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제가 있는 한, 그리고 ‘약속’을 지키려는 한 평온한 일상은 지속될 겁니다.”
‘클로드’의 능력을 믿고 하는 소리였다. 내 말에 셀레스틴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감히 대마법사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이미 그 욕망으로 인해 한번 망가진 사람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셀레스틴은 후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내내 저편의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 현 황제가 죽여 버린 그녀의 연인인 황태자? 아니면 새장 같은 황궁에 갇혀 잃어버린 세월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초연함으로 가득한 셀레스틴 때문에 불안해진 엘리엇이 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폐하. 대마법사님의 지지가 있으니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고향인 피델리움 백작령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아니면 예전에 바랐던 것처럼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시한부의 몸으로요? 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걸요.”
셀레스틴이 나로 인해 비참하게 죽을 운명을 피했다고는 해도, 그녀의 목숨이 곧 스러질 것은 자명했다. 그녀의 노쇠한 아버지가 딸처럼 소리 없이 울며 대답했다.
“뭐든, 뭐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대마법사님과 제가 그럴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사전에 이야기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이 분위기를 깨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내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거절했다.
“이미 제가 가장 빌고 싶었던 소원을 대마법사님께 부탁드렸는걸요.”
“그건 1황자님의 안위를 위한 것이잖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보시지요.”
노쇠한 피델리움 변경백보다 그의 딸인 황후가 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 덕에 황비로부터의 위협을 피하게 된 후부터, 셀레스틴은 그동안 뭉쳤던 긴장이 다 풀린 탓인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글쎄요, 아버지. 아직은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신중히 고민해 보겠습니다.”
“저도 황후님께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같이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 로라.”
그래도 셀레스틴을 지극정성으로 아끼는 가족들이 있으니 너무 걱정할 건 없는 듯했다. 실제로 백지장 같던 그녀의 얼굴에 꽃을 피우는 건 오로지 그녀의 가족들뿐이었다.
‘좋은 가족들이라…….’
나도 그런 가족들이 있길 바란 적이 있었는데.
나쁜 기억이 꾸물꾸물 심장의 혈관을 타고 올라오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우아!”
찰싹. 가볍고 통통한 손이 나를 한 대 쳤다. 아프지도 않았다.
“……유리? 자는 거 아니었어?”
“아아!”
칭얼거리는 율리시즈는 내게 안아 달라고 요구했다. 두 팔을 벌리고 울먹거리니 별수 없었다.
“이리 와. 어딜 가고 싶어서 그래?”
“아우우!”
“응?”
율리시즈가 주변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나 또한 검은 상념에서 벗어나 아이가 하는 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누가 온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대마법사란 작자는 오감도 인간을 뛰어넘은 것인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잡혔다.
‘여자 네 명…… 바구니를 들고 있어. 시녀들인가?’
황궁의 후원에 나들이를 온다고 했지만, 이곳 전체를 우리가 독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건 알았다. 셀레스틴이 권력을 움켜잡은 황후였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그녀의 처지로는 나들이를 간다는 사실을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윈터. 누가 오고 있어.”
“네, 주인님. 보통 황족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시종들이라면 이곳을 피해 갈 텐데, 의도적인 접근을 하다니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겠군요.”
“황비겠지?”
“저의 한 달 치 간식거리를 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래.”
사박사박. 곧 모습을 드러낸 시녀들은 저마다 바구니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황비궁을 상징하는 장미가 새겨진 브로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들이 황비가 보낸 염탐꾼이라는 걸 확신했다.
“멈추어라. 어디에서 온 시녀들이길래 황후 폐하께서 휴식을 취하시는 도중에 난입하느냐?”
항상 다정하기만 하던 로라가 날카롭게 그 시녀들을 향해 물었다. 시녀들은 우물쭈물하며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황족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궁을 관리하는 시녀들입니다. 황제궁을 장식하던 꽃이 전부 시들어 버리는 바람에 새것을 가져오러 후원에 왔습니다.”
적당한 핑곗거리였다. 그들의 시녀복조차 황제궁의 것이었고, 폭군과도 같은 황제의 명을 사칭할 간 큰 시녀들은 없기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다.
윈터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주인님. 저들에게서 피 냄새가 납니다.”
“응. 저 사람들이 다친 건 아니지만, 누군가 심하게 다쳤던 것 같네.”
현 황제, 빈센트가 혈육들을 참살하고 황위에 오르긴 했으나 그는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는 미치광이는 아니었다.
