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로라는 몹시 기뻐하며 이 소식을 곧바로 피델리움 변경백에게도 전했다. 전서구를 이용하려는 것을 내가 마법으로 대신 보내 주겠다며 말렸다.
“하지만 대마법사님께 이런 자잘한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다음 생에서도 갚지 못할 수준이에요.”
“……그냥 내가 하게 해 줘, 로라. 마법은 써먹으려고 있는 거 아니겠어? 엘리엇 경께는 나도 빨리 전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니 편하게 있어.”
마법을 통해 공간을 뛰어넘어 피델리움 백작령에 전해진 편지는 엘리엇을 한달음에 수도로 다시 달려오게 만들었다.
어찌나 말을 빠르게 몰았는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는 초췌한 몰골로 황태자궁에 짐을 푸는 우리를 찾아왔다.
“이, 이게 정말입니까? 대마법사님?”
“네. 그렇습니다. 황제도 이걸 어길 순 없어요.”
“맙소사.”
감격한 엘리엇은 로라와 똑같이 내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고 했다. 어른 공경이 당연시되는 나라 출신인 나로서는 도저히 연로하신 분이 절하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어 간신히 그를 뜯어말렸다.
“황제 폐하께서 대마법사님을 가만두지 않으려 했을 텐데요.”
엘리엇은 기뻐하면서도 나를 걱정했다. 황제가 언제든 내 모가지를 뚝 분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며 안전을 당부했다.
“괜찮습니다. 못 어기도록 제약을 걸어 뒀거든요.”
“……그걸 황제 폐하께서 내버려 두셨습니까?”
“약간의 속임수를 썼죠. 제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으로요.”
마법의 정의와 선은 내 결정을 존중해 줬다. 내가 클로드에게서 받은 힘은 단 1퍼센트도 줄어들지 않았고, 어떤 고통이나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선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
“몸이 아프신지 병석에 누워 계시단 이야길 들었습니다.”
화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건 제약을 무시하고 율리시즈를 죽이려 들었다가 끔찍한 통증을 겪은 탓이었다.
“아마 족히 한 달은 못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데요?”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할 만한 고통이 단시간에 벼락처럼 내리꽂혔으니 한 달간은 꼼짝 못 하고 앓아누워야 할 거다. 진작에 이러지 못했음이 아쉬울 정도였다.
내 말을 들은 엘리엇은 아직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상태였음에도 빛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1황자, 아니 이제는 황태자 전하의 일도 감사드립니다.”
“뭘요.”
로라와 나는 황후궁을 떠나 황태자궁에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황태자궁은 카밀라의 손을 탔는지, 그녀의 취향대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음, 아무래도 이거…… 카밀라가 자기가 낳을 아들을 위해서 꾸민 거겠지?”
“그렇겠죠?”
“그럼 싹 다 갈아엎자. 이제 여긴 유리를 위한 공간이니까.”
몇 안 되는 시녀들을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들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두둑한 돈을 쥐여 보낸 건 물론이었다.
‘셀레스틴과 비슷한 비극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지.’
그들이 당장은 율리시즈에게 충성하더라도, 그 마음이 황비의 재물이나 협박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자질구레한 일까지 전부 내가 도맡기로 결심했기에 선택은 빨랐고, 후회는 없었다.
로라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궁의 모습을 그린 설계도를 완성한 후, 그것을 그대로 현실로 옮겼다.
“[펼쳐져라.]”
마법을 쓰자 오직 율리시즈만을 위한 가구가 들어서고, 벽지가 새로 칠해졌다. 아직 어린아이임을 감안해 가구는 모두 모서리가 둥글고, 벽지는 아기자기한 색을 골랐다. 더 안락해진 아기 요람 위에는 색색깔의 모빌이, 젖병과 쪽쪽이를 비롯해 배내옷까지 전부 새것이 준비됐다.
“와아아!”
“꺄우으아!”
“이 모든 것이 마법으로 한 번에…… 역시 대마법사님이시군요.”
로라와 유리, 엘리엇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벌리며 신기해했다. 윈터는 자기가 칭찬받은 게 아닌데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우쭐댔다.
“크흠, 우리 주인님이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라고요.”
“그건 이미 압니다.”
“맞아. 그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윈터.”
“흠! 흠! 더 알아 두란 의미입니다!”
“그러지 마, 윈터……. 이거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
“주인님은 공짜 노동력을 착취당해선 안 됩니다! 안 된다구요!”
“’약속’을 지키는 거잖아. 화내지 마.”
“화 안 냈습니다…….”
윈터를 달래 주고, 나는 마저 황태자궁을 말끔히 새로 정돈했다. 로라가 머물 곳도, 나와 윈터가 머무를 방도 의견을 들어 가며 취향껏 꾸며 놨다.
로라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 앞으로 책정되는 예산에서 한 푼도 안 나가다니……. 예산이 매년 남아돌 것 같아요.”
