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페른은 튼튼한 편이었다. 땅에 인간 못질을 몇 번 당하고 나서야 항복을 외쳤다.
“으악! 잘못했습니다! 그만! 그마안!”
“흑흑. 우리 못난 주인님 좀 봐주세요, 대마법사님!”
흙을 옴팡 뒤집어쓰고 엉망이 된 페른과 그의 패밀리어 데이지가 두 손을 모아 내게 간청했다. 황태자궁 정원에 난 깊숙한 구멍 옆에서 마법사와 패밀리어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두 번 다시는 공격하지 말아 주십사 애원했다.
“아까 뭐라고 했죠?”
“……죄송합니다.”
페른이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내게 부복했다. 데이지도 눈치를 보더니 그 작은 털뭉치 같은 몸으로 주인을 따라 했다.
‘이만큼 했으면 더는 가짜라고 귀찮게 하진 않겠지.’
괜한 소란이 일어나서 카밀라의 귀에 들어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언제든 약점만 잡힌다면 내 목을 치고 싶어 하는 황비는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는 클로드 님 앞에서 까불지 않겠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그래요. 잘 아네요.”
“…이런 점은 진짜랑 비슷……”
“방금 뭐라고 했죠?”
“아닙니다!”
납작 기는 페른을 보며 안심했다. 힘으로 완전히 기선 제압은 해 놓았으니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놀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심하게 대한 건 사실이니까…… 이쯤에서 보내 주자.’
물론, 예방책은 확실히 세워 두는 것이 좋았기에 금언 마법을 걸긴 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게 좋은 법이랬으니까.
싹싹 비는 둘에게 이만 꺼지라고 엄포를 놨다.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마. 그랬다간 용암 속에 처넣을 테니까.”
옆에서 윈터가 ‘주인님이요?’ 하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외면했다. 허세를 이 정도로는 부려야 더 이상 찾아올 엄두도 못 내겠지. 어린이들은 무사히 안에서 윈터의 애플파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 페른이란 작자가 내 말에 무슨 스위치가 눌린 것인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클로드 님!”
‘응?’
“저 같은 놈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이 싫어 이미지 변신을 하신 거로군요! 겨울도 한 수 접어줄 무심함! 이전보다는 약하지만 단호한 잔혹함! 이 페른은 감동했습니다! 지금의 클로드 님도 충분히 대단하신 분이기에 인정하겠습니다!”
“……미친 건가?”
“죄송합니다. 저희 주인님께서 원래 좀 돌아 버린 분이십니다.”
어이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중얼거리자 흙투성이 햄스터 씨가 대신 사과했다. 데이지는 자기 주인을 웬수 보듯 노려보며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아무튼, 꺼지세요.”
“그건 싫습니다! 어떻게 만난 클로드 님이신데요! 못 갑니다, 못 가요! 여기에 눌러 붙어 살 겁니다!”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건가.
“여기 제국 황성 안인데.”
“클로드 님이 허락하시면 되겠죠!”
“그쪽이 머리부터 들어갔다 나온 땅 주인, 황태자야.”
“괜찮습니다! 윈프리드 제국 황태자의 스승이자 보호자가 클로드 님이잖습니까. 그러니 클로드 님만 허락해 주시면 모든 게 만사형통입니다!”
“…….”
내가 무슨 만능 치트키라도 되는 건가? 그것보다, 내가 허락해 줄 거라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주인님. 표정 관리가 안 되십니다. 징그러워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요.”
윈터가 다 들리라고 종알거렸다. 데이지는 고개도 못 들고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못난 주인을 둬서 두 분을 고생시켜 죄송합니다…….”
“데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1분 1초라도 클로드 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머물게 해 달라 빌어야 하는 판국에!”
“주인님, 쫓아내는 게 좋을 듯싶은데요?”
“나도 동의해.”
황태자궁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장소로 떨어뜨려 버리려는 그때, 페른이 절박하게 외쳤다.
“저! 저 아무 데나 써먹어 주십시오! 상급 마법사들 중에서도 나름 한 손에 꼽히는 인물이라 귀찮은 일에 심부름시키기 딱일 겁니다!”
“…….”
‘제정신인가?’
내가 이어받은 건 고작 클로드의 기억뿐이지만, 적어도 마법사라는 인간들이 콧대가 높은 건 뼈저리게 잘 알았다.
그런데 자존심 따위 내팽개치고 하인처럼 부려 달라니. 그 정도로 클로드를 존경하는 건가?
“내가 왜.”
“헤헤. 클로드 님께선 이미 아시겠지만, 절 이곳으로 결계를 깨라 보낸 의뢰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잖습니까.”
또라이도 바른말을 하는구나.
페른의 말처럼 카밀라 때문에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마력은 넉넉하니 걱정할 게 없었지만, 시시때때로 쳐들어오는 암살자들은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암습 시도가 노출될 때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스…… 스승님. 이 음료, 뭐가 이상한 거 같아요.’
