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7화 (27/90)
  • 27.

    “아이고, 내 궁둥이가!”

    운이 나쁘게도 마법사는 엉덩이부터 떨어져, 바닥과 엄청난 마찰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한 남자는 켁켁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흐어엉, 너무 아파!”

    “그러니까 주인님…… 너무 급하게 오시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아이고야.”

    그의 옷 주머니 틈새로 귀여운 회색빛 햄스터가 나타났다. 윈터와 비슷하게도 집사 옷을 입은 말하는 햄스터에 세드릭이 깜짝 놀랐다.

    “어머니, 저기 쥐가 말을 합니다.”

    “난 쥐가 아닙니다! 햄스터라고요!”

    쮜익. 불쾌함에 데이지가 찍찍댔다. 카밀라가 아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건 쥐가 아니라 내가 부른 마법사의 패밀리어랍니다. 아,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페른 아르힘 님.”

    흙먼지에 몇 번이나 뒹군 사람이 도저히 ‘무사히’ 도착했다고는 보기 어려웠으나, 카밀라는 그리 말하며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흠…… 그쪽이 저를 부른 의뢰인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마법으로 흙먼지를 개운하게 털어 낸 페른 아르힘이 피곤했는지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이곳 제국 황성에 절대 깨지지 않는 결계가 있으니 도전해 보라는 아주 기막힌 내용의 의뢰였죠.”

    페른은 웃고 있었지만, 상당히 불쾌했는지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그깟 표정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예, 제가 그렇게 적어서 여럿 상급 마법사들께 도움을 요청했지요. 자고로 마법사란 흥미가 생겨야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맞긴 하다만, 다음부터는 이런 수작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명심하도록 하죠.”

    빙긋 웃은 카밀라는 한 시녀를 시켜 보석함 안에 있는 보석들을 몇 가지 가져오게 시켰다. 전부 상등품으로, 내다 팔면 비싼 값에 팔릴 보석들이었다.

    “의뢰금은 여기 있습니다. 가져가시지요.”

    “흥. 알겠습니다. 바로 착수하죠.”

    페른 대신에 자그마한 햄스터 데이지가 날렵하게 뜀박질해 그 보석 주머니를 제 주인에게로 전해 줬다. 페른은 정말 상등품만 있는지 훑어보고 씩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의뢰인이지만 내용 자체는 몹시 흥미로우니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이동하라.]”

    그러자 햄스터를 어깨에 태운 페른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목적지는 보호 결계를 몇 중첩으로 걸어 놓은, 세진과 유리가 사는 황태자궁이었다.

    * * *

    쿠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황태자궁에 큰 진동이 울렸다.

    “뭐지?”

    “지진인가?”

    “으앙, 무서워!”

    “괜찮아, 아멜! 스승님께서 우릴 지켜 주실 거야! 나도 싸울 거고!”

    율리시즈는 참 착하고 용맹하기도 하지.

    ‘아서라. 유리야……. 네가 나설 일 없이 내 선에서 파리 같은 놈들을 잡아 없애는 게 내 역할이니.’

    공중에 불안해진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보호 결계 몇 개가 부서진 탓이었다.

    ‘이걸 뚫었다면 상대는 최소 마법사, 그것도 꽤나 상급의 마법사겠네.’

    ‘클로드 하센티온’은 본래 세계 곳곳을 유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나, 대부분의 마법사는 마탑에 소속되어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공격을 보낸 마법사 또한 마탑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카밀라가 마탑과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었고.

    “주인님, 어찌할까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층층이 사이에 생크림을 얹은 크레이프를 만들던 윈터가 자못 심각한 낯으로 내 명령을 기다렸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던 딸기 크레이프였는데, 이 충격으로 인해 모양이 어그러졌다. 윈터의 등 뒤로 모락모락 증기가 피어나는 환상이 보였다.

    ‘화났네, 화났어.’

    “당연히 혼내 주러 가야겠지.”

    “스승님! 저도,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돼요. 착한 어린이는 집 안에서 간식 먹으면서 다음 수업 시간에도 무사히 참석하는 것이 일이랍니다.”

    “힝…….”

    유리는 정의감이 넘치고, 나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수업을 빼먹으려는 꿍꿍인가 싶지만, 전혀 아니었다.

    “시험도 매번 만점 받고, 선생님들도 칭찬만 해 주시는데 이쯤 되면 스승님과 같이 싸워도 되지 않아요?”

    “내가 널 마법 부문에서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병아리야, 병아리.”

    “힝.”

    유리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다. 제왕학부터 온갖 교양 과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엘리엇이 초빙해 온 가정교사들은 매일같이 아이의 천재성을 칭찬하며 즐겁게 수업했다. 타고난 마력 역시 양이 많고 친화도가 높아 마법사로서의 자질도 높았다.

    쿠웅-. 쿠웅-.

    ‘아. 크레이프 층이 한 꺼풀씩 벗겨지듯 결계가 부서지네.’

    누군지는 몰라도 꽤 강한 놈인가 보다.

    “또 저러네. 소음은 민폐라는 걸 모르나. 자, 여기 가만히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응?”

    “알았어요……. 대신 스승님이 무조건 이기시고 돌아오셔야 해요!”

    “물론이지.”

