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셀레스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씁쓸한 얼굴을 했다.
“황궁 안 후원이 이리 아름다울 줄은 몰랐네요. 진작에 아버지와 유리를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얗게 피어난 치자나무 꽃송이들을 바라보는 셀레스틴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아주 먼 곳에 있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말 마십시오. 황후 폐하. 지금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피델리움 백작님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황후 폐하.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는 접어 두시지요. 황후 폐하의 과오도 아닌 일에 괘념치 마옵소서.”
모처럼의 즐거울 나들이에 셀레스틴이 우울한 기색이 역력하자 엘리엇과 로라가 재빨리 반박했다.
“……그런가요, 아버지. 로라?”
“당연하지요!”
“당연합니다!”
“꺄우우아!”
“아, 유리도 백작님과 로라의 말에 동의한다네요.”
내 품에 안겨 있던 율리시즈가 그들을 거들었다. 희한한 아기였다.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아 무슨 뜻일지도 모를 텐데 긍정이라도 하듯이 반응하다니.
어쨌든 그로 인해 셀레스틴의 창백한 안색은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었다.
“소중한 내 가족들이 이리 강경하게 주장하니 그 말이 옳겠지요.”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시고, 모처럼의 나들이를 즐기세요. 황후 폐하.”
나들이라고는 했지만, 병약한 황후의 체력은 오래도록 돌아다닐 것이 못 되었다. 그래서 꽃놀이를 위해 돗자리를 챙겼다.
“이쯤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주인님.”
“응.”
윈터가 작은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커다란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가 바람 때문에 날아가지 않도록 네 귀퉁이에 윈터의 몸통만 한 돌이 자리를 차지했다.
“제가 했어도 되는 일이었는데…….”
“이, 이것도 주인님을 보좌하는 일이니 제 일이기도 합니다.”
로라의 말에 윈터는 뻣뻣한 태도로 대답하고는 내 뒤로 와서 숨었다. 당당하고 뻔뻔스럽기까지도 했던 이 페럿 집사님은 로라에게 아직 사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윈터만 들을 수 있게 속닥거렸다.
“오늘 사과하자.”
“주인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기세 좋게 대답하면서 정작 로라 앞에서는 쭈그러드는 걸 보니, 무사히 사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점심 드세요!”
돗자리 위에 앉은 로라가 큼지막한 갈색 바구니에서 먹을거리를 꺼냈다. 얇은 햄과 사과잼, 아삭한 잎채소와 토마토 등을 넣어 만든 샌드위치와 달콤한 딸기 라떼가 든 병이 척척 나왔다. 입가심용 과일도 종류별로 넉넉하게 담아 온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어머나, 로라가 봄을 담아 만들었구나.”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셀레스틴의 어깨 위로 도톰한 숄이 걸쳐졌다. 행여나 자식이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한 엘리엇이 가져온 것이었다.
“봄은 변덕스럽습니다, 황후 폐하.”
“감사합니다, 아버지. 생각해 주신 마음만으로도 기뻐요.”
로라도 제 주인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황후를 위해 따뜻한 레몬차를 끓여 온 건 물론이고, 씹기 편한 에그샐러드 샌드위치까지 만들어 올 정도였다.
“많이 드시고 어서 건강을 찾으셔야죠.”
“대마법사님이 자리에 계시는데 이렇게 나만 챙김을 받을 수는…….”
로라는 어미 새처럼 황후를 챙겼다. 멋쩍어진 셀레스틴이 중얼거리자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애초에 이 나들이도 황후 폐하의 기분 전환과 건강을 위해 나온 것이니까요. 황후 폐하 본인을 먼저 챙기세요. 유리는 제가 돌보고 있을 테니 로라도 황후 폐하께 집중하고요.”
내 말에 셀레스틴과 로라, 피델리움 백작까지 눈이 동그래졌다. 명색이 대마법사나 되는 사람이 베이비시터 노릇을 자처하니 이보다 부담스러울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좀 우스웠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
“스승 노릇에 육아도 포함되니까요.”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맞춰 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 불편해하시지 말라고 하는 배려인 듯하니 알차게 써먹으시고요. ‘약속’ 때문에 온 거니까요.”
명색이 스승인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보모 노릇을 자청했더니 윈터가 옆에서 설명을 거들었다. 말투는 삐딱해도 최대한 상냥하게 전달하려고 한 게 보였다. 찰떡같이 알아들으니 편했다.
그러자 로라가 자못 비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이 분유는 먹이실 줄 아십니까? 똥기저귀 갈아입히는 건요?”
“분유는 가르쳐 주시면 배울게요. 기저귀는 마법으로 교체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로라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처음 청소기가 발명되었을 때 주부들의 반응과도 같았다. 그녀는 냉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이 시간을 즐기겠습니다. 대마법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로라의 행복함이 전염된 것인지, 셀레스틴도 덩달아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시녀에 그 주인이었다.
솨아아.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푸른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꽃송이가 소담하게 피어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있으니 이곳이 꿈만 같았다.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네요.”
셀레스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라가 준비한 소풍 도시락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위스퍼 중독으로 인해 입맛이 별로 없다던 셀레스틴도 남기지 않고 제 몫을 해치웠다.
“그러게요. 제가 봐도 이 황궁의 후원은 정말 아름답네요.”
정성껏 키워진 수목들은 천국을 연상케 할 정도로 찬란했다. 나는 푸르디푸른 하늘과 정원을 함께 눈에 담으며 내가 죽게 되거든 가게 될 천국도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때 작은 손가락이 내 볼을 죽 잡아당겼다.
“아이야!”
“아야. 유리? 배고파? 아님 화장실이 급해?”
“아이야야!”
“배고픈 건 아닌 것 같고…….”
킁킁. 아기의 냄새를 맡아 봐도 기저귀를 갈아야 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뭐가 불만이야?”
“아우! 아아!”
작은 손이 내 고개를 돌렸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관심이 필요한 거야?”
“아우!”
“이미 떨어지지 않도록 꼭 안아 주고 있는데도?”
“아우우!”
“너 혹시 다 알아듣고 있는 거야?”
합당한 의심이 들어 한 질문에 율리시즈는 딴청만 부렸다. 그 와중에도 내 옷자락을 꽉 잡고 내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황자 전하께서 대마법사님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피델리움 변경백이 흐뭇한 미소를 걸치고 우리를 바라봤다. 흔한 손자바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황후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게 보이던 그는 고작 나들이 한 번에 다시 제 나이에 걸맞는 모습을 되찾았다.
좋아할 만도 했다. ‘클로드 하센티온’은 붙잡을 수 있다면 반드시 잡아야 할 황금 동아줄과도 같은 인맥이니 1황자가 친밀히 여길수록 그의 주름살은 줄어들겠지.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죠.”