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8화 (18/90)

18.

카밀라의 말대로 시녀들은 성 밖에서 급히 사술사 한 명을 데려왔다. 뒷골목에서 암암리에 용하다고 입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황성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분장시켜 데려온 사술사는, 황비궁에 들어서자마자 히죽 웃었다.

“아이의 성별이 궁금하신 게로군요. 높은 곳에 다다르신 분.”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카밀라는 칼을 뽑아 들고 사술사의 목에 갖다 댔다.

“내 배 속의 아이는, 분명 사내아이겠지? 거짓을 고하면 죽여 버리겠다.”

그녀의 말에 사술사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살려 주기는 무슨.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죽일 생각이잖습니까?”

“입 닥쳐! 아이의 성별이나 말해!”

카밀라는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여자였다. 당장이라도 칼로 사술사의 목을 가를 듯이 굴자, 사술사는 혀를 쯧쯧 차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진실을 듣고자 하셨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당신의 배 속에는 사내아이가 아니라, 계집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뭐?”

“여자아이가 태어날 거라, 이 말입니다. 당신이 낳을 아이는 이 나라의 황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더 듣고 싶지 않아. 닥쳐!”

절망감을 이기지 못한 카밀라가 결국 사술사의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꺄아아악!”

황비궁의 시녀들은 살인 현장을 목격한 충격에 주저앉았다. 카밀라는 칼을 휘둘렀음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거렸다.

“아이의 성별이 여아라 하더라도! 다른 사술사를 구해 바꾸면 될 일이다. 어서 더 실력이 좋은 사술사를 불러와! 당장!”

피를 토해 내는 듯한 음성으로 카밀라가 발악하자 죽어 가는 사술사가 그녀를 비웃었다.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군.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닥치라고 했지!”

피가 한 차례 더 튀었다. 여태껏 패악을 저지르는 게 일상인 카밀라였으나, 이렇게 제 손으로 직접 잔혹하게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온몸에 튄 피에 오만상을 찡그리며 시녀들에게 명했다.

“더러운 게 묻었으니 목욕 준비를 해 놓거라. 그리고 저것, 저것은 괜한 소리가 안 나오게 궁 밖으로 치운 뒤 물고기 밥으로나 줘 버려.”

“네, 네에…….”

안색이 새파래진 시녀들은 바쁘게 황비의 명을 수행하러 움직였다.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이 일었지만 불쌍한 사술사와 똑같은 꼴이 될까 봐 이를 악물고 흔적을 치웠다.

따뜻한 목욕물 속에 들어갔어도 카밀라는 불안하기만 했다. 탐스러운 보름달처럼 어여쁘게 불렀던 배가 이젠 무척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게 여자아이라면 낳았을 때 황후의 위세만 더 세워 주게 된다.’

그건 싫었다. 황후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황제, 빈센트의 실망한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빈센트는 말로는 황녀도 괜찮다 했지만, 카밀라와 같은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애물단지 황후를 치우기 위해선 적장자를 낳은 여인이 필요했으니까.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황후든 1황자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만 내가 산다.’

황제는 변덕스러운 성정을 지녔다. 어쨌거나 황후는 아들을 낳았으니 그녀에게 다시 좁쌀만 한 관심이라도 가지게 되면 카밀라에겐 재앙이었다.

카밀라에게 주어지는 황제의 총애란 사실 굉장히 덧없는 것이었다. 그는 불쌍하게 죽어 버린 제 모후와 닮았다는 이유로 카밀라를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황후에겐 대마법사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 그를 상대로 이기기는 어려웠다.

입술을 쥐어뜯으며 어찌할지를 고민하던 카밀라는 번뜩 묘수를 떠올렸다.

황후가 나들이를 나간 후원에 보냈던 시녀들이 말한 것이 떠올라서였다.

‘대마법사님께서 1황자님과 매우 도타워 보이셨습니다. 마치 친혈육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시던걸요.’

카밀라가 히죽, 웃었다. 황후를 다시 비참함의 구덩이에 빠뜨릴 방도가 마련됐다.

* * *

황비가 근신당해 잠잠한 동안, 황후궁엔 활기가 돌았다.

피델리움 변경백은 매일같이 황후궁에 들러 셀레스틴과 율리시즈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선물했다. 로라는 그를 기쁘게 맞이했고, 나와 윈터는 한가로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고서적과 갖가지 아기 장난감, 섬세한 깃펜과 요람 위에 매달 아기자기한 모빌 등이 황후궁에 쌓여 갔다. 그것들은 딸과 손자를 위한 외할아버지의 정성이 담긴 물건들이었다.

나는 마법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굳이 힘자랑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피델리움 변경백에게 상당히 실례일 테니까. 삼대가 소박하게 행복해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아, 황후 폐하께서 부탁하셨던 황자 전하의 선생 후보 목록도 가져왔습니다.”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사안을 가장 먼저 준비해 두고 싶었습니다.”