    그러고서 밖으로 이동하자 황태자궁의 결계를 거대한 마력의 망치로 내리찍는 미친놈이 보였다.

    “에이 씨. 의뢰인 말처럼 진짜 잘 안 부서지네! 대체 몇 겹을 걸어 둔 거야?! 이렇게 무식하게 결계를 중첩시킬 인간이라면 한 명뿐인데…….”

    “이봐, 거기. 주거침입자. 당장 내려와.”

    내 말에 이름 모를 회청발의 마법사는 귓구멍을 후비는 척 무시하려다, 돌연 내 얼굴을 보더니 경악했다.

    “……클로드 하센티온 님???”

    ‘이전의 클로드를 아는 인간인가?’

    클로드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미약하게나마 저놈의 이름이 떠올랐다.

    “페른 아르힘? 여기서 무슨 소란이지?”

    “어…… 그게 저는, 여기에 아무리 마법사들이 도전해도 깨지지 않는 결계가 있다길래 궁금해서 와 봤는데요.”

    ‘바본가?’

    페른은 은신 마법을 걸고 황태자궁의 결계를 두들기고 있었으나, 여기에 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클로드 님께서 왜 황성에? 그 루머가 사실이었단 말이에요?”

    “뭐가.”

    “웬 약속을 지키겠답시고 어린애 하나를 금이야 옥이야 업어 키운다는 소리요. 개소린 줄 알고 무시했는데. 사실이었어요?”

    대마법사라는 인물이니 소문이야 퍼질 줄 알았지만, 대체 왜 저렇게 꼬아서 퍼졌는지 모르겠다.

    “……맞긴 하다만.”

    “세상에. 이 세상이 드디어 멸망하려는 건가?”

    ‘예전의 클로드 하센티온이라면 이 몸과 유리의 운명을 내게 맡기고 사라지긴 했다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처럼 페른은 반쯤 진실에 도달했다. 물론 농담이었기에 그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호 결계는 내가 친 것이니, 부수는 건 그만하고 물러가.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알겠으니까.”

    ‘카밀라 황비가 이젠 마법사까지 끌어들이는군.’

    나는 페른에게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보호 결계를 수복했다. 황태자궁의 꼭대기에 있다가 내 옆으로 스르르 내려온 페른은 날 빤히 쳐다봤다.

    시선이 매스꺼워 흘겨보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보모 노릇, 아무리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귀찮지 않으세요? 아이 돌보기 쉽지 않을 텐데.”

    “가라.”

    말을 많이 섞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인간은…….

    ‘클로드의 광팬, 아니 광신도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스토커였군.’

    페른은 클로드가 어디에 있든 찾아내 그에게 제자 삼아 달라며 성가시게 굴었다. 참다못한 클로드가 어느 인적 드문 바위산에 페른을 봉인해 버리고 나온 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깨어났다니, 난 운도 없지.

    “클로드 님을 붙잡는 약속이 거슬리시다면, 제가 한 백 년 정도 윈프리드 제국에 쫓길 각오 하고 그 황자를 죽여 드릴까요?”

    이 개자식이?

    ‘이전의 클로드라면, 이놈을 상대해 주기 시작하다 금세 말려들곤 했으니 아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겠지만…….’

    내 새끼가 모욕당하는데 참을 수 있는 스승이 어디에 있나.

    “닥쳐.”

    퍼억. 페른을 주먹으로 한 대 친 후, 나는 그를 마법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짜부라뜨릴 듯이 그를 속박해 버렸다.

    “아야야. 아파요. 클로드 님.”

    “이만하고 꺼져. 죽기 싫으면.”

    “저도 목숨은 중한 줄 알죠.”

    “그래. 그러니 죽여 버리기 전에 영영 꺼져.”

    내 말에 깔깔 웃기만 하던 페른이 돌연 고개를 옆으로 꺾더니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 뭐야? 진짜 클로드 님은 어디 갔지?”

    “……!”

    “클로드 님은 날 혐오해서 이렇게 자비롭게 속박 마법 따위 걸지 않아. 뼈 몇 마디가 부러지고 골절될 정도의 강력한 공격 마법을 날리면 또 모를까. 이건 너무 무른 짓이야.”

    그런 걸로 영혼이 뒤바뀐 걸 아는 그쪽이 비정상이지 않을까.

    나는 이 또라이 스토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벌써부터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짜라면 어쩔 건데.”

    “죽여야지! 그리고 진짜 클로드 님을 다시 불러들일 거야! 너 같은 무른 허접한 새끼가 어떻게 위대한 클로드 님을 쫓아내고 육체와 힘 전부를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콰아아아앙.

    아…… 시끄럽네.

    ‘그냥 클로드처럼 힘으로 밀어붙이자. 강한 마법사니 죽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거대한 손을 이용해 클로드를 바닥에 내려놓고 망치로 못을 박듯이 그를 지하 깊숙이 파묻어 버렸다. 깊이, 더 깊이.

    “으아악! 이런다고 가짜가 진짜가 될……. 마법사 살려!”

    “아직 더 땅에 쑤셔 넣어도 되겠네.”

    망치질은 계속되었다. 소음 차단 마법을 걸길 잘했다. 착한 어린이들 정서 발달에는 나쁘겠지. 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