“그건 유리 몫의 용돈인데 이런 사소한 일에 쓸 수는 없죠.”
“주인님,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대공사라고요.”
“안 들려, 윈터.”
내 맘대로 할 거야.
윈터의 잔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새 단장을 마쳤다. 유리는 새로이 마련된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괜찮아, 유리? 여기가 마음에 들어?”
“꺄우아!”
“이제부터 여기서 같이 살 거야. 성년이 될 때까지, 무사히 너를 지켜 줄게.”
“우아!”
제법 자란 황금 실타래 같은 금발이 귀여웠다. 나는 유리를 배불리 먹이고, 트림을 시킨 후 굿나잇 키스를 해 줬다.
“잘 자. 내 아기 황자님.”
새로 단장한 황태자궁은 더욱 치밀한 보호 결계로 뒤덮어 놨다. 거미줄보다 촘촘하게 짜 놨기에 어지간한 상급 마법사라도 이걸 뚫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 이것도 해 놔야지.”
나는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을 추가적으로 걸어 놨다.
혹시라도 내가 한 일들로 인해 발광하는 황제나 황비의 악에 받친 비명이 이곳으로 절대 새어 들지 않도록.
* * *
“아아아악!”
카밀라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황후였던 셀레스틴이 죽어 꽃처럼 피었던 그녀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클로드 하센티온! 그 개자식이 모든 걸 망쳤어!”
드디어 황후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날 제 자식은 적법한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되어 황태자에 봉해질 거라 기대한 게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대마법사라는 존재가 그 행복한 미래를 난도질해 놨다.
기분 좋게 황제에게 황후로 책봉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러 간 카밀라는, 바닥에 엎어져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리는 황제를 발견했다.
‘끼아악! 폐하, 폐하! 거기 누구 없느냐!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카밀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시종들과 어의가 급히 달려왔다.
‘크으…… 크아아아악!’
그들이 도착했을 때도 황제는 고통에 신음하며 허우적거렸다. 두 눈은 뒤집히고, 몸은 경련하며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황제 폐하께서 왜 이러시지? 독인가?’
‘아닙니다. 이건……. 병이나 독 같은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한 건 궁정 마법사를 데려와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의의 말대로 궁정 마법사를 데려왔더니, 그가 한 말이 가관이었다.
‘이런…… 이건 어길 수 없는 계약을 위반하려다 걸린 흔적입니다.’
‘뭐라고?’
‘아주 강력한 마법으로 새겨진 계약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마법사도 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게 만들어 놨군요. 지나치게 정교하고, 풀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필요해 대마법사이신 클로드 님 이외에는 아무도 못 풀 겁니다.’
‘……대마법사?’
궁정 마법사의 말에 카밀라는 상황을 파악했다. 계약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그녀와 황제에게 절대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건 직감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황제가 불리하게 계약을 맺었고, 그것을 어기려다 이 꼴이 됐다는 것을.
‘족히 한 달은 몸을 보전하셔야 될 것입니다.’
어의가 내린 처방은 카밀라에게 무력감과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 * *
“아아아아악!”
물건을 수없이 던지고 부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카밀라는 절규했다.
한 달이 지나서 멀쩡해진 황제가 그녀를 황후에 책봉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입니까!’
‘……대마법사, 그 작자와 맺은 불공정 계약 때문이다. 1황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황비는 황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1황자라도 죽여 주십시오!’
‘짐도 할 수만 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황제가 노호성을 질렀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면서. 그는 대마법사를 찢어 죽일 것처럼 분노했으면서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마치 박제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개구리 표본처럼.
‘서, 설마…… 그것도 계약 때문입니까?’
‘그래! 그 망할 계약 때문에 1황자를 건드릴 구실이 하나도 없어졌다.’
‘왜! 왜 그러셨습니까! 저라도 대동하고 하셨으면 이렇게까지는…….’
아차. 황비가 황급히 입을 막았으나 때는 늦었다. 황제는 그 말에 완전히 돌아 버렸다.
‘……지금 짐이 한낱 계집인 너보다 못하다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내 어머니를 닮아 아껴 주었거늘 이런 망언이나 하다니. 당장 꺼지거라!’
“이게 다 대마법사 때문이야…….”
카밀라는 눈물범벅이 된 채로 세진을 원망했다. 산달이 다가온 몸으로 패악을 부리고 있었으나, 그녀를 감히 말릴 사람은 없어 지켜보기만 했다.
“나라도, 나라도 가서 이 일을 따져야만…… 으윽!”
“황비 마마!”
“어의! 어의를 불러라! 빨리!”
그날,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카밀라는 예정보다 일찍 아이를 출산했다.
“……건강한 황녀 전하이십니다.”
“안 돼…… 안 돼!”
카밀라가 낳은 아이는 딸이었다. 일전에 죽인 주술사의 말과 같았다. 성별을 바꾸고자 했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에 카밀라는 또 한 번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