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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9화 (19/90)
  • 19.

    황비궁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동안, 새로운 말썽이 일어났다.

    [버려진 황후가 대마법사와 통정하고 있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망측한 소문이 황성 내에 들불처럼 번져 갔다. 궁인들은 하나같이 숙덕거렸다. 아니 땐 불길에 연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의심했다. 어느 나라의 왕과 제후도 움직이기 힘들다는 대마법사가 어떻게 ‘약속’ 하나 때문에 황후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는지. 그리고 대마법사가 1황자를 너무나 예뻐하자 그것이 황후의 부름에 답한 이유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1황자가 대마법사와 황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일지도 모른다.]

    명확한 근거나 물증 따위는 없었는데도, 추측뿐인 소문은 무성히 퍼져 황성 내에 독처럼 스며들었다. 소문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황후는 연인이자 예비 배우자였던 선대 황태자를 현 황제의 손에 잃은 적이 있잖아.’

    ‘게다가 원수의 아이를 배고 낳기까지 했지. 자유까지 꺾인 후 천한 신분의 황비에게 무시당하는 한이 엄청났을 거야.’

    ‘그런데 애초에 현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 복수를 위해 대마법사를 끌어들여 그의 아이를 낳은 것이라면?’

    ‘황후가 ‘약속’으로 빈 건 그녀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제법 그럴싸하다는 사람들의 입김에 소문은 흘러 흘러 황후와 황제의 귓가에까지 들어갔다.

    * * *

    황후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분노했다.

    “어떻게 그런 망측한 소문이……! 내 아이, 1황자 율리시즈는 현 황제 폐하의 핏줄이 맞습니다!”

    엘리엇 피델리움과 시녀장 로라도 벼락같이 화를 내긴 마찬가지였다.

    “이건 황후 폐하와 대마법사님을 동시에 모욕하려는 모략입니다.”

    “분명히 또 황비겠지요! 그 사악한 여자가 대마법사님의 존재로 인해 물리적 접근은 불가하니 이런 더럽고 추잡한 수를 쓰는 겁니다.”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황비궁으로 쳐들어가 카밀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모공까지 뽑아 버릴 기세였다.

    “별로 말리고 싶진 않지만, 소문이 완전히 퍼진 이상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든 간에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될 겁니다.”

    나는 덤덤하고 차분하게 우리가 궁지에 몰렸음을 알렸다. 옆에서 윈터가 내 말을 거들어 주었다.

    “황실을 뒤엎을 정도의 추잡한 소문인데도, 여지껏 퍼지도록 내버려 둔 것을 보면 황제 폐하께서 관망하시고 있단 증거겠죠.”

    “어떻게……. 폐하께서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황후 폐하, 저는 주인님을 따라온 외부인에 불과하나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윈프리드 제국의 현 황제는 황후 폐하를 고깝게 여기고 있으며, 제 주인은……”

    “낚아채길 원하죠. 제국을 위해 일하는 인형이 되어 주길 바라면서요.”

    현 황제, 빈센트와의 독대는 늘 불쾌함으로 마무리되었다. 그의 용건은 언제나 같았다.

    ‘제국을 위해 일해 주지 않겠나?’

    빈센트는 제 혈육들을 죽이고 황위를 차지한 인물인 만큼, 탐욕과 열등감으로 가득하고, 잔혹성이 두드러지는 인간이었다.

    그가 나를 원하는 건 제국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함이 아닌, 전쟁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무한함에 가까운 마력을 지니고,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셀 수 없을 정도의 파괴적인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나’는 그에게 군침 도는 무기일 터.

    엘리엇이 하얗게 센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게 물었다.

    “대마법사님을 이 땅에 속박하고자 해서…… 황후 폐하의 명예까지 진창에 떨어뜨렸다는 겁니까?”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요.”

    황제, 빈센트는 황후 셀레스틴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셀레스틴은 전리품이었고, 열등감을 풀 장난감이었으며, 자신의 위세가 견고함을 보여 주는 승리의 지표 같은 것이었으므로.

    “황후 폐하를 추락시켜 제 발목을 묶어 둔다면 황제에게, 이 나라에겐 큰 이득이 되겠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하나를 희생시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손해도 적고요.”

    냉담한 태도로 상황을 분석하는 내게 파랗게 질린 셀레스틴이 다가왔다. 내 팔을 붙잡는 그녀의 손은 몹시도 차가웠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겠죠. 제 아들까지 포함해서요.”

    추문에 얽힌 이상, 1황자 율리시즈의 정통성은 의심받는다. 황후가 끌어내려지면 그녀의 아들인 율리시즈 또한 감히 황실을 능멸했다는 죄로 죽임당하리라.

    “대마법사님께서는 제 아들, 유리를 지켜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이것을 악용하는 겁니다. 유리를 살리고 싶다면 이 나라에 스스로 복속당하길 자처하라고요.”

