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0화 (40/90)

40.

루나의 말에 아멜리아는 심각한 병에 걸린 것처럼 오들오들 떨며 물었다.

“불완전한 각성이면 안 좋은 거 아닌가요?”

“아니죠. 윈프리드 제국 황가에 전해지는 반인반룡의 피가 대를 이을수록 옅어진 점을 생각하면 이건 기적에 가깝습니다.”

“……정말요?”

“네. 각성하면 전설 속 초대 황제처럼 두 눈과 머리카락이 진한 금색으로 물든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었네요. 몸을 움직여 보세요. 예전과 다르게 가뿐할 거예요.”

아멜리아는 루나의 말대로 몸을 일으켜 팔다리를 크게 휘저어 보았다.

“몸이 엄청 가벼워요!”

‘그리고 힘이 넘쳐흘러!’

연약했던 지난날이 무색할 만큼 아멜리아의 몸 상태는 튼튼해졌다. 여름의 초목만큼이나 생기가 가득해진 아멜리아는 폴짝폴짝 뛰며 이 현상에 신기해했다.

아멜리아가 발을 구를 때마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떠올랐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온몸에 기운이 넘쳤다.

시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아멜리아는 보통 인간의 시야보다 더 길고 넓은 범위도 가까이서 보듯이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황태자궁 정원을 기어가는 개미가 과자 알갱이를 지고 이동하는 것까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향상됐다.

“사, 사람이 아니게 된 것 같아요.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아멜리아는 기뻐하면서도 불안해했다.

“황녀 전하, 괜찮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용의 피가 활성화된 까닭이니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나가 갈색 앞발로 아멜리아를 토닥였다. 로라는 아멜리아가 좋아하는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저는 나쁜 아이인걸요. 저 때문에 유리 오빠가 많이 다쳤어요. 클로드 님께선 많이 화가 나셨고요. 이런 행운을 받을 자격이 제게는…… 없는 것 같은데.”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신나던 것도 잠시, 아멜리아는 율리시즈가 죽을 뻔한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단것도 전부 물렸다. 다리를 모은 채 옹송그린 자세로 울적해하는 아멜리아에게 루나가 안경을 고쳐 세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황녀 전하, 강한 힘을 가지게 되면 좋은 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루나가 악동처럼 씩 웃었다.

“강자가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지켜 줄 수 있게 됩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풀이 죽어 계시지만, 용의 피가 가지는 힘은 막대합니다. 거의 소실될 뻔했던 황족의 권능이 발현되었으니, 황녀 전하께서는 이제 당당히 황위 계승권자로도 인정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아요.”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게 된 순간부터 황위에는 욕심이 없었는걸.’

아멜리아가 원하는 건 만인지상의 자리가 아니었다.

“흠, 그럼 이 힘으로 뭘 하고 싶은지 정말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저는 아닐 것 같은데.”

“어……. 혹시 저 힘도 많이 세졌나요?”

“마력이 아니라 순수한 육체의 힘을 말하시는 거라면,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은 거뜬히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해지셨습니다.”

루나는 마법사와 패밀리어 외에도 요정족이나 희귀한 이종족들을 치료하러 다니며 다양한 경우를 접해 봤다.

윈프리드 제국 황실 같은 경우에는 문헌을 통해 연구한 게 다였지만, 고문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멜리아를 순수히 힘으로 이길 인간은 제국 내에 없으리라.

“지, 진짜로요?”

“정 시험하고 싶으시거든, 아무 나무나 골라 주먹으로 내리쳐 보시죠. 황태자 전하와 클로드 님이시라면 나무 하나쯤 없어져도 개의치 않으실 것 같거든요.”

루나의 말대로 밖으로 나선 아멜리아는 자기 키의 두 배가 넘는 나무를 골랐다.

‘이상하다. 이 나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져.’

아멜리아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고, 바람 소리와 함께 꽂힌 주먹은 나무를 두 동강 냈다.

우지지지직. 나무가 정확히 반 토막이 났다. 쪼개진 윗부분은 저 멀리 날아가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어…… 어어……?”

“호오, 역시 기록이 사실이었군요. 불완전하게 각성해도 이 정도의 힘이라니.”

루나는 즐거워하며 이를 기록했고, 아멜리아는 떡 벌어진 제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로라도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만 봤다.

“황녀 전하의 방에 있는 가구들을 전부 튼튼한 것으로 교체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러진 않아도 될 겁니다. 황녀 전하께서 힘을 쓰고 싶을 때만 발휘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황태자궁이 황녀 전하 때문에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네에.”

아멜리아는 두 동강 난 나무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로라에게 부탁했다.

“로라. 나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 좀 도와줘.”

“어디 나가시게요?”

