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1화 (21/90)

21.

황후의 죽음은 이후 별다른 파장을 자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저는…… 황후 폐하의 안식을 위하여 애도의 기간을 가지겠습니다.”

엘리엇 피델리움 변경백은 비참한 딸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잠시 영지로 내려갔다. 셀레스틴의 고향인 피델리움에 그녀의 소식을 알리고 추모식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로라는 많이 야위어 뺨이 폭 패였다. 그녀는 매일 밤 셀레스틴이 죽던 날 밤의 일을 복기했다. 눈이 붉게 충혈된 로라는 산송장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로라는 그녀에게 배정된 업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셀레스틴의 분신인 양 1황자 율리시즈를 더욱 극진히 대했다.

“이게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 바라시는 일일 테니까요.”

로라는 핏발 선 눈으로 우는 듯 웃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라와 엘리엇, 두 사람은 잔혹한 현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자 했다.

피폐해진 와중에도 다시 삶의 희망을 붙잡으려는 그들을 보며 나는 내가 있었던 원래 세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사라진 후의 내 가족들은 저러지 않겠지.’

엉망인 가족이었다. 가족이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삼아 누덕누덕 기운 것에 불과한 화목을, 나는 오래도록 붙들고 애정을 구걸하다 스스로 뛰어내림으로써 끝을 냈다.

“윈터.”

“뭔가요, 주인님.”

“돌아가신 황후 폐하가 부럽다면, 몹시 실례인 말이겠지?”

“로라와 변경백 앞에서는 그 말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대마법사라도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건 나도 알아.”

시답지 않은 대화로도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품에 언제나 안고 다니는 유리의 온기로도 그 구멍을 메우긴 어려웠다.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이 아이를 무사히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꺄우?”

아무것도 모른 채 쪽쪽이를 빠는 유리는 천진난만했다. 작은 손바닥을 펴며 내게 닿으려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신랄하기 그지없는 윈터도 이 아기에게만큼은 정을 주었다.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전의 클로드가 정의와 선에 기반한 선택을 했으니까? 난 클로드가 아니야.”

이미 셀레스틴이 죽었다. 내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독을 마시고 죽어야만 했다.

이런 건 끔찍했다.

“난 클로드가 아니야. 어차피 내가 클로드와 계약하여 얻는 대가는 정의롭지도, 선하지도 않아.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지.”

편안히 죽고 싶다는 그 초라하고도 추레한 욕심을 위해서.

“그래서요? 황후 폐하의 죽음이 덧없었다고 자책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당장의 오욕을 뒤집어쓴다 해도 그분을 살려야 했다고요?”

윈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그래야 했어. 유리에겐 아직 어머니가 필요하잖아.”

“아니요. 황후 폐하의 관점에서 보자면, 1황자 전하께 필요한 건 주인님이십니다. 당신이 있어야 ‘약속’은 이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괜한 절망에 빠져 있지 마십시오. 주인님 역시 현실을 딛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작은 갈색 털의 페럿 집사는 나를 이끌고 창 쪽으로 이끌었다. 고작 옷자락만 쥐고 향할 뿐인데 힘이 장사였다.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봄을 알리던 꽃은 시들었고, 흐릿한 먹구름 아래로 굵은 장대비가 내리고 있어요.”

윈터의 말대로였다. 우중충한 날씨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윈터가 가리키는 곳에는 카밀라가 사는 황비궁이 보였다.

“보세요, 들으세요, 주인님. 당신이 넋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동안 어떤 악귀 같은 이는 기쁨에 춤을 추고 있었다는 걸.”

윈터가 허공에 공간의 틈을 만들어 내게 그곳에 눈과 귀를 기울이게 했다. 작은 틈이었으나 윈터가 누굴 보라는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하하! 드디어 그 여자가 죽었어! 이제는 내가 진정 황후가 될 수 있겠지!”

철없는 아이처럼 카밀라가 활짝 웃으며 경쾌한 스텝을 밟았다. 이름 모를 춤이었다. 아마 카밀라가 황궁으로 입성하기 전 저잣거리에서 추던 춤 같았다.

카밀라는 히죽거리며 셀레스틴의 비극을 기꺼워했다. 그리고 가엾게 죽은 그녀의 마지막을 들먹이며 모욕했다.

“똑똑하기는. 얼마나 멍청한지 모르겠어. 나라면 차라리 내 주변이 모두 다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의 불명예를 입어도 살아남는 걸 택했을 거야.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아득바득 살아남기만 하면 훗날 황자야 다시 생산할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족 출신이란. 하하!”

‘죽일까?’

선인장처럼 삐죽 곤두선 클로드의 마력이 내게 그렇게 물었다.

