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안심하세요, 클로드 님. 유리 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마탑의 상급 마법사이신 페른 님께서 클로드 님이 잠드신 동안 철통 경비를 서셨어요.”
“페른이?”
“네. 제발 멀쩡해지신 클로드 님을 보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자원했죠. 클로드 님이 ‘마법사 우울증’으로 병이 났을 때처럼 내내 유리 님 옆에 붙어 계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리 님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시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유리의 안전을 확인받자 맥이 팩 풀렸다. 비틀거리는 나를 윈터가 달려와 부축했다.
“어…… 왜 이러지?”
“오랫동안 몸을 강제로 마법으로 활성화한 부작용이죠. 그리고 잠든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으니까요. 몸이 무리했다는 뜻이죠.”
얼떨떨해하는 나를 위해 루나는 차근차근 모든 질문에 답했다.
루나는 내가 아팠던 기간의 일을 몹시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었다. 나는 그걸 읽고 나서야 내가 그 기간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미친 사람으로 보였겠네.”
“미친 마법사로 보이긴 했어요.”
“그게 그거잖아, 윈터.”
“진짜 놀랐다고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그냥 알았다고 하세요. 모두가 클로드 님을 걱정했다고요. 분위기 좀 살펴요. 눈치껏!”
윈터가 나를 소심하게 살짝 찌르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미안하긴 해서,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왓! 스승님! 이제 깨어나신 거예요?”
계절이 지나 키가 좀 더 자란 율리시즈가 기운차게 내게 달려왔다. 아이의 뺨은 싱그러운 복숭앗빛이었고, 푸른 새순처럼 튼튼하니 건강했다.
“응.”
“회복하셔서 기뻐요. 스승님이 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저를 지켜보셨는지 알 것 같은 시간이었어요.”
“유리는 성장기 어린애니까 잘 먹고 잘 자야 해.”
일찍 자고 많이 먹어야 키가 많이 크는걸. 유리가 준 과자를 우물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님, 다 큰 어른도 잘 먹고 잘 자야 해요.”
“……그건 나도 알아.”
“아시면 이제 저 때문에 아프지는 마세요.”
“네가 멀쩡하면 나도 멀쩡해. 맞다, 네가 괜찮아지면 꼭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어.”
“뭐라고요?”
“엄청 강해져야 할 것 같다고. 유리 너. 이래서는 걱정되어서 세상 밖으로 못 내보내겠어. 밖이 얼마나 험한 줄은 알아? 아니지. 황궁 안부터가 개판이니 밖이 더 순한 맛일 수도 있겠어.”
황궁은 아이가 자라기엔 정서적으로 적합한 곳이 아니야. 여긴 미쳤어. 무슨 어린애가 엄마 말 듣고 질투심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들어?
실컷 구시렁대는데 옆에서 유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왜 웃어?”
“아뇨. 그냥. 제가 아는 스승님 그대로여서 안심했어요.”
“……네가 보기에도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았구나.”
좀 부끄러워졌다. 지켜야 할 아이에게 추한 꼴을 보이다니. 매미처럼 나는 괜찮다 염불을 외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의 난 반쯤 실성한 상태였다. 내가 틀렸고, 주인님은 아프다고 주장한 윈터가 옳았다.
민망함에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자 유리가 까르르 웃으며 같이 따라 들어왔다.
“오지 마. 나 지금 혼자 있고 싶어.”
“왜요? 아프실 때는 그렇게 저를 따라다녔다면서요.”
“……다 나아서 지금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해. 이 스승님은 피곤하다.”
침대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처럼 이불에 파묻혔지만, 나는 내 품으로 들어오려는 유리를 밀어 내진 못했다. 작은 아이는 자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스승님.”
“왜.”
“건강해지셔서 정말 기뻐요.”
“너는 참 사소한 일로 기뻐하는구나. 아가, 그럼 내가 영영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니? 나는 대마법사야. 어지간해서는 죽지 못하는 초월자란 말이다.”
유리가, 내 작은 피보호자가 이 사태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길 바라며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클로드의 기억을 뒤져 그 인간 흉내도 내 봤다. 윈터가 옆에서 쫑알거렸다.
“진짜 주인님은 거짓말을 더럽게 못하세요.”
“입 좀 다물어 줄래, 윈터?”
“주인님께서 사기를 치려고 하시면 한 시간도 못 가서 경비대에게 신고당할 거예요.”
야. 그러는 넌 내 패밀리어가 맞냐?
‘무슨 엄마처럼 잔소리를 귀에서 피나도록 해…….’
듣기 싫어서 유리를 끌어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자 윈터가 내 위를 사뿐사뿐 밟고 올라왔다.
“무슨 짓이야!”
“패밀리어 속 썩인 대가라고 받아들이세요. 얼마나 걱정했던 줄 알아요? 진짜 못돼 처먹은 주인님이야. 반성이란 걸 좀 해야 해요, 주인님은.”
“……내가 잘못했다.”
“예, 속 썩인 만큼 미안해하십시오.”
윈터는 내 상체 위에 똬리를 틀고 누웠다. 갈색 털 짐승의 몸은 적당히 따끈하니 좋았다.
“……이게 벌이야?”
