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렇습니다. 슬슬 엘리엇 님과 교대할 시간이로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엘리엇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황태자의 검술 스승으로서 궁에 머무를 때만이 안심하고 외손자인 율리시즈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므로.
스승으로 초빙된 만큼, 손자라고 해서 봐주는 일 같은 것은 없었으나 율리시즈가 다치기라도 하면 누구보다 비상이 걸리는 사람이 엘리엇 피델리움 변경백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엘리엇에게는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러니 내일 또 뵈러 오시지요.”
“그렇게 해 주세요, 외조부님! 오늘 검술 수업도 즐거웠습니다. 매일매일 계속하고 싶어요!”
유리는 고된 훈련에도 찡그린 표정 하나 없이 맑게 갠 하늘처럼 웃었다. 연습용 목검을 어설프게나마 허리에 차고 기사처럼 인사하는 것이 깜찍하기 그지없어 나와 엘리엇 둘 다 심장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내일은 특별 간식도 챙겨 오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캐러멜 시럽을 잔뜩 끼얹은 푸딩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우와아! 좋아요!”
“그럼. 클로드 님. 황태자 전하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유리가 우다다다 내 품으로 달려왔다. 손자의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던 엘리엇은 내게 인사를 올린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났다. 곧 황태자 궁의 연무장엔 나와 유리 둘만 남게 되었다.
수련복 차림의 유리가 자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스승님! 오늘 수업에서는 무얼 배우나요?”
“오늘은 환상 마법에 대해 가르쳐 줄 겁니다. 실전과 같은 연습도 겸할 것이니 긴장 단단히 하십시오.”
여기서 실전이란, 암살 시도와 같이 상대방이 유리의 목숨을 노리고 왔을 때를 상정한 결투였다.
‘최근에는 페른이 대신 암살자들을 해치워 줘서 걱정이 덜해졌지만…….’
만에 하나라는 걱정이 들어서 시작한 게 실전 연습이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지켜 줄 수는 없으니, 유리 혼자서도 다수를 상대해도 가뿐할 실력을 키워야만 했다.
체술, 마법, 검술 등 여러 가지를 빽빽한 커리큘럼 속에서 배우고 있었지만, 유리는 지치지 않고 그 시간을 즐거이 받아들였다. 각 과목의 스승들은 절로 신이 나서 수업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전력으로 상대해 주십시오, 스승님! 그리고 편하게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궁에서처럼요!”
“……에휴.”
그러면 너 죽는다, 아가.
내가 똥오줌 기저귀를 갈아 주고, 분유를 타 먹여 트림까지 시킨 아기가 자라 덤비라고 뺙뺙거리고 있었다. 클로드의 힘을 전력으로 사용하면 잿가루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겁도 없이 오라고 손짓하니,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그건 안 됩니다, 전하. 다른 때는 몰라도 수업 중에서만큼은 스승 노릇을 해야 하기에 존대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마법도 엄연히 몸을 지킬 수단으로서 배우는 건데, 긴장의 끈을 놓칠 수야 없지.’
그런 마음에서 수업에서는 엄하게 대하는 건데, 유리는 볼을 크게 부풀리며 불만스러워했다.
“우…… 왜 안 되는 겁니까, 스승님? 저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대해 주는 스승님의 말투가 좋은데요…….”
얌전하고 순한 아이가, 유독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이 녀석 봐라.’
내가 제게 약한 걸 알고서 하는 수작이었다. 실제로 웬만하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려 하다 보니 내게만 응석받이로 자란 것도 사실이었다.
“안 될까요, 스승님?”
말끝을 흐려 가며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안 됩니다. 규정은 규정이에요. 어길 수는 없습니다.”
“히잉.”
그렇게 귀엽게 소리 내도 봐주진 않는다, 아가.
나는 얼른 오늘 진행할 수업 거리로 초점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 오늘 수업의 주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음…… 환상 마법이니 환상에 현혹되지 않고 진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수업의 주된 목표일 것 같습니다!”
유리는 시무룩해졌다는 것도 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또박또박 답했다.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었다.
“맞습니다. 환상 마법이란, 주로 적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을 가하는 게 주목적입니다. 그래서 환상 마법에 걸릴 때는 환상에 흔들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파훼해야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환상 마법을 파훼하는 법부터 배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환상 마법을 뚫어 보겠다고 하는 유리는 정말이지 귀여웠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금발은 노란 솜털이 보송하게 난 병아리를 연상시켰다.
