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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2화 (22/90)
  • 22.

    내 말에 황제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듯했다.

    “카밀라의 투정을 받는 정도야 괜찮지만…… 1황자를 황태자로 올려 달라는 건 무리수라고 생각하지 않소, 대마법사? 그대가 이 제국의 신하가 되고, 짐에게 복종하게 되면 그 아이의 목숨도 보장하기 어려울 터인데.”

    ‘역시 유리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구나.’

    어떻게 저렇게 무자비할까. 어쨌거나 율리시즈는 황제의 친아들이 맞는데.

    “1황자 전하를 황태자의 직위에 올려 달라는 것 역시 기한을 정해 두었습니다. 앞선 조건과 마찬가지로 전하께서 성인이 될 때까지만입니다.”

    “그대가 보호하는 아이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

    “그렇습니다. 제국의 황제께서 설마 약속을 어기시진 않으시겠지요?”

    어기겠지. 황제는 신의 따위 모르는 인물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거침없이 죽여 버린 인간에게 사람의 도리 따위를 기대하진 않았다. 입에 침만 발랐을 뿐이지.

    “그렇다면?”

    “1황자 전하께서 무사히 성인이 되시면, 저는 그분과 함께 이 나라를 떠날 생각입니다. 저는 전하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떠나고 난 뒤의 일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이건 거짓말.’

    나는 카밀라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셀레스틴의 죽음을 반가워하며 깔깔 웃어 댈 때 결심했다. 절대 저 여자가 소원하는 건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들겠다고.

    그건 아마도 율리시즈가 어른이 된 이후에,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알게 되면 바랄 일이기도 하니까. 복수의 초석을 지금 내가 다져 두는 거다.

    적어도 그 아이가 빈센트와 같이 폭주하여 죽는 일은 없도록.

    황제는 고심하는 척했다. 나는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여 그의 검은 속내를 읽을 수 있었기에 그것이 단지 흥정하는 장사꾼의 태도라는 걸 알았다.

    ‘너무 남는 거래군. 대마법사가 건 조건이야 먼저 이 제국에 속하겠다고 맹세하게 만들면 다 깰 수 있는 것들이야. 카밀라야 상관없지만, 1황자를 황태자로 둬서 후환을 남길 수야 없지.’

    비열한 빈센트는 나를 마리오네트처럼 쓰다 내팽개치고 제 욕심만 채워 버릴 요량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다. 황제는 나라는 인간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악취미였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렇다면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허공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자 순식간에 우리가 나눈 계약의 내용이 적혔다. 황제에게 건네자 그는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바로 서명했다.

    “이거면 되나?”

    “예.”

    그가 계약서를 던지자 종이가 날개 달린 새처럼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마저 서명을 한 뒤,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이 계약이 절대 깨질 수 없는 것임을 명시했다. 그러자 계약서가 푸른빛을 내며 내 속에 녹아들었다.

    “제 마력이 담긴 피를 넣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계약의 내용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그대가 제국에 한시적으로나마 적을 두겠다고 맹세할 차례군.”

    “네. 하지요.”

    나는 마법진 하나를 띄우고 거기에 내 마력을 실어 말했다.

    “[맹세한다.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가 성인이 되는 날까지, 나 클로드 하센티온은 윈프리드 제국에 속한 자가 되어 헌신하겠다고.]

    맹세가 끝나자 푸른 마법진은 다시 빛을 발했다. 나와 황제의 계약은 성립했다.

    황제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대마법사는 지금 이 시간부로 윈프리드 제국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거로군?”

    “예.”

    “……내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광소를 터트리며 내게 명령했다.

    “제국에 속한 자는 곧 황제의 재산이니, 그대는 내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겠지! 첫 번째로 명령한다. 무조건 내 말에만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어라!”

    “…….”

    내가 당황해하자 황제는 즐거워했다. 그는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명령이다. 그대가 내건 조건은 모조리 무효화한다. 세 번째 명령은 네가 직접 율리시즈를 죽이는 것이다.”

    대마법사를 완전히 속박했다고 여겼는지 황제는 더는 내게 존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도 않은 인간이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나는 살육을 기대하며 웃는 황제를 향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느긋한 목소리로 그의 기대를 부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너는 언제나 정의와 선을 지키는 마법사다. 그렇다면 맹세를 어길 턱이 없지. 공연히 저항하는 건 관두는 게 좋을 것이다. 어서 짐의 명령에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서서히 황제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의기양양했던 얼굴은 당혹스러움과 경악으로 가득 찼다.

    “뭐, 뭐지? 대마법사,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계약대로라면 그대는 분명 내 말에 복종해야 할 터인데!”