“아뇨? 앞으로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제때 숙면하는 게 주인님이 받을 벌이죠.”
“……벌이 아니잖아.”
“그럼 제가 아프다가 갓 일어난 주인님께 주먹이라도 날릴 줄 아셨습니까? 저 그렇게 몰상식한 패밀리어 아닙니다, 흥.”
윈터가 불만에 찬 꼬리짓을 했다. 나는 윈터가 황제가 분노에 차서 날렸던 은 술잔을 일격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던 것을 떠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행여라도 주먹으로 치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이제야 인정하시는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말을 마친 윈터는 아예 내 위에서 쿨쿨 잠을 청했다. 유리도 킥킥거리다 내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나는 따끈한 온기 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생각했다.
‘너무 오래 잤으니까 이젠 일어나야 하는데…….’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뭔가를 처리해야 했는데.
기억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다 퍼뜩 생각이 나서 일어났다. 윈터가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으나 인상을 쓰며 잠든 채로 낙법에 성공해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2황자! 망할 세드릭 윈프리드!”
그 녀석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하는데!
순식간에 뒷 목의 혈압이 상승하는 걸 느끼며 나는 스태프부터 냅다 꺼내 들었다. 잠에서 깬 유리가 눈을 비비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스승님. 다 해결됐어요.”
“뭐? 언제?! 나 없이 2황자와 만나러 간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응?”
부산을 떨며 유리가 괜찮은지 확인하려는데, 아이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멀쩡해요. 제가 세드릭을 만날 필요도 없었어요. 아멜리아가 가서 자기 몫의 복수를 다 하는 바람에, 스승님과 제 몫은 하나도 남지 않았어요.”
“……아멜리아가?”
그 연약한 아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물음표를 던지는 내게 유리는 황궁이 들썩일 만한 일이 아멜리아에게 일어났다고 말해 줬다.
“그 아이가 황족의 혈통에 흐르는 용의 피를 불완전하게나마 각성했거든요.”
“……???”
그게…… 각성도 할 수 있는 거였어? 황족을 신성시하기 위한 설정값 같은 게 아니고?
* * *
세진이 율리시즈의 회복을 확인하고 긴 잠에 빠져 버린 날, 아멜리아도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여긴……?”
“깨어나셨군요, 황녀 전하.”
로라는 죽을 먹이던 중 아멜리아가 정신을 차리자 스푼을 거뒀다.
“무슨 일이 있었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 두 분 모두 ‘그’ 사건의 여파로 앓아누우셨습니다. 정신적인 충격이라 몸속에 흐르는 반인반룡의 피가 그 충격을 완벽히 상쇄할 때까지 인형처럼 지내셨어요. 다행히 지금은 정신을 차리셨고요.”
“……클로드 님은 어디 계세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멜리아가 세진을 찾자,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기절하셨어요. 두 분의 상태가 이상해진 후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티시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괜찮아지신 걸 보고 조금 전에 막 잠드셨어요.”
“……저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로라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로라가 그것을 막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엄연히 제 윗사람이십니다.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그렇지만…… 저는 허울뿐인 황녀인걸요. 부황 폐하도, 어머니이신 황비 마마도 저를 외면했어요.”
있으나 마나 한 황녀는 없느니만 못한 법.
“그런 제가 무슨 염치로 황녀 대접을 받겠어요…….”
아멜리아는 두 손에 이불을 꽉 쥐고 울지 않으려 눈가에 힘을 줬다. 울기만 해서야 해결되는 일은 없기에, 그리고 더는 한심하게 울고만 있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정말 소중한 가족들을 곁에 두고서도 몰랐다는 게 제일 부끄러워.’
하마터면 율리시즈를 잃을 뻔한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동생을 대신해 몸을 던져 막아 낸 율리시즈의 몸에서 흥건하게 흘러나오던 붉은 피. 그건 아멜리아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만 있지 않고 황비궁으로 가서 뭐라고 따지기라도 할 텐데.’
친동생인 세드릭은 율리시즈와 아멜리아를 죽이려 했다. 대마법사의 곁에 있는 그들이 못마땅해서란 이유 때문이었다. 세드릭에게 가족의 정을 기대했던 아멜리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게 세드릭을 벌할 힘이 있다면 좋을 텐데.’
부서진 마음은 아멜리아 체내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용의 피를 깨웠다.
로라가 아멜리아의 변화를 눈치채고 소스라치게 놀라 스푼을 떨궜다.
“어머, 황녀님! 머리카락이…….”
“응? 내 머리카락이 왜?”
“눈동자도…… 보세요. 변하셨어요. 한쪽 눈동자가 금색이에요.”
“어어?”
용의 피는 반절만 각성했다. 아멜리아의 간절함만 닿았기 때문이었다. 본디 약하게 태어난 아멜리아의 육신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이를 알 리 없는 아멜리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심장이 저릿해지더니 갑자기 머리끝이 금색으로 물들고, 왼쪽 눈동자가 초록색에서 금색으로 변했기 때문에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다행히 루나가 있어 진료를 받은 뒤, 아멜리아는 축하를 받았다.
“경하드려요, 아멜 님. 당신은 용의 후손으로서 불완전한 각성을 이루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