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6화 (16/90)

f16.

“어머나.”

“어머!”

셀레스틴과 로라가 이 광경을 보고 의미 모를 비명을 질렀다. 엘리엇은 크게 시무룩해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세상에. 1황자 전하의 첫 입맞춤을 대마법사님께서 가져가시다니! 할아버지인 내가 될 줄 알았거늘…….”

‘입맞춤이라고?’

이건…… 그냥 뽀뽀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율리시즈의 일방적인 박치기에 불과했다.

“헤헤헤.”

“유리야, 아가. 침이 뚝뚝 떨어지는데.”

아기 황자가 입을 문댄 자리, 즉 내 볼에서는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침이 뚝뚝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거대한 막대사탕쯤으로 보였던 걸까. 불쾌하다는 감상은 좁쌀만치도 들지 않고 그저 아기가 사랑스럽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자아, 턱받이로 쓱쓱 침 묻은 거 문지르자, 옳지?”

“꺄우우아!”

“옳지. 착한 아이라서 그런지 가만히 잘 닦게 해 주네.”

제 입가와 내게 묻은 침을 닦고 나자, 꺄르륵 웃는 천진한 아기가 깨물어 줄 만큼 귀여워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아?”

“아까 유리가 나한테 한 거야.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라고 축복을 담아서.”

“꺄아아!”

축복 마법이 내려앉는 느낌이 간지러웠는지, 아기가 보석 같은 눈동자를 빛내더니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우리 둘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던 윈터가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주인님과 황자님이 가족인 줄 알겠습니다.”

“응? 우리가?”

백발에 호박색 눈인 ‘나’와, 금빛 터럭에 영롱한 보랏빛 눈을 가진 율리시즈 사이에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나마 공통점을 찾자면, 예쁘장하게 생긴 겉모습이 유일했다.

‘이것조차도 내 진짜 모습은 아니니, 아무 공통점도 없다고 봐야겠지.’

클로드는 이게 원래 내가 가졌을 육신이고 운명이라 했지만, 아직도 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난데없이 모르는 세상에 던져진 나는, 스스로를 이 세상의 이물질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런 나의 속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윈터의 의견에 편승해 나를 놀려 먹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두 분이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닮았다고 해야 하나.”

“어머, 로라. 그렇다면 대마법사님께서 정식으로 율리시즈의 대부 역할을 맡아 주시지 않으시려나? 내 아드님께서 저리 친가족처럼 따르니 걱정이야 없겠는걸.”

“크흠! 클로드 님, 어떻게든 1황자님의 대부가 되시겠다면 이 늙은이의 시험을 통과하셔야 될 겝니다!”

“다들 그만 놀리시죠…….”

그들은 율리시즈를 대하는 내 호의적인 태도만 보고 내가 많이 물렁한 성격이라고 오인한 듯했다.

‘상관없나. 친숙한 이미지가 가깝게 지내는 데는 별 탈이 없겠지.’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대상은 오로지 ‘약속’으로 얽매인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뿐이었다. 그 아이를 아껴 주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행위 전부가 내게는 죽음으로 가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너를 살리면 내가 죽을 수 있대.

그러니 내가 너를 어찌 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게 이 삶은 더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화목한 분위기는 꽃을 꺾던 황비궁의 시녀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나와 유리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파랗게 변한 안색으로 서둘러 꽃바구니를 들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황비의 속이 이만하면 뒤집힐까?”

“또 누군가를 죽일 정도의 화를 내진 않으면 좋겠군요.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게 습관이 된다면 축복 계열 마법은 평생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글쎄. 그 여자라면 아마 그런 사소한 것쯤은 포기하지 않았을까.”

카밀라가 보낸 염탐꾼마저 사라지자, 우리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남은 샌드위치와 과일, 딸기 라떼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며, 각자가 원하는 미래를 그려 보았다.

“나는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때까지 내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어요. 기왕이면 자라날 아이를 위해 편지를 써 책으로 엮어 주고 싶어요.”

“저는 황후님께서 최대한 오래오래 건강히 사셔서, 아기 황자님의 첫 젖니가 빠지는 순간까지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로라, 나는 그것보다 한술 더 떠서 황자 전하께서 검술을 배울 만큼 자라셨을 때 그 자리에 황후 폐하도 같이 있으면 하는구나.”

서글픈 소망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엇과 로라는 셀레스틴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나는 그 소원을 들어주는 신은 못 되지만, 황후의 수명이 조금이라도 더 유지될 수 있는 약초를 꺼내 선물로 줬다.

“이게 무엇입니까?”

“위스퍼를 해독해 줄 약초입니다. 위스퍼와 상극이라 하여 채터링이라 불리죠. 이걸 달여 먹으면 위스퍼로 쌓인 독을 미약하게나마 중화해 고통이 덜어지고 남은 수명을 조금은 연장할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요.”

