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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7화 (17/90)
  • 17.

    “황비는 황후 폐하를 죽이려 한 황족 시해범입니다. 본래라면 참수로 다스려야 마땅한 일입니다만.”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서 무엇 하나? 이미 근신으로 처벌받은 사람이잖나.”

    “예. 근신으로 처벌하기로 했죠.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덕 덕에 황비는 살았습니다. 한데 여기서 뭘 더 바라십니까?”

    내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자 황제, 빈센트의 낯이 곤혹스러워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내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 놓았다.

    “가엾다는 말은 황제 폐하께서 황비께 붙일 말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아니 이 온 황궁이 괴롭히고 방치해 둔 황후 폐하야말로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아닙니까?”

    “대마법사, 지금 그대가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오?”

    “저는 황제 폐하의 스승이 아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직언을 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늘한 한기가 모여들면서 얼음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꿰뚫어라]”

    “으아악!”

    쨍그랑. 와장창. 값비싼 찻잔과 테이블을 비롯한 궁 안의 가구들이 얼음 기둥에 의해 폭발하듯 박살 났다. 그 난장판 속에서 나와 황제에게 튄 파편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폭력적인 마법에 겁이 났던 황제는 황급히 근위병을 불렀다.

    “누구 없느냐! 근위병, 근위병! 대마법사가 나를 시해하려고 날뛴다!”

    하지만 고래고래 소리쳐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오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이…… 이게 뭐야.”

    “그리 부르셔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까요.”

    밖의 누구도 나와 황제의 대화를 방해할 수 없도록, 이 공간을 통째로 잠시만 분리했다.

    “지금 이 방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세계의 밖인 ‘경계’에 해당합니다.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다시는 원래 세계로 돌아올 수 없게 되지요.”

    “워…… 원하는 게 뭐요!”

    내게 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황제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방 안을 주문 한 번으로 수복하고서 싱긋 웃었다.

    “황후 폐하와 그분의 아들이신 1황자 율리시즈 님의 안전입니다.”

    “그건 대마법사,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이잖소!”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이 빠졌던 황제는 다시금 씨근덕거렸다. 나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설명했다.

    “그분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황제, 당신과 당신이 총애하는 애첩인 황비가 가장 거슬립니다.”

    “나는 황후를 죽이려 한 적이 없소!”

    “그렇겠죠. 직접적으로는요.”

    내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벌레처럼 엉덩이로 뒷걸음질 쳐 벽에 바짝 붙었다.

    “제가 세상사 어느 곳에도 관여하지 않는 마법사라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유감입니다.”

    클로드는 본디 정보의 입수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나라의 정세에도 손을 대는 적은 없었으나 어떤 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리석은 황제는 눈 가리고 아웅을 시도한 것이다.

    ‘황제가 황비를 총애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지.’

    그중 하나는 그가 무참히 죽여 버린 황태자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황태자비가 되어야 했을 현 황후, 셀레스틴은 황위 찬탈의 전리품으로 추락했다.

    셀레스틴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가지게 만들고, 그녀를 골방 같은 궁에 가두어 천천히 시들어 죽게 만들려던 것 역시 황제의 뜻이 들어가 있었다.

    “저는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 거기에 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이를 가장 싫어한답니다.”

    “…….”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를 겨우 살아남은 이에게 전가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황비를 앞세워 깨끗한 황제인 척 굴지 마십시오. 제가 피델리움 백작가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 한, 일국의 황제인 당신마저도 위험 요소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서늘하고 칼날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 창 수십여 개가 황제의 목을 둘러쌌다. 누군가 본다면 반역죄로 끌려갈 상황이나, 목격자도, 증거도 없으니 황제의 말을 믿어 줄 이는 없었다. ‘클로드 하센티온’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언제나 도망치고 은거하는 것에 푹 빠져 있었으므로.

    “나, 나도 황비도 죽여 버릴 심산인가?”

    “설마요. 제가 지켜야 하는 분들의 가족이긴 하시니……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요.”

    이건 단지 겁주기였다. 더는 이야기가 원작처럼 흘러가지 못하도록 내 나름의 장치를 설치한 셈이었다.

    황제 빈센트는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한 자. 그에게는 어떤 말보다 무력이 가장 쉽게 통하는 설득이었다. 그러니 이런 방식을 원치 않아도 써야 한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황후 폐하와 1황자 전하를 조용히 살 수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모든 얼음 송곳과 얼음 창들이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하지만 황제의 목에 서린 한기가 워낙 지독했었는지, 그는 동상을 입어 가려움에 목을 긁었다.

    “크큭…… 참으로 건방진 대마법사로군. 이렇게 포악한 본성을 숨길 줄이야. 더 탐이 나는걸.”

