘그리고 대마법사라는 뒷배까지 더해졌으니 귀족들이 판돈을 이쪽에 거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원작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거기선 율리시즈가 카밀라에게 매일 학대만 당하며 살았으니까.

    황자다운 대접은커녕 그날 끼니를 때우는 것도 어려웠다. 꾀죄죄하고 못 먹어 말라비틀어진 율리시즈를 귀족들은 못 알아보거나 조롱했다.

    그 이야기는 세드릭과 카밀라가 행복해지기 위한 무대였다.

    복잡해지는 생각을 저리 치우고, 나는 유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유리?”

    고작 일곱 살의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겪고 깨달은 아이의 눈은 닳아 있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나는 설령 네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해도 기꺼이 들어줄 거야.”

    나는 너의 행복을 바라며 온 것이니까.

    내 죽음을 위해서 너의 삶을 지켜야 한다면, 너의 행복도 겸사겸사 챙기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정이 들어 버려서 율리시즈가 불행해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두고 볼 생각도 없었고.

    내 말에 유리가 웃음을 빵 터트렸다.

    “농사요? 하하, 그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네가 농사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는 겪어 본 적 없으니까.”

    ‘여기 시대 배경이 서양 중세……랑 근대랑 판타지를 섞어 놓은 짬뽕이니 농사는 아마 중세 쪽에 가까우려나.’

    그러면 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노동력이 들어갈 텐데, 나는 유리가 손에 흙 묻히고 사는 건 반대였다.

    겨우 목숨 부지하며 살아온 아이가 기왕이면 풍족한 부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유리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스승님. 농사도 지어 보셨어요……?”

    “아, 아니. 직접 지은 건 아니고, 들어 보기만 했어.”

    “그랬군요. 흠…… 모르겠어요. 무엇을 하며 살면 좋을지 결정하기에 전 아직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요?”

    산들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리의 진한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팔랑팔랑 흔들렸다. 아이의 보랏빛 눈동자는 고뇌에 차 있었다.

    “너 정말 애늙은이 같아, 율리시즈.”

    “이젠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예요.”

    “애들이 애들답게 커야 하는데. 어휴…….”

    역시 황실은 터가 안 좋은 곳 같다. 마음 같아서는 애들 데리고 여길 떠나고 싶었다.

    “있잖아, 유리.”

    “네. 스승님.”

    “너는 이 윈프리드 제국을 떠나고 싶니?”

    내 질문에 유리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가 대답해 주기를 느긋하게 기다리자, 잠시 후 유리가 내게 말했다.

    “떠나고 싶었던 적은 수없이 많았어요. 스승님과 외조부께서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해 주셨을 때, 아멜리아가 크게 다칠 뻔했을 때, 지금처럼 귀족들이 이득을 좇아 모여드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스승님과 같이 여기를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 역시 그랬구나.’

    “네가 나가고 싶다고 말만 해 주면 내가 들어줄 수 있어.”

    기억을 지우는 대규모 마법을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율리시즈는 완전히 자유로워져 어딜 가도 상관없겠지.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의미 있는 존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다시 질문할게.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유리?”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는 마법사 앞에서 아이는 골똘히 고심한 답을 내놓았다.

    “나가고 싶은 적은 많았지만…… 역시 그건 관둘래요. 스승님,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어머니인 셀레스틴을 죽게 한 자들에 대한 복수.

    “그걸 이루기 위해서라도 저는 도망치고 싶진 않아요. 힘들지만, 스승님께서 곁에 계시니 저는 외롭지 않아요.”

    유리의 자색 눈동자가 나에 대한 믿음으로 올곧게 빛났다.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그런 나를 너는 믿고 이곳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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