    항상 맑고 투명하기만 하던 자줏빛 눈동자가 분노와 좌절, 경멸로 물들어 혼탁했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셀레스틴이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황제 폐하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황후 폐하!”

    시녀장 로라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로라는 제 주인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가지 말라 호소했다.

    “그게 황비가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황제 폐하께서 왜 추문을 묵인하셨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반드시 나설 테니까요! 은인인 대마법사님을 지키기 위해서요.”

    로라의 말에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황후가 나선다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는 자들은 더욱 뻐길 것이다. 거보라고, 황후와 대마법사는 사랑하는 사이임이 틀림없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며칠 간의 행복으로 활짝 폈던 피델리움 변경백의 주름은 다시 자글자글해졌다. 그는 셀레스틴과 나의 결백함을 알고 있어 어떻게든 이를 해결해 주고 싶어 했지만,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대마법사님께서 이 사태를 해결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힘으로 모든 걸 뒤엎을 수는 있겠죠.”

    내 말에 엘리엇은 창백하게 낯을 굳혔다.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께 살육을 권하지 마십시오. 피델리움 변경백. 피델리움 백작 가문에 주인님이 한때 빚을 지신 것은 맞으나 그 일로 주인님의 손에 피를 묻히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윈터가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네 발로 서서 이빨을 드러냈다. 항상 사람처럼 뒷발로만 서서 품위 있게 다니던 윈터였는데, 내가 곤란해질 위험에 처하자 예민해진 듯하다.

    “주인님은 오로지 ‘올바른 결정’만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힘으로 이번 소문을 막게 되면 앞으로 주인님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절대 고울 리는 없겠죠.”

    설령 이게 올바른 결정이라고 해도, 추문을 퍼뜨린 이들 전부를 몰살한다면 그것 자체로 악한 자가 된다.

    인간은 같은 인간을 죽인 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내 생각도 그래. 윈터.”

    “주인님!”

    “아마 이 점을 노려 작정하고 추문을 퍼뜨렸겠지.”

    클로드의 인생은 찬란했지만, 매 순간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세계를 창조한 여신의 선택이라도 받은 듯 엄청난 재능을 타고난 마법사인 클로드를 질투하는 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건 그동안 클로드가 철저히 무시해 왔던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찬란하게 빛나던 별의 몰락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디든 존재했다. 클로드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은 이 사태를 반기며 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궈지는 순간을 음미할 것이다.

    엘리엇의 얼굴이 이제는 시커멓게 물들어 갔다.

    “……죄송합니다. 대마법사님. 제가 황후 폐하와 1황자 전하의 안전에 눈이 멀어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그것보다…… 황비 측은 단단히 앙심을 품고 준비한 것 같네요. 대마법사 직위를 얻을 정도로 강해진 초월자는 그 힘을 악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대규모 마법 같은 건 제약을 걸어 두거든요.”

    이를테면 다수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삭제하는 마법이 그랬다.

    “그렇다면…….”

    “사적인 목적으로 대규모 기억 조작 마법을 걸면, 그 즉시 제 존재는 이 나라에서 추방될 겁니다. 그게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은 자가 받아야 하는 벌이니까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거군요.”

    “네. 마법사에게 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건 제 살을 깎아 먹는다는 것과 동일하니까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최악의 결과만 도출되다니. 엘리엇이 탄식을 내뱉었다. 로라는 눈가가 새빨개져 있었다. 음울한 분위기에 내가 안고 있던 아기 황자님이 울먹거렸다.

    “우으, 우아아앙…….”

    “미안해, 유리. 이럴 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서.”

    나는 유리를 다독이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클로드 자식. 날 보냈으면 이런 건 알아서 대비를 해 놓았어야 할 거 아니야.’

    클로드가 원망스러워졌다. 그가 이 몸으로 오래 산 만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더 잘 알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고 진짜라면서 다짜고짜 밀어 넣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없이 강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이 상황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이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이 얽혀 꼬아 낸 덫은 강한 자마저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우아앙. 우아아앙!”

    겁을 먹은 율리시즈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내 예민한 황자님께서는 위험마저 잘 감지하시지.

    “걱정하지 마, 유리. 그래도 약속했으니, 내가 나서서 황제를 설득하면…….”

    그때, 황후궁 앞으로 웬 시종장이 도착했다.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즉시 황제 폐하의 침전으로 납시지요.”

    “……죽여 버리겠다.”

    엘리엇이 대노했다. 그는 바깥에서 황제의 명을 전하는 시종장을 처리하고자 했다.

    엘리엇이 허리춤에 찬 보검을 뽑아 들기 직전이었다.

    “안 됩니다.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

    기어코 칼에 손을 대려는 피델리움 변경백을 막은 건, 황후 셀레스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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