머리가 아팠다. 클로드가 준 책을 읽어 카밀라가 악한 사람이란 걸 알았지만 저 정도로 경박하고 상스러울 줄은 몰랐다.

“……윈터, 내가 어떻게 해야 좋았던 걸까?”

“주인님의 탓이 아닙니다. 악의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인간의 탓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막았어야 옳지 않았을까.”

“주인님이 차고 계신 아티팩트의 빛이 바래지 않았잖습니까. 그렇다면 주인님이 하신 결정이 옳았다는 소리입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

윈터는 답지 않게 상냥했다. 그만큼 내가 좌절과 절망 속을 헤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고마워. 그런데 위로는 안 된다.”

“흠, 까다롭고 예민하신 분이시로군요. 제 ‘진짜’ 주인님께서는.”

“그럴지도.”

원래 내가 있던 세상에선 늘 그런 말을 듣고 살았으니까. 내가 괜한 유난을 떠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냥 잊고 살아가면 좋을 것을.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 이미 한 번 죽음을 택했고, 지금 여기에 있다.

“윈터, 내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어.”

“뭔가요? 분부만 내려 주시면 주인님께서 가는 길을 따르겠습니다.”

“황제를 만나자. 그와 만나 담판을 지을 게 생각났어.”

앉아서 울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공간을 열어 윈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 * *

내가 향한 곳은 중앙궁에 위치한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일은 하지 않고 술이나 유유자적 마시던 황제는 내가 갑자기 나타나자 당황했다.

“대마법사, 이게 무례라는 건 아시오?”

“알죠. 하지만 워낙 급하게 드릴 제안이 생겨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무엇이길래 그렇지?”

호기심이 동한 황제는 술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는 내가 황후의 죽음으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까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왔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나라에 묶여 있겠습니다.”

내 말에 황제는 숨이 멎을 듯이 놀랐다. 벌겋게 취한 그의 얼굴에서 탐욕스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게 정말이오?”

“단, 기한은 제가 보호하는 1황자 전하가 성인이 되실 때까지입니다.”

“흐음, 나야 좋소. 하지만 이런 엄청난 제안을 대가 없이 꺼내지는 않았을 테고…… 윈프리드에 묶이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시오? 그것 때문에 왔을 터.”

정답이었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거래를 제안하러 온 것이니.

“두 가지를 요구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손해이지 않소?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을 들어줄 텐데.”

“저라는 개인의 가치가 두 가지 조건에 견줄 만큼 크다고 생각하니 제안하는 것입니다. 싫으시다면 한 가지를 더 추가하지요.”

‘클로드는 괴짜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기인이었지.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게 내겐 더 유리할 거야.’

내 생각대로 황제는 즉각 싫다는 기색을 드러내면서 불쾌해했다.

“……좋소. 어디 들어나 보지.”

‘이미 내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기세등등하네.’

하지만 내가 현 황제의 뜻대로 움직여 줄 일은 없을 거다.

“첫째, 카밀라 황비가 황후가 될 수 없도록 약속해 주십시오. 기한은 똑같습니다. 제 1황자 율리시즈 전하가 성인이 될 때까지.”

“뭐라고?”

황제가 기막혀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두 번째 조건도 말했다.

“둘째, 제 1황자 율리시즈 전하를 황태자에 올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

“허…… 하하하하하!”

개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황제가 폭소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낄낄거렸다.

“그걸 내가 받아들일 거라 보시오?”

“받아들일 거라 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든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현 황제 빈센트는 반란을 통해 모든 황족을 죽이고 황위에 오를 정도로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이었다.

빈센트의 내면에는 살심이 꿈틀거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살인자로 태어난 자였다. 그렇기에 살육이 넘쳐나는 전쟁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대륙은 현재 평화로웠고 그가 반란을 통해 황위에 오른 만큼 지지하는 귀족들의 눈치를 아주 안 볼 수는 없었다.

‘반란의 일등 공신들은 지금의 안락한 위치를 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 또한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와 군사를 대야 할 테니, 전쟁을 꺼릴 수밖에요.’

윈터가 내게 가르쳐 준 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듣고 절대 황제가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호오…… 그래. 대마법사께서는 짐에 대해서도 무척 잘 알고 있군. 그래. 짐은 피와 공포를 원한다. 지금처럼 평화롭기만 한 때는 지겹지. 술과 여자로 향락을 즐기며 해소하려 해도 잘 안 되더군.”

하지만 나를, ‘클로드 하센티온’에게 다른 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만 내리면 전쟁은 충분히 일으킬 수 있었다. 나라는 개인 하나만으로도 한 나라를 궤멸하는 것까지도 가능하니까.

“어떻습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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