“이번 수업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소지할 수 있는 무기의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단, 완벽하게 제가 만든 환상 전부를 파훼해야만 합격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클로드는 기이하게도 이론 후 실습 대신 실습과 이론을 병행하는 식으로 마법을 배웠기에, 나 또한 그 기억대로 유리를 가르쳐야만 했다. 타고난 마력 수치가 높고, 적응력이나 응용력이 강한 아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리의 마법 스승은 내가 아니라 페른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 페른이 스승 역할을 한다니.
‘으, 소름 돋아. 생각만 해도 싫다.’
닭살이 돋은 몸을 부르르 떨고서, 나는 스태프를 꺼냈다. 달과 용, 내 고유 문장이 새겨진 은빛의 스태프가 나오자 유리는 열광했다.
“언제봐도 스승님의 스태프는 예뻐요! 최고예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네!”
“지금부터 황태자 전하를 향해 환상 마법을 걸겠습니다. 보여 드릴 환상은 총 다섯 가지입니다. 다섯 개의 환상을 모두 파훼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내 앞의 그대여, 허상에 홀릴지어다.]
주문을 외우자 스태프로부터 청명한 푸른 마력 덩어리가 솟아났다. 솟아난 마력 덩어리는 다섯으로 갈라져 율리시즈 곁을 원 형태로 포위했다.
‘뭐가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환상 마법의 초점은 마법을 걸 상대에게 맞춰져 있다. 즉, 상대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주기에 정작 시전자는 무엇이 구현될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었다.
‘상대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나 물건이 나올 테니, 어쩌면 죽은 셀레스틴이 나올 수도 있겠네.’
젖먹이 아기일 때 잃은 어머니이지만, 유리는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였다.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는 보장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유리의 우는 모습을 보기 전에 수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영영 볼 수 없게 된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뭐가 나와도 저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요!”
내 조마조마한 속도 모르는 유리는 큰소리를 쳤다. 유리는 무서운 것이 나올 줄 아는지, 한껏 몸을 긴장시킨 자세로 검을 꼭 쥐고 있었다.
“좋습니다. 황태자 전하. 저를 깜짝 놀라게 해 주시지요.”
내 말이 끝나자, 다섯 개의 마력 덩어리들이 꿈틀거리며 무언가로 변화했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덩어리들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 스승님!”
이때 나는 은신 마법을 걸고 유리의 뒤로 와 있었기에, 아이가 왜 놀라는지 몰랐다.
율리시즈의 목소리는 경악과 감탄, 그리고 애정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스승님이 다섯 분이나 계셔! 그것도 연령대도 다양하게!”
‘……응?’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그곳에는 다섯 명의 ‘나’가 있었다.
젖먹이 아기부터 다 큰 성인의 모습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나눠진 내가 유리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아!”
“유리가 형아다!”
“나랑 유리랑 키가 똑같아!”
“스승님 말고 형이라 불러 줘야 할 거 같은데?”
“이리 와, 유리. 내가 진짜 너의 스승이야.”
‘……이게 뭐야?’
각자 다른 연령대의 ‘내’가 유리에게 몰려들어 내가 진짜라며 우겼다. 유리는 때아닌 인기 폭발에 혼란스러운지 잠시 헤롱대다가, 빽 소리쳤다.
“머, 멈추세요!”
그러자 다섯 명의 환상 인간들이 울먹거렸다.
“우리가 싫어?”
‘애 앞에서 저게 무슨 추태야!’
빌어먹을. 대마법사가 만든 환상의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그걸 또 받아 주는 유리는 착해서 문제였다.
“시, 싫을 리가요! 저는 어떤 스승님이든 좋아해요! 하지만…… 진짜 스승님이 아니면 안 돼요. 너무 귀엽고 멋진 환상이지만, 가짜는 가짜일 뿐이에요!”
유리는 검집으로 가짜 ‘나’를 밀치며 거리를 벌렸다. 애정 세례를 퍼붓던 다섯 명의 ‘나’는 유리의 행동에 미소를 감췄다.
“그렇다면 우리와 싸울 거야?”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스승인데도?”
“칼? 칼을 겨눌 거야? 아니면 마법을 써서 없앨 거야?”
“어느 쪽이든 싸울 준비는 되어 있어.”
“먼저 덤빌래?”
도발하는 꼴이 봐 주기 힘들었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숨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렸다.
‘무슨 환상이 저래?!’
아가, 유리야.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란다. 평소에 나를 저렇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이따 꼭 좀 말해 주렴…….
전투 수업용으로 불러낸 환상에 내가 치명타를 당하는 사이, 유리는 전투 태세를 갖춘 다섯 명의 환상 앞에서 힘차게 외쳤다.
“아무리 가짜라 해도 스승님은 스승님!”
덜그럭. 바닥 위로 유리의 검집이 떨어졌다.
“어느 스승님도 해하지 않고 파훼해 보겠다!”
아니, 얘야. 그러다 다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