“세상에……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이걸로 백작님과 제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간절한 소원의 행렬에 윈터가 종알거렸다.

“다들 욕심이 너무 많으십니다.”

“그러니 소원으로라도 비는 게지요. 허허. 클로드 님께서는 바라시는 것이 없으십니까?”

엘리엇이 나를 향해 물었다. 이 대답은 해 줄 수가 없어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비밀입니다.”

율리시즈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지켜 주면, 비로소 내 죽음이 나를 찾아올 테니 그것이 무사히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입 밖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궁금한데, 이거 참 아쉽게 되었군요.”

엘리엇이 아쉬워하자 윈터가 수습할 요량으로 대신 대꾸했다.

“우리 주인님 같은 분이 소원으로 빌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미 성취의 끝을 이루셨고, 가진 것도 풍족하시니 부러움도 질투도 내다 버린 분이신걸요.”

윈터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했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슬그머니 은신 마법으로 투명 인간이 되자 율리시즈가 울먹였다.

“우으… 우아앙…….”

“주인님, 빨리 다시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이러다 1황자 전하 밑으로 시냇물이 생기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윈터의 말에 나는 은신을 풀고서 다시 아기 황자님의 인간 유모차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내 품에만 안기면 율리시즈는 울음을 뚝 그쳤다.

“헤헤.”

“으휴. 콧물이랑 침이 또 흘러나왔어요?”

능숙한 손길로 침과 콧물을 닦아 내 주니, 아기 황자는 더 방긋방긋 웃었다. 귀여워서 봐줄 수밖에 없었다.

친모인 셀레스틴이 이를 보고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저는 대마법사님과 제 아들이 사이가 좋아 보여 어찌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거부당하는 상황이 올까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계시니 안심할 따름이지요.”

셀레스틴의 입장에서는 내 옆만큼 안전한 곳이 없을 테니, 그녀는 나와 유리가 붙어 있는 상황만 봐도 좋다고 했다. 모자간의 시간은 매일 꾸준히 보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기회에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정말이세요, 황후 폐하?”

“그래. 로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어.”

로라의 얼굴이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개었다. 그녀는 열성적인 태도로 나들이가 끝난 자리를 말끔히 정리했다.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황비궁의 시녀들을 마주친 건 별로였지만.”

“오늘 일 가지고 배 아프면 아팠지, 설마 또 무슨 짓을 꾸미지는 않겠지.”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 * *

기분 좋게 들어간 다음 날 날씨는 온통 칙칙한 먹구름으로 뒤덮여 음울했다.

황제가 보낸 시종 하나가 황제의 명을 내게 전했다.

“황후궁에 계신 손님,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에게 전하는 바이다. 지금 즉시 중앙궁으로 와 짐과 독대할 것을 요구한다.”

황금빛 칙서가 내린 명령이었지만 도저히 따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뭘…… 얼마 전에도 불러 놓고는 거절당했으면서 왜?’

나는 그때 아삭아삭한 식감의 오렌지망고 맛 셔벗을 우물거리던 찰나였다. 패밀리어인 윈터는 요리 솜씨가 좋아 디저트도 만들어 줄 수 있는 만능형 집사였기 때문이었다.

귀찮고 성가셨지만, 황제의 부름을 무시하는 건 곧 그의 권위를 밑바닥에 내팽개치는 것과 같아서 물릴 수는 없었다.

“곧 가겠다고 전하라.”

“필요하시다면 1황자 전하를 대동하고 오셔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알았다.”

이 덜 된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무엇을 노리고 율리시즈까지 같이 와도 된다고 했을까.

평소보다 더 촘촘하게 보호 마법을 아이에게 결계로 덧씌우고 가자, 황제 빈센트가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대마법사!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무슨 일이십니까? 저번과 같은 용건이라면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자 황제는 한숨을 쉬더니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나들이를 갔다지? 황후궁의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고들 하던데.”

“황비궁의 시녀들이 전해 주었습니까?”

떠보려는 질문에, 황제는 솔직히 응수했다.

“그렇네. 뭐, 숨길 것이야 있겠나. 내 사랑하는 황비, 카밀라가 근신이 풀리면 저도 꼭 나와 같이 그런 나들이를 가고 싶다 아우성을 치더군.”

카밀라가 질투로 미쳐 날뛴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황후의 안색이 나아지고 있었으니 카밀라는 초조해 죽을 맛일 터.

“그러니 대마법사, 이제 산달도 얼마 안 남은 가여운 황비를 근신에서 풀어 주는 게 어떻겠나?”

사람인데 개소리를 하네. 명색이 황제라는 인간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