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0화 (20/90)

20.

“여기서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저 혼자 움직이겠습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홀로 가신다면 필시……!”

“압니다. 하지만 제 사람들이 저 때문에 희생당할 수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셀레스틴은 시종장을 재촉했다.

“무엇 하는가. 그대가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오지 않았던가. 자, 어서 나를 폐하 앞으로 이끌게.”

결연한 태도로, 곧게 허리를 펴서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제국의 황후였다. 엘리엇 피델리움은 혀를 깨문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황후 폐하만을 생각하십시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 주십시오.”

그 말에 셀레스틴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안개꽃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들어 드리지는 못할 것 같군요.”

셀레스틴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황제의 부름을 받은 뒤, 다 죽어 가는 상태로 궁에 돌아왔다.

* * *

현 황제, 빈센트는 탐욕스럽고 다소 아둔하기는 하나 영악한 면이 있는 폭군이었다.

그는 제 침실의 시종들을 전부 물리고 황후와 독대를 나눴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황후, 그대를 여기 왜 불렀다고 생각하나?”

“……항간에 떠도는 괴이한 헛소문 때문이리라 보고 있습니다, 폐하.”

빈센트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황후로 앉힌 저 여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왔으면서도, 이게 제 무덤이 될 걸 알면서도 태연히 기어들어 왔다.

‘진짜 저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마법사라는 거물이 나타나니 소금 알갱이만큼의 의심이 돋아났다.

저 여자가, 과연 황제에게 복수할 마음이 아무렴 없었을까?

1황자를 그리 예뻐하는 대마법사가 그의 친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인이 마음에 한을 품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걸 갚는다던데,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앗아 간 황제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황제는 황후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황후, 여기 그대를 위해 준비한 술잔이 있소.”

빈센트가 가리킨 곳엔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담은 잔이 있었다. 금으로 만들고 겉에 보석으로 장식한 것이 몹시도 화려했다.

“그대가 소문과 다르게 아직도 내게 정절을 지키고 있다면, 이 잔을 쭉 들이켜시오.”

“…….”

“소싯적 영민하고 총명했던 그대이니 내가 이 잔에 무엇이 들어갔을지는 이미 알고 있을 터. 자, 이제 그대의 결백을 주장해 보시오.”

‘저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셀레스틴은 빈센트를 늘 증오했다. 그를 죽이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폭압적인 빈센트 앞에서 늘 자비를 구걸하며 웅크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연하게 왔다지만, 그녀도 사실 도망치고 싶었다.

‘잔에는 분명…… 독약이 들어 있겠지. 지금의 내게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아마도 위스퍼.’

소문의 바람잡이는 황비, 카밀라일 것이다. 카밀라가 황제에게 무어라 속살거렸을지는 뻔했다. 그녀는 셀레스틴을 완전히 끝장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뭐 하시오? 평소 고아한 황후이니 어서 마실 줄 알았거늘.”

“…….”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마시기를 거부하면, 그 즉시 황제는 황후와 대마법사 간의 염문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를 찍어 누를 것이다. ‘언제나 올바른 선’을 훼손당한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의 명예는 추락하고, 그는 이 제국을 위해 살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되어야 할 테다.

‘내 아들…… 내 아들은 처형당하겠지. 결국 나와 내 가문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참혹한 인생이 기다릴 것이다. 셀레스틴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황제의 비정한 면모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웃으며 잔을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무궁한 평온을 위하여.”

말을 끝내자마자 셀레스틴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역시 당신은 그런 선택을 내릴 줄 알았지. 흐음, 이것 참 재미없는걸. 너무 뻔해.”

빈센트는 빈정거리며 그녀를 빤히 관찰했다. 셀레스틴은 식도와 위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챘다.

“황제 폐하…… 당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체내에 축적된 위스퍼의 양이 한계를 넘자, 셀레스틴의 몸 곳곳이 검푸르게 물들었다. 입과 코, 귀를 비롯한 구멍에서는 피가 흘렀고 산 채로 불에 태워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

“……!”

고통이 지나치게 심해서 셀레스틴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피 흘리는 몸을 웅크리고 경련하며 의식을 잃어 갔다.

그 광경을 황제는 즐거이 바라봤다.

“이제야 죽는구나. 오래 기다렸도다. 짐이 아직 일개 황자였을 무렵, 그대도 치우고 싶은 인물 중 하나였지.”

“……어.”

“죽으라고 저주하는 건가?”

“나를… 제발, 컥, 내 궁으로 보내 주시오. 아직 의식이 있을 적에…….”

