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30화 (30/90)

30.

검집을 내려놓은 유리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젖먹이 아기 모습의 내게 향했다.

“무기도 없이 날 어떻게 이겨 보려고?”

이도 안 난 아기가 발음을 정확히 하는 모습이 소름 돋았지만, 유리는 태연하게 그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애가 애를 들고 있네.’

“이렇게 할 건데?”

쪽.

“어?”

‘응?’

유리가 아기 모습의 내 환상에게 한 건 다름 아닌 뽀뽀였다. 뺨에다 하는 뽀뽀. 내가 유리에게 잘 자라는 굿나잇 키스를 할 때나 칭찬받고 싶은 아이에게 상으로 줄 때만 하는 뺨 뽀뽀를 한 것이다.

‘저런 게 무슨 파훼 효과가 있다고…….’

내가 애를 너무 곱게 길렀나 보다. 세상의 험난함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착하게 자랐거니 하며 은신을 풀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 무슨 짓이야!”

펑!

아기 모습의 내 환상이 뽀뽀를 받은 뒤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폭발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이가 없어 하는 내 앞에서 유리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스승님께서는 내가 말도 없이 기습 뽀뽀를 뺨에 하면 엄청 부끄러워하신다고! 과묵한 성격답게 말은 안 하시지만, 기습 뽀뽀 뒤에는 늘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로 변해!”

내가 그랬어?

“그러니까 이건, 스승님의 정신적인 약점과도 같은 거지! 헤헤, 역시 잘 먹혔다!”

유리는 만세 자세를 하며 좋아했다.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된 아이가 폭력 하나 없이 대마법사의 복제와도 같은 환상 하나를 깨뜨렸다.

‘……비록 방법은 많이 엉뚱하고, 또 내 뺨이 화끈거릴 지경이지만.’

은신 마법을 쓴 상태로 나는 손부채질을 했다. 유리가 나를 무척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이 못내 기분 좋으면서도, 내 모습이 다섯이나 늘어서 있으니 조금 부끄러웠다.

남은 네 개의 환상들도 나처럼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이리 와! 너희들도 뽀뽀로 물리쳐 줄게!”

“윽! 싫은 건 아니지만 부담스러워!”

아랑곳하지 않고 율리시즈가 환상들에게 달려들자, 환상들은 저마다 유리를 피해 달아났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양 환상들은 유리를 피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변방의 무장을 검술 스승으로 둔 황태자 전하께서는 몹시 날렵하시어 차례차례 환상을 붙잡아 뽀뽀를 날렸다.

“어딜 가세요, 스승님! 제자의 뽀뽀를 받으셔야죠!”

“으아아! 오지 마!”

쪽. 쪽. 쪽.

뽀뽀하는 소리가 연달아 세 번이나 울렸다. 유리는 야무지게 나와 똑같은 외양의 환상만을 남겨 두고 나머진 전부 뽀뽀로 처리했다.

펑펑 환상들이 터져 나간 자리엔 오로지 나와 완전히 똑같은 환상만이 남았다. 그 환상은 방어막을 칠 수 있어서, 유리가 무작정 환상에게 매달려 뽀뽀를 해 줄 수 없었다.

“저한테는 그런 식의 방법이 안 통할 겁니다. 자, 무기를 들어 싸울 태세를 갖추세요. 이건 실전입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얼굴을 하고 계신데 제가 어떻게 스승님을 해칠 수 있겠어요!”

우리 애는 유교 정신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유리의 똥고집에 환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환상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유리를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 마법을 내뿜었다. 환상이니 어정쩡한 복제에 불과한 마법이 쏟아졌으나 그것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리는 다시 검집을 잡고 공격을 막아섰다.

‘이 틈을 타서 유리를 제압해야겠다.’

나는 유리가 환상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살금살금 걸어 그 아이를 항복시키기 위해 뒤에서 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유리가 감이 어찌나 좋던지, 마치 나를 본 것처럼 뒤로 돌아섰다.

“스승님?”

‘헉.’

순간 소리가 샐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디로 한눈을 파는 거죠?”

환상 마법으로 만든 ‘내’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리를 공격하려 했다. 날카로운 창을 여러 개 소환해 상대에게 찍어 누르는 공격 마법이었다.

‘등이 빈 유리에겐 위험해! 아무리 위력이 약한 복제본이라고 해도 피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결국 나는 은신 마법을 풀고 유리를 꼭 껴안았다.

“역시 진짜 스승님은 이쪽에 계셨군요!”

“지금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사라져라.]”

아슬아슬하게 몇 초 차이로 내가 앞섰다. 뾰족한 창끝이 날아오다 말고 잿가루로 부스러져 공중에 휘날렸다. 환상 마법으로 만들었던 ‘나’ 역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 급한 마음에 유리를 안고 연무장 바닥을 뒹굴어서, 내 몸엔 자잘한 생채기가 남았다. 몇 군데에서는 피가 흐르기도 했다.