셀레스틴은 많이 밝아졌다. 카밀라에게 거의 모든 궁내부의 일을 빼앗긴 터라 황후에겐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녀는 황궁에 들어오기 전 좋아하던 학문을 다시 탐독하는 시간을 즐기고, 후일을 위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틈틈이 쓰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그런 딸을 안쓰러워하는 듯했으나, 묵묵히 셀레스틴이 원하는 대로 진행해 줬다.

“1황자 전하를 위해 최대한 각 분야별로 저명한 인사들을 모으려 애썼습니다. 귀족이라면 현 황제 폐하를 지지하지 않는 귀족파에서, 귀족이 아니라면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평민 인재를 뽑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유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크흠. 마법의 경우는 일부러 비워 뒀습니다.”

헛기침을 한 엘리엇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셀레스틴과 로라도 같이 쪼르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넉살 좋게 웃었다.

“마법은 제 몫으로 비워 두신 건가요?”

“예, 대마법사이시여. 이미 1황자 전하께서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타고나셨다는 건 당신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율리시즈는 고작 악역으로 사라져 버리기엔 아까운 재능을 가졌다. 마력이 퐁퐁 솟아나는 샘물처럼 그 아이의 심장에서 피어났다.

‘위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해 내게 온 것만 해도 전무후무할 일이지.’

좌표 조정 등은 어설펐지만, 결과적으로 율리시즈는 제 목숨을 구하는 데 완벽히 성공했다. 나는 그 아이를 가엾게 여기는 것과 별개로,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가졌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 재능을 개화시켜 주고 싶었다.

“마법 방면에서는 이 세계를 통틀어 저보다 나은 스승은 구하기 어려울 거예요. 제게 맡겨 주신다면 유리가 적의 습격 따위에 죽지 않도록 키워 보겠습니다.”

‘클로드’의 지식과 마력이라면 유리를 우수한 마법사로 자라나게 만들 수 있겠지. 성인까지 무사히 크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은 없어도 클로드가 억지로 주입해 놓은 지식은 믿을 만했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마법사로서의 성취를 높일 수 있을지 클로드는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확률도 올라가겠지.

나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엘리엇과 셀레스틴은 기뻐하며 반겼다.

“저희야 영광입니다. 대마법사님께서 직접 제자로 들여 주신다면 걱정할 일이야 없겠지요.”

“수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열성적인 태도의 두 사람이 눈을 빛냈다. 나는 내가 안고 있는 젖먹이 황자님과 눈을 마주치고는 등을 토닥였다.

“너무 일찍부터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선 황자님께서 문자를 뗀 뒤에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황후 폐하가 커리큘럼을 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웬만하면 너무 빡빡하게 시키진 말아 주세요. 과도한 조기 교육은 아이에겐 해로운 법이어서요.”

사교육 과열로 어릴 때부터 온갖 학원을 전전하는 우리나라 청소년이 떠올라 한 말이었는데, 두 사람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대마법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마법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하셨던 분이…….”

“독학으로 마법을 깨치셨다 들었는데, 혹 선생님들이 너무 많은 양의 과제라도 시켰던 건가요?”

엘리엇과 셀레스틴이 궁금증을 마구 풀어놓자, 나는 항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유리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길 바라서예요. 아이일 땐 아이답게 살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평범한 가정의 기준에서는 이미 벗어났지만, 그래도 언제든 뛰어놀 수 있는 평온함은 주고 싶었다.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였다. 내가 그러지 못했기에, 이 햇살 같은 아이는 먹구름 같은 어둠을 갖지 않았으면 해서.

“꺄우으.”

율리시즈가 내게 볼을 부볐다. 아기 특유의 냄새가 사랑스러웠다. 얼떨결에 이 아이의 인생을 떠맡게 되었지만, 나로 인해 율리시즈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심조심 아기를 쓰다듬는 나를 보며 엘리엇과 셀레스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대마법사님께서 이리 1황자님을 챙겨 주시니 그분께서 불행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군요.”

“맞아요. 덕분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으음, 저는 만능열쇠 같은 게 아닙니다만…….”

내 능력도 아닌 것으로 칭찬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윈터마저도 나를 툭툭 치며 괜찮다고 기운 내라고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이미 초월자의 반열에 오른 위인이십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당신이 추구하는 선은 길을 잃는 법이 없으니, 올곧게 나아가신다면 모든 것이 평안할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윈터.”

“우씨. 진짜라니까요!”

“하하하.”

우리는 그렇게 소박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그 구심점은 단연코 율리시즈였다.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를 상상하며, 나는 그 옆에 어떤 형태로 있어야 할지도 함께 고민했다.

아주 짧은 행복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즉시 황제 폐하의 침전으로 납시지요.”

독을 문 뱀이 움직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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