빈센트는 셀레스틴의 부탁에 잠시 고민했다.

“흠, 그렇게 하는 게 그대가 사랑하는 이들에겐 더 큰 고통이겠군. 좋아, 이쪽이 더 재밌겠어.”

“…….”

“시종장! 그대가 황후를 부축하여 황후궁으로 어서 보내 주도록 하게.”

‘내 아들에게…… 꼭 해 줘야 할 말이 있어.’

그것을 위해서라도 아직은 죽어선 안 되었다. 아직은…….

* * *

셀레스틴이 돌아왔다. 그러나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시종장의 등에 업혀 온 황후의 모습은 온통 피범벅이어서 참담했다.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한 피델리움 변경백은 혼절할 뻔했다.

“이… 이게… 대체…….”

“저는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화가 미칠까 두려웠던 시종장은 냉큼 황후를 내려놓고 달아났다. 셀레스틴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내… 아기는……?”

“여기 있습니다. 황후 폐하!”

로라가 통곡을 하며 내 품에 안긴 율리시즈를 가리켰다. 아이는 놀라서 굳었다. 로라가 엉엉 울며 셀레스틴의 피를 닦아 낸다 한들, 그녀에게서 지독하게 풍기는 죽음의 냄새를 없애진 못했으므로.

“내… 아들. 내 소중한 아기……. 너, 만큼은 살아남아서 행복해지렴.”

그게 끝이었다.

쿨럭, 하는 큰 기침 소리와 함께 핏덩어리를 토해 낸 황후는 눈을 뜬 채로 절명했다. 딸의 숨이 멎자마자 그녀의 아버지인 변경백은 오열했다.

“안 된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데…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 줄 수는 없는데…….”

로라는 눈물샘이 고장 나기라도 한 것처럼 하해와 같은 눈물을 쏟아 냈다.

“황후 폐하… 폐하…….”

두 사람은 그들이 몹시 사랑하고 아꼈으나 지키지 못한 여인을 끌어안고 슬피 울었다. 그들의 슬픔과 충격에 전염되어 율리시즈마저 서럽게 울어 댔다.

“으애애애앵, 으애애애애앵!”

“…….”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셀레스틴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나는 로라와 엘리엇과는 다른 생각으로 인한 충격을 받았다.

‘……예정된 일을 바꾸려고 해도,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되는 건가?’

내 품에서 우는 이 아이, 유리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복수심에 폭군으로 각성한다고 했다. 셀레스틴은 죽었다. 원작과 다를 바 없이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조차 운명대로 죽게 된다는 건가?

‘안 돼.’

그럴 수는 없었다.

나를 죽음으로 인도해 줄 너를, 이리도 사랑스러운 너를 고통만이 가득한 결말이 집어삼키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는 아이를 토닥였다. 통곡을 잠시 막아 두고, 잠들기 좋은 자장가를 귓가에 속삭였다.

“우으으…….”

훌쩍이던 아이는 이내 눈물을 그치더니, 잠들었다.

윈터가 나를 걱정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니……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소음을 막는 결계를 펼쳐 황후궁 전체를 덮었다. 황비에게 이 통곡이 닿지 않길 바라면서.

눈물로 덮인 밤이 덧없이 갔다.

* * *

황후의 죽음은 어떤 조사도 거치지 않고 묻혔다. 황제의 주장 때문이었다.

“황후는 내게 복수하기 위해 내 앞에서 독을 먹고 자살했다. 이는 황실의 흠이 될 테니 병사로 위장하여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한다.”

황제가 그렇다는데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피델리움 변경백만큼은 반역 모의라도 하고 싶었겠으나, 그의 편을 들다가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았기에 모두들 쉬쉬했다.

셀레스틴의 시신은 하얀 관에 흰 꽃으로 장식되어 황실 묘지에 묻혔다. 미처 감지 못한 두 눈은 그녀의 아버지가 감겨 주었다. 로라는 울고, 또 울었다.

황제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와 로라, 윈터, 엘리엇과 몇 없는 황후궁의 시녀들이 전부였다. 율리시즈는 영문도 모르고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불안해하기만 했다.

“우으으…….”

“유리. 네 어머니인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셨어.”

“우으으으……!”

“너를 지키고,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 그분은 정말 고귀하고 훌륭한 분이셨어.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어서는 아니 될 분이셨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분의 유언은 내가 지켜야 할 ‘약속’과 같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우으!”

“그래. 지킬게. 너도 나도, 원하는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너만큼은 참혹한 죽음에 끌려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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