    제 생각대로 되지 않자 발광하는 황제를 나는 속으로 실컷 비웃어 주었다.

    “폐하께서 저열하게 나오실 줄은 알았습니다. 아버지인 선황제 폐하도, 선대 황태자 전하를 비롯한 친족들도 모조리 씨를 말리시고 이제는 죄 없는 황후 폐하까지 죽이셨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폐하의 뭘 믿고 그리 위험한 맹세를 하겠습니까?

    “네놈이……! 감히!”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단, 제가 폐하께 제시했던 계약서만 효력이 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제게 요구한 맹세의 진은 환상 마법으로 만든 가짜였으니까요.”

    ‘현 황제 빈센트가 과연 거래를 제시하면 어떻게 나올까.’

    이에 대한 답을 예측하는 건 쉬웠다. 원작에서도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제 아들인 율리시즈를 해치려고 했다. 그러니 내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을 게 당연했다.

    그래서 빈센트를 속였다. 맹세의 진과 똑같은 환상을 그려 그를 안심시키는 것으로 눈속임을 한 것이다. 처음에 계약서를 서명한 뒤 내게로 스며들게 한 이유도 그와 같았다.

    ‘황제가 이 계약을 다른 마법사를 불러서 파기할 수 없게 해야 해.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편이 제일 안전하겠지.’

    “당신은 내게 그 어떤 요구도, 명령도 내릴 수 없습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윈프리드 제국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오로지 내가 보호하기로 ‘약속’한 제 1황자 율리시즈의 안위만을 살필 것입니다.”

    “클로드 하센티온!!”

    분노한 황제가 내게 술잔을 집어 던졌다. 분기탱천해 체면도 갖다 버린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도 않고 윈터에게 뒤처리를 맡겼다.

    “주인님께 해를 끼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페럿 집사는 믿음직스럽게도 나를 향해 날아오는 은 술잔을 주먹으로 내리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공격마저 소용이 없어지자 황제가 소리를 질렀다.

    “이건 무효야! 마탑에 항의하여 네놈의 대마법사 직위를 박탈하겠어. 그리고 이곳에서 추방해 버리겠다! 신성한 맹세를 앞두고 남을 속이는 짓거리를 벌였으니 넌 이제 끝이다.”

    황제는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생각으로 발악했다.

    하지만 내게 그건 우스운 말일 뿐이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니.”

    대마법사라는 허울 따위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음을 희망하며 사는 삶인데, 무엇이 두려울까.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나는 윈터를 데리고 다시 공간을 열어 유리에게로 향했다. 황제는 유유히 사라지는 나를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내가 네 요구대로 해 줄 줄 아느냐? 천만에! 1황자 그것은 절대 황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글쎄. 당신 마음대로 안 될 거라니까.

    ‘내가 제시한 조건을 어기면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 가해지도록 설정해 놨거든.’

    아주 작은 글씨로 구석에 적혀 있어서 황제는 미처 못 봤겠지만. 그것도 눈에 안 띄는 잉크로 말이야.

    속이 다 시원했다. 화병이 날 황제와 황비를 상상하니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졌다.

    사랑스러운 아기 황자가 돌아온 나를 웃으며 반겼다.

    “아우우!”

    “……어라. 대마법사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기 요람 옆에서 쪽잠을 자던 로라가 부스스 눈을 떴다.

    “어떻게 알았어?”

    “휘황찬란한 정복을 입고 계시기에, 업무라도 보고 오신 줄 알았어요.”

    로라의 말대로였다. 나는 셀레스틴을 처음 만나러 왔을 때 입었던, 윈터가 손수 골라 준 그 화려한 정복을 입고 있었다.

    “황제를 만나고 왔어.”

    “……네?”

    “이 시간부로 유리는 황태자야. 로라. 황태자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그리고 카밀라는 절대, 절대로 황후가 되지 못할 거야.”

    “무…… 무슨 일을 하시고 온 거예요?”

    “별건 아니었어.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혼란과 당황 속을 오가면서도 내 말에 로라는 눈물부터 주륵 흘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짚으며 재차 물었다.

    “정말인가요?”

    “응.”

    “그럼 이제…… 황후 폐하께서 지하에서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실 일은 없겠군요.”

    로라는 입가를 가린 손을 치우고 환히 웃었다. 울면서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는 소리를 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런 소리를 해서 로라의 기쁨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 싶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라는 무릎을 꿇고 내게 엎드려 절을 하며 감사 인사를 몇 번이고 전했다.

    “이러지 마. 로라. 무릎 아프겠다.”

    “그, 그래! 주인님께서 불편해하시니 어서 일어나라. 로라.”

    윈터도 로라를 일으키려 애썼지만, 윈터의 완력으로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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