“으으…….”

“헉! 죄, 죄송해요. 스승님!”

유리는 진짜 나를 찾았다는 기쁨에 웃다가, 내가 고통으로 신음하자 황급히 일어나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번쩍 들고 무릎을 꿇어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왜 그러십니까, 황태자 전하? 이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시, 싫습니다. 저 때문에 스승님께서 다치셨잖습니까. 저는 못된 제자입니다. 스승님을 다치게 만든 못된 제자요.”

옥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유리의 입가는 구겨진 호일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속상한 모습에 아픔도 다 잊었다.

“이런 건 다친 축에도 못 낍니다.”

“하지만!”

“보세요, 전하. [회복되어라.]”

치료 마법을 사용하자, 상처 주위로 몽글몽글 솟아오르던 핏방울도, 거칠게 살이 쓸려 나간 자국도 전부 말끔해졌다. 따뜻한 초록빛 마법의 효과에 유리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역시 스승님이세요!”

“그렇죠? 그러니 제가 다친 일로 마음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얼마나 다치든 간에 마법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며 희미하게 웃었는데, 유리는 다시 울먹거렸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상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마법사라고 할지라도 고통은 피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스승님을 다치게 한 못된 제자입니다…….”

‘너도 다칠 뻔했으면서.’

유리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입혔다는 경험이 처음인지라,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나는 괜찮다며 어린 황자님을 토닥이고 보듬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 그렇지만, 히끅.”

유리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제 손으로 사라지게 할 뻔했다는 죄책감에 떠는 유리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옛날의 내가 떠올라 더욱 따뜻하게 끌어안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전하의 곁엔 제가 있습니다. 대마법사는 그리 쉽게 죽지 않아요.”

“죄송해요, 스승님. 정말 죄송해요.”

각종 과목의 가정교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영민한 아이.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지성을 지녔던 셀레스틴의 아이.

그런 화려한 수식어를 지탱하고 있던 건 그저 스승을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도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였다.

‘이런 네가 어떻게 모든 걸 파괴하려는 폭군이 되도록 둘 수 있겠어.’

이렇게 착한 아이인데. 키우면 키울수록 좋은 점만 눈에 들어와서 마음을 아리게 하는 아이인데.

“다시는 이런 수업 안 할래요. 스승님이 다치시는 건 싫어요.”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만.”

“왜요?”

“이 수업은 황태자 전하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전하에게 어떤 적이 오더라도, 누구와 맞서 싸울 때가 되어도 무사히 이기실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수업이기에, 저는 스승으로서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율리시즈는 나를 이 세계에 붙들어 놓는 말뚝이다. 이 아이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붙어 있는 숨이니, 살아 있는 동안은 아이가 되도록 안전하고 행복해질 방법을 제시해 주고 싶었다.

‘애는 너무 착해. 비뚤어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인성은 참 발라.’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유리가 황비와 황제의 같잖은 수작에 걸려들지 않도록 강하게 키워내는 것이었다. 설령 언젠가 곁에 내가 죽어 존재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구멍 따위 없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정말요?”

훌쩍거리던 유리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작게 들었다. 신비로운 자색의 눈동자와 금실같이 빛나는 머리카락을 지닌 미소년은, 항상 내 앞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곱 살 난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럼요. 황태자 전하를 가르치면서 나날이 늘어나는 성취에 저도 뿌듯하답니다. 그러니 스승에게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너의 성장은 나의 기쁨이고, 아직 길게 남은 시간을 버티게 해 줄 희망이기도 하니까.

네가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원작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비참한 운명에 지지 않고 오롯한 사람이 되어 미래로 나아가기를.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사라지면 이 스승도 쓸모가 없어지니 갈 곳이 없어진답니다.”

“헉! 그…… 그건 싫어요! 스승님은 평생 제 스승님으로 남아 주세요! 쓸모가 없다니요! 스승님께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제가 직접 혼쭐을 내 줄 것입니다!”

울다가 뚝 그치고 씩씩거리는 유리는 보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시무룩해 있는 것보다는 활달하게 생기를 뿜어내는 게 이 아이에겐 더 잘 어울렸다.

“그래요. 전하.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서 헛소리를 하는 자들을 혼내 주시지요.”

“네!”

기분이 좋아진 유리를 번쩍 들어 비행기를 태워 주자, 아이는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을 타고 알알이 흩어지는 미소에 나도 입가를 끌어당겨 마주 웃었다.

부스럭.

‘응?’

수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다 도망쳤다. 풀잎 사이로 꿀 같은 금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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