수줍고 소심한 아멜리아가 먼저 뭔가를 해 보고 싶다고 청하는 적은 거의 없었기에, 로라는 아이가 무엇을 말할지 궁금해했다.

아멜리아가 내놓은 답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황비궁으로 갈래.”

“네?!”

“루나가 그랬잖아. 강해지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된다고. 나는 어제 약속했어. 나를 구해 준 율리시즈 오빠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클로드 님께 말했어.”

노을이 지는 것 같은 오묘한 색의 머리카락과 오드아이를 가지게 된 소녀는 기뻐했다.

“세드릭, 아니 2황자와 황비에게 복수할 거야. 이 힘은 그러라고 주어진 것처럼 느껴져.”

아멜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굳게 결심한 눈동자는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낳아 준 어머니와 아주 비슷한 얼굴이었으나 다른 표정으로 소녀는 웃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실지도 몰라요.”

“괜찮아.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로라는 내 이름을 대 줘.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해결하고 싶어.”

“황녀님…….”

용의 피가 각성하며 아멜리아에게 용기도 불어 넣어 준 것인지, 아이는 단단해진 마음가짐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해 줄 거지?”

“……물론입니다. 황녀님 뜻대로 하세요.”

“응. 고마워.”

아멜리아는 이날, 언젠가 어머니인 카밀라와 재회하는 날을 기대하며 아끼고 아껴 둔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티 파티에 초대된 귀족 영애처럼 곱게 차려입고 나간 아멜리아는 시종 하나 데리고 가지 않고 곧장 황비궁으로 향했다.

황비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세드릭 때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내 아드님.”

‘실패했어요……. 율리시즈와 아멜리아 모두 없애 버릴 수 있었는데, 대마법사님께서 찾아오는 바람에 다 끝났어요.’

‘뭐라고요?’

‘어떡하죠? 대마법사님께서 저를 미워하시는 것 같던데. 저는 그분 곁에 있고 싶어서 저지른 일이었는데…….’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는 세드릭의 이야기를 들은 카밀라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황태자 율리시즈는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의 역린이었다. 황제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보호막을 쳐 둔 율리시즈를 건든 세드릭이 화를 피할 가능성은 없었다.

‘숨으십시오, 어서! 사술사를 불러 눈속임 결계를 쳐 놓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 어미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 나오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세드릭이 죽기라도 하면 이 어미는 끝입니다! 아드님께서는 내 유일한 희망이요, 빛입니다. 세드릭이 황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 어미가 지킬 것이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들어가 숨으세요!’

‘아, 알겠어요. 어머니.’

세드릭은 울면서 카밀라의 말에 따랐다. 카밀라는 급히 사술사들을 불러 비밀스러운 방에 세드릭을 집어넣고는, 촘촘히 눈속임 결계를 쳐 놓게 했다.

“황비님, 누가 방문을 요청합니다.”

“누구길래 그러느냐?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썩 꺼지라 해라!”

“그게…… 아멜리아 황녀님께서 황비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뭐?”

예상치 못한 이름이 언급되자 카밀라는 당황했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지?”

“정확히는 세드릭 황자님을 만나러 왔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2황자를 만나 사과를 들어야 한다면서요.”

소식을 전하는 시녀의 눈에 의구심이 차 있었다. 아랫것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 가며 세드릭이 친 사고에 대해선 쉬쉬했으나, 여태 가만히 살던 황녀가 황비궁을 찾아오니 궁금할 법했다.

카밀라는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못 들어온다고 전하거라! 아예 황비궁 근처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내쫓아 버려!”

“알겠습니다.”

시녀가 아멜리아를 내쫓으러 가자, 카밀라는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예감이 좋지 않아. 그 아이가 세드릭을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쓸모없이 황태자궁에 더부살이로 얹혀살던 황녀가 움직였다는 건 믿을 만한 뒷배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불길한 직감에 카밀라는 방 안을 서성이며 어서 아멜리아가 떠났기를 바랐다.

쿠우웅.

“까아악!”

그러나 카밀라를 기다리는 건 황비궁의 정문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무슨 소란이냐!”

“화, 화, 황녀님이……. 괴물…….”

시녀들은 말을 하다 말고 도망쳤다. 또다시 우르르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벽이 무너져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 떼 사이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멜리아가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황비 마마. 처음 뵙겠습니다. 아멜리아라고 합니다.”

차가운 말투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어떤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금색 눈이 사냥감을 노려보듯 무심히 카밀라를 살폈다.

황녀는 예법까지 준수하며 앙증맞게 인사했다. 딸의 머리 색과 눈동자가 조금 달라졌지만, 신경이 온통 세드릭의 안전에만 쏠려 있는 카밀라는 그런 것을 눈에 담을 여유가 없었다.

“내 궁에서 이게 무슨 되먹지 못한 무례지,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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