그러면서 아이가 입에 핏줄기를 한 가닥 흘릴 때 나는 황비궁 전체를 날려 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치유 마법으로 응급 처치를 하고 의원을 늦지 않게 불러 해독시킬 수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가끔씩 유리나 아멜이 위험에 내몰릴 때마다 괴로웠다.
“……네가 뭘 해 줄 수 있는데?”
페른이 됐다, 하는 것처럼 씩 입가를 말아 올렸다.
“클로드 님을 성가시게 하는 잡쓰레기는 제 선에서 밟아 드리겠습니다. 아, 제가 남겠다 자청한 것이니 물론 무보수로요.”
“대가가 없을 건 아니고, 원하는 게 뭐지?”
“에헤헤…… 별건 아니고요. 클로드 님 곁에 있게 해 주십쇼! 옆에서 관찰할 수만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
역시 또라이였다. 하지만 쓸 만한 마법사이긴 한지, 윈터가 눈을 반짝거렸다.
“페른 아르힘은 열렬한 ‘주인님’의 추종자이지만……. 저분의 능력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는 훌륭한 수족이 될 겁니다.”
“마…… 맞아요! 저희 주인님이 클로드 님께만 칠렐레팔렐레하지만 그래도 제법 똑똑하시고, 전투력도 상당하십니다! 전투 특화 마법사세요!”
과연. 겉으로 봐도 키도 크고 근육질도 상당한 게 허약한 마법사보다는 검사에 더 어울려 보였다.
“……절대 배신할 수 없는 제약을 걸 건데, 그래도 괜찮다고?”
“그건 제게 상입니다만.”
“……말을 말아야지. 알겠어.”
“야호!”
그렇게 황태자궁에는 새 식구가 늘었다. 머리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은 인간 하나와, 그로 인해 만성 위장병에 시달리는 패밀리어 하나가.
* * *
페른의 자발적인 의뢰 실패 이후, 더는 결계를 깨러 오는 마법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암살자도 아이들의 곁에까지 오지는 않았다.
‘편한데?’
결계나 궁에 남은 침입 시도의 흔적으로 봐서는 암습이 완전히 근절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건도 내가 나서야 할 일은 없었다. 페른의 노동 덕분이었다.
“궁 내부가 조용해졌어.”
그리고 황비궁은 또 난리가 났다. 마법으로 훔쳐보니, 이번 분기에 암습으로 쓸 돈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아악! 아아악!”
카밀라는 이제 물건을 깨부수는 짓도 하지 못했다. 여차하면 값비싼 물건은 내다 팔아 나와 유리를 죽이는 데 보태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머니…….”
“세, 세드릭?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에서 나오지 마세요. 이 어미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세드릭에게 난폭한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도 있었다. 원작과 다르게 율리시즈와 아멜리아를 학대할 수 없으니 화병이 나 죽을 맛인 듯했다.
‘자업자득이지.’
“잘했어, 페른.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줘.”
“옙!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도 잘 부탁드립니다!”
“으응…….”
“저분이 오셔서 편해진 건 좋은데, 이래서야 시녀장이란 직함이 유명무실하네요…….”
주방은 윈터에게, 청소는 페른과 데이지에게 빼앗긴 로라는 지나치게 한가해졌다. 처음에는 궁정 마법사보다 강한 페른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느냐 고사하더니, 윈터한테도 굽실거리는 꼴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자 윈터가 로라에게 말했다.
“로라는 돌아가신 황후 폐하의 충복이잖습니까. 그리고 종종 찾아오는 피델리움 변경백을 가장 잘 맞이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로라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어머나…… 페럿 집사님이 웬일이시람.”
로라의 감탄에 윈터는 볼을 미미하게 붉혔다. 그걸 보고 아멜리아가 작게 웃었다.
“윈터 볼 빨개졌대요!”
“아니거든요! 황녀 전하!”
“맨날 아니래!”
또 시끌시끌해지니 페른이 말끔히 걸레질을 하다 말고 와서 내게 속닥거렸다.
“클로드 님,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황태자 전하께 가 보시죠. 오늘은 마법 수업이 있는 날이잖습니까?”
“너…… 내 일정을 아예 외우고 다니는 거야?”
“존경하는 분을 눈여겨보다 보면 이건 당연히 숙지해야 할 사항 아닙니까?”
“됐다……. 가서 일해라.”
“옙!”
재빨리 이동하자, 연무장에서 율리시즈가 검술 연습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솜을 채워 만든 연습용 허수아비가 유리의 손에 작신작신 두들겨 맞았다.
“앗! 스승님! 오셨어요!”
목검으로 한참 베고 찌르던 유리는,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야 날 알아챘다. 유리의 옆에는 엘리엇이 서서 박수를 쳤다.
“훌륭합니다, 황태자 전하. 검술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계십니다.”
“외조부께서 잘 가르쳐 주시는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손자의 자색 눈을 바라보며 엘리엇은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리고 재능이 넘치는 활달한 아이로 성장한 율리시즈를 보며 행복해했다.
“클로드 님께서 오셨군요. 황태자 전하께 마법을 가르칠 시간이 되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