    ‘우웩.’

    귀찮은 일을 더 만들지 않으려고 행한 짓이었는데 어쩐지 미친놈의 스위치를 건드린 꼴이 된 것 같았다.

    “대마법사의 초월적인 힘이라면 고작 변방의 백작가와 맺은 약속의 인연 따윈 얼마든지 부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 빚을 갚으려고 온 거지?”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이 약속은 나와 클로드 사이의 계약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황제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주워들었는지, 또 헛소리를 지껄였다.

    “혹시 대마법사, 당신은 황후를 사랑하나?”

    “……미친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아, 방금은 생각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서 말하고 말았다. 후련한걸.

    “짐보고 미쳤다고 했나?”

    모멸감에 황제가 활화산처럼 분노를 토하며 나를 한 대 후려치려고 했다. 중앙궁에 있는 예식용 검을 몽둥이 삼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신께서 진지하게 하시니까요. 황후 폐하와 황자 전하는 제가 보호해야 할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내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아주 예뻐했다던데.”

    그건 또 언제 어디서 누가 염탐해서 일러바친 거람. 그리고 왜곡의 방향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서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1황자 전하는 사랑스러운 분이시니까요.”

    “그렇다면 계속 그 아이의 곁에 있도록 허락할 테니, 이 제국에 평생 머무르는 것은 어떻겠나?”

    “분명 이전에 거절했던 건……”

    “1황자를 바로 후계자로 선포하고 황태자로 책봉한다면?”

    우뚝. 돌아서려던 몸이 멈칫했다. 원작을 완전히 뒤바꾸고 율리시즈의 행복을 위한 루트로 아주 괜찮은 선택지가 주어졌다.

    혹했지만, 그건 아니 될 말이었다.

    “거절합니다.”

    “어째서지?”

    “’약속’의 기한은 1황자 전하가 성인이 되실 때까지입니다. 그 기한이 끝나면,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날 겁니다.”

    “쯧.”

    “그러니 공연히 제게 윈프리드 제국을 수호할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어떤 나라와 왕족도 저를 구속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지부진한 대화는 끝이었다. 나는 피곤함에 얼른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져 문에 일시적인 워프를 달았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나는 황후궁의 별채에 딸린 내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말도 꼭 해 줘야만 했다.

    “나를 수호자로 삼아 황비가 낳을 아들에게 종속시키려는 술수는 쓰지 마십시오. 황비는 이번에 아들을 낳을 수 없을 테니.”

    내 말에 황제가 사나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알아서 잘 황비께 전달하시든가.”

    저주 따위는 아니었다. 마법의 경지가 극에 달한 인간이 저주 따위의 조잡한 사술을 쓸 이유는 없으니까.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황비 카밀라는 염원하던 아들을 낳지 못한다.

    그녀의 배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딸이기에.

    * * *

    황제로부터 소식을 받은 카밀라는 광분했다.

    “내가 황자를 낳지 못한다니! 그럴 리가 없어!”

    카밀라는 불을 뿜는 용처럼 분노하며 아들을 낳지 못할 거라고 단언한 대마법사를 욕했다. 그녀가 천한 신분일 적 배웠던 온갖 상스럽고 더럽고 천박한 욕설이 대마법사의 이름을 더럽혔다.

    “그럴 리가 없어. 없다고.”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밀라는 아들을 낳을 준비를 이미 마쳤다. 태동하는 발차기가 예사롭지 않아 사내아이라 여겼고 아이를 가지기 전에 사내아이를 잉태한다는 약을 복용했으니 틀림없이 아들이어야 마땅했다.

    ‘황비는 이번에 아들을 낳을 수 없을 거라 했소.’

    “아니야아!!”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카밀라의 화살은 황후를 향했다.

    “황후, 셀레스틴! 그 간악한 여자가 대마법사에게 꼬리를 쳐 그동안 내게 당했던 일들을 복수하려는 게야!”

    황비궁의 시녀들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저주를 지고의 대마법사가 할 리가 없으며, 한다 해도 그 저주는 매우 어려운 것이기에 잘못하면 시전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카밀라는 굳건하게 자신이 아들을 낳을 거라 자신했기에 패닉에 빠졌다.

    그녀가 한 시녀를 불러 당장 성 밖에서 주술사를 수소문하도록 시켰다.

    “아이의 성별을 잘 맞힌다는 주술사를 데려와! 당장!”

    “하나 그것은 불법이온데…….”

    “불러오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아, 알겠습니다!”

    시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카밀라는 보름달처럼 부른 제 배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이 배 속의 아이가 남아가 아니라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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