나는 황비, 카밀라의 잔혹한 성정을 떠올렸다. 머릿속으로도 훤히 그려졌다. 황후의 외출 소식에 길길이 날뛰는 황비의 모습이. 카밀라는 분을 이기지 못하면 아랫사람들의 꼬투리를 잡아 패악을 부렸으니 이 피 냄새의 원인도 그녀일 것이다.
“아우우…….”
“응. 지지라서 싫어?”
“우우!”
아기 황자님께서는 후각이 예민하신지, 그 시녀들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오만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할까?’
카밀라의 시녀들을 물려 봤자 저들만 죽어 나갈 터. 게다가 나들이의 목적에는 황비에게 보여 주기 위함도 있었기에 염탐꾼의 존재는 거슬릴 것도 없었다.
황비의 가장 큰 동력원이자 약점은 타인에 대한 질투였으니, 그녀는 황후의 행복한 모습을 전해 듣고 길길이 날뛸 것이다.
나는 로라의 옷자락을 가볍게 툭툭 쳤다.
“로라. 그냥 염탐꾼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둬요.”
“…괜찮겠습니까? 혹시나 또 황후 폐하께 위해를 가하려는 자들이라면…….”
“내가 있으니 대놓고 불온한 행동을 취하진 못할 거예요. 그랬다간 바로 내게 죽임당할 수도 있으니까.”
무심코 내뱉은 소리에 나 스스로가 놀랐다. ‘클로드’는 강해서, 그를 공격하는 사람 정도는 가뿐히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클로드의 이 껍데기, 기억이 엄청 강력하네.’
소름 돋았다. 이게 원래의 내 육신이라서 그런 걸까?
“……진짜 죽인다는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어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대마법사님의 말씀대로 내버려 두지요.”
로라는 내 발언 자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태연했다. 그녀가 멀찍이 서 있는 카밀라의 시녀들에게 외쳤다.
“꽃을 꺾으러 왔다면서, 무얼 그리 빈둥거리느냐? 황제 폐하의 궁에서 왔다면 빠르게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게 중요할 터인데?”
“그, 그렇습니다.”
“어서 꺾고 돌아가거라. 황후 폐하의 명이시다.”
“예, 알겠습니다…….”
황비궁의 시녀들은 평소 우습게 여기던 황후궁의 시녀장, 로라에게서 명령을 들으니 굉장히 불쾌해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후원에서 아무 소득 없이 쫓겨났다간 그들만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시녀들은 흩어져 분홍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의 꽃들을 찾아 꺾었다. 빠르게 움직인 덕에 텅 비었던 바구니는 금세 꽃으로 묵직해졌다.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 꽃을 꺾는 내내 우리를 힐끔거렸다. 예민한 클로드의 몸은 그 시선을 전부 인식하고 있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주인님, 짜증 나요.”
“오, 윈터 님. 저도 그래요.”
“아우아!”
“나도 마찬가지야, 유리. 그렇지만 우리, 최대한 행복하다는 티를 팍팍 내 줘야 해.”
원래도 행복했지만, 저 시녀들이 오기 전의 나들이도 충분히 좋은 분위기였지만!
‘황비가 배 아파 죽으려면 더 화목한 풍경을 자아낼 필요가 있어.’
폭력적인 수단은 셀레스틴이 반대하니,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라도 엿을 먹여야 속이 풀릴 듯싶었다.
수척한 황후도, 피델리움 변경백도 이 작당에는 동참했다.
“어머, 아버지. 대마법사님께서 타 주신 차 덕분인지 오늘은 기운이 쌩쌩해요.”
“아아, 황후 폐하. 실로 그렇습니다. 이 늙은이의 걱정이 다 헛된 것이었군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눈부십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가게 될까 두렵군요.”
“호호, 두 분 사이가 도타워 보이니 좋네요. 이게 얼마만의 평온인지!”
그러고서는 로라가 날 쳐다봤다. 율리시즈도 같이 봤다. 음, 둘이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라는 것 같았다.
‘굳이 안 그래도 계속 유리가 나한테 딱 달라붙어 있어서 뭐 할 게 없는데.’
율리시즈는 마치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종의 생존 본능일지도 몰랐다. 이 사람 곁이라면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동물적인 본능이 발동했을 거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난 연기는 젬병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기 황자님을 끌어안고 둥기둥기 얼러 줬다.
“아우아!”
“응? 이걸로는 부족해?”
이상하다. 원하는 대로 안아 줬는데 뭐가 부족한 거지?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율리시즈가 손을 뻗었다. 내게 닿고 싶어 하는 통통한 손가락들이 보였다.
“원하는 게 이거야?”
내가 아이를 꼭 껴안자, 율리시즈는 내 얼굴에 단풍잎 같은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내 볼에 뽀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