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황태자궁의 연무장에 숨어 율리시즈와 세진을 엿본 건 세드릭이었다.
‘대마법사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 아주 잠깐만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황태자와 대마법사를 조심하라는 카밀라의 말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난번에 쳐들어갔을 때 쌓인 설움일랑 다 녹아 버리고, 그 자리엔 동경하는 대마법사에 대한 그리움만 남았다.
그리운 대마법사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끝에 떠오르는 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저를 내치던 모습이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1황자에게는 따뜻한 봄볕처럼 웃어 주셨으면서, 왜 나한테만은…….”
그것이 못내 서러워 세드릭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오기로라도 다시 황태자궁에 쳐들어가 대마법사에게 저도 따뜻한 웃음 한 자락을 받고 싶었다.
곧고 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어 주었으면 했고, 찬란한 호박색 눈동자를 곱게 접어 가며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것도 듣고 싶었다.
“나도, 나도 이 나라의 황자란 말이야……. 잘못한 건 1황자의 어머니 쪽인데, 왜 대마법사님께선 나를 미워하시는 거야?”
‘나도 그분께 똑같이 사랑받고 싶어.’
세드릭은 몰랐다. 어째서 세진이 세드릭과 카밀라를 그토록 경멸하고 배척하는지를. 어머니인 카밀라가 한탄하듯 털어놓는 이야기 속 진짜 악역은 바로 화자인 카밀라라는 것을.
‘1황자는 참으로 비열한 작자입니다! 아아, 사랑하는 내 아들 세드릭. 궁 내에 그 사악한 것을 칭송하는 소리가 멎질 않아요. 악독한 1황자는 제 어미를 닮아 필시 선생에게 뇌물이나 주며 성적을 포장하는 짓이나 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아이가 이리도 사랑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 많이 취하셨어요.’
‘내 아들 세드릭이 더 바르고 똑똑하며 훌륭할진대! 어째서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주는 거지요? 세드릭이야말로 이 나라를 이어받을 유일한 후계자이거늘, 다들 눈과 귀가 먼 바보 천치들일 겁니다!’
황태자 율리시즈가 훌륭하게 성장할수록 카밀라는 불안해졌다.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율리시즈와 다르게, 세드릭은 범재에 불과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고 적용하는 데 있어 그 속도나 결과물이 늘 율리시즈보다 못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카밀라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꾸 술을 찾았다. 불안감을 해소할 만큼 독한 술이어야만 카밀라는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곯아떨어지면 좋으련만, 때때로 술에 취한 카밀라는 벌떡 일어나 세드릭에게 원망 섞인 투정을 퍼부었다.
‘세드릭, 너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훌륭하게 태어나지 못한 거니?’
‘……네?’
‘너는 모든 면에서 그 여자가 낳은 아이보다 우수해야 했어. 그래야 내가 이길 테니까. 내가 낳은 네가,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테니까.’
그런데 아가, 왜 부족하게 태어나 이 어미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니?
만취한 카밀라는 소름 끼치도록 흐느끼며 울다 웃으며 세드릭을 겁먹게 했다.
행여나 어머니의 이런 가여운 모습이 시녀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이럴 때마다 세드릭은 늘 혼자서 카밀라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기에 몹시 외롭고 슬펐다.
‘어…… 어머니. 무서워요. 왜 이러세요.’
‘너는 1황자 율리시즈, 그 녀석보다 더 강해야만 해. 그러지 못하겠다면…… 힘으로라도 빼앗아라.’
‘무, 무엇을요?’
‘그 아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을. 그래. 가장 쉬운 예로 그 아이가 어미 새처럼 따르는 대마법사가 있겠구나. 내가 낳고서 직접 버린 내 딸도 친동기처럼 예뻐해 준다던데, 그 애를 없애 버리는 것도 좋겠지.’
아이의 앞에서 하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고, 오랫동안 이런 폭력적인 말들에 익숙해진 세드릭은 그저 그런가 보다 여겼다.
다만, 지난번 몰래 황태자궁을 급습하려 했다가 엿본 따스함이 눈에 걸려 아이는 어미에게 질문했다.
‘……저, 어머니.’
‘왜 그러니?’
‘저번에 대마법사님을 뵈었을 때…… 그분은 너무나 아름답고 강한 분이셨어요. 어떻게 하면 그분께서 저를 다시 돌아봐 주실까요?’
세드릭은 애정이 고팠다. 아비인 황제는 세드릭에게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미인 카밀라는 아들을 귀애했으나 그건 세드릭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세드릭이 포악하게 구는 건, 일종의 자기방어와도 같았다. 그렇게라도 굴지 않으면 시종들이 자길 무시할 것 같아서, 카밀라처럼 트집을 잡아서라도 그가 시종들의 윗전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 치에게 관심받아 무얼 하려고?’
‘……그분이 1황자에게 베푼 것 같은 따뜻함을 받고 싶어요.’
카밀라는 아들의 소박한 바람에 깔깔거리며 비웃어 주었다.
‘아하하하하! 이런, 이런. 불쌍한 내 아들. 너는 그 사람에게 평생 사랑받을 수 없을 거란다. 적어도 그 인간이 철벽처럼 수호하는 1황자가 죽으면 몰라! 아니, 그 아이가 죽더라도 변하는 건 없겠구나. 그자는 죽은 너와 나를 보아야 그제야 미소를 지을 위인이야.’
‘……어째서요?’
‘그건 알려 줄 수 없지만, 아가. 한 가지만 기억해 두렴. 잡지 못할 무지개를 좇는 인간은 미쳐 버리게 된단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네가 자라다 보면 알게 될 거란다.’
찜찜한 어머니와의 대화는 경고였다. 세드릭이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는 뜻에서 한 경고.
그러나 세드릭은 요정처럼 아름답던 외모와 시리도록 서늘한 호박색 눈동자를 잊지 못해 결국 또 황태자궁 주위를 기웃거렸다.
황태자궁의 연무장은 본채로 사용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어, 그곳까지는 결계가 닿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세드릭은 도둑 걸음으로 몰래 연무장 주위 풀숲에 숨었다.
‘시종에 의하면 매일 같은 시간대에 이곳에 대마법사님이 1황자를 가르치러 오신댔어.’
무슨 수업일까. 아무래도 마법사이시니 당연히 마법을 배우겠지?
‘나도 배우고 싶다…….’
시키면 잘할 수 있었다. 세드릭이 가장 잘하는 게 어머니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수업에서 1황자가 못하는 것을 세드릭이 짠, 하고 나타나 해낸다면 대마법사 또한 다정한 눈빛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가 훌륭하다 해 봤자 다 부풀려진 풍문이겠지!’
그런 마음으로 숨어서 지켜본 마법 수업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황태자 세드릭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했다. 이미 마력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에 압도되어 세드릭은 먹고 있던 비스킷 조각을 떨어뜨렸다.
‘말도 안 돼. 벌써 저런 실력이라고?’
세드릭은 아직 마력의 통제조차 쉽지 않아 사고를 내기 일쑤였다. 가르치는 궁중 마법사는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이라 했으나, 그것이야말로 거짓 섞은 아첨이었음을 소년은 깨달았다.
다소 유치한 방식이었지만, 율리시즈는 어렵지 않게 환상 마법을 파훼했다. 그 방법조차 뽀뽀라는, 사랑을 가득 받은 아이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 세드릭은 질투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왜 나는 안 되지?”
율리시즈와 대마법사의 세계엔 오로지 서로만 있었다. 끈끈한 유대감으로 얽힌 두 사람은 실전 수업 중에도 서로가 다치지 않기만을 가장 간절히 바랐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둘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드릭은 그게 너무 부럽고 샘이 나 눈물을 흘렸다. 세드릭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그들에게만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사라지면 이 스승도 쓸모가 없어지니 갈 곳이 없어진답니다.”
만지면 보송보송한 솜털이 느껴질 듯한 목소리로 대마법사는 황태자를 대했다. 세드릭은 이를 갈았다. 저 둘 사이에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구나.’
대마법사의 애정이 탐이 난다면, 세드릭은 제 이복형제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가 진실로 세드릭에게 애정 어린 미소를 줄지는 미지수였으나, 사랑에 굶주린 아이는 없는 희망이라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1황자 율리시즈를 치워 버려야 해.”
그의 모든 것을 내가 가져 저 빛나는 사람도 내 곁에 오도록 만들고 싶어.
새카맣게 타오르는 욕심이 눈물을 그치게 했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황비궁으로 돌아가 율리시즈를 이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세드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어느 길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달리다,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으윽…….”
“아야야. 아파라아…….”
“감히 황자를 다치게 해? 어서 용서를 빌지 못……”
“어! 세드릭! 세드릭이다!”
세드릭이 부딪힌 사람은 다름 아닌 아멜리아였다. 연무장에서 한창 수업을 진행할 세진과 유리를 위해 간단한 간식거리와 물을 가져다주려다 그만 세드릭과 충돌하고 만 것이다.
“너는…….”
“세드릭! 나, 기억해? 네 누나야. 아멜리아, 아멜리아 샬롯 윈프리드.”
양 갈래로 붉은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묶은 소녀가 생긋 웃었다.
“클로드 님께서 말씀하셨어. 어, 어머니께선 나를 싫어하시지만…… 그래도 동생인 너와 친하게 지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 둘이 친해지면 무척 기쁠 거라고 하셨어.”
“…….”
“너, 너는 미들네임이 뭐야, 세드릭?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어. 너는 내 동생이니까, 앞으로 천천히 너에 대해 알아 가고 싶어!”
‘뭐라는 거야.’
세드릭은 짜증이 났다. 별 같잖지도 않은 멍청한 계집애가 제 누이랍시고 설쳐 대는 꼴이 보기 싫었다.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는 아멜리아가 세드릭은 싫었다.
‘이딴 애도 대마법사님의 사랑을 받는다니…….’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드릭은 아멜리아가 추하게 엉엉 우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누나. 나를 사랑해?”
“응! 아주 아주 많이!”
“그렇다면 장미를 꺾어 와 줘. 줄기에 가시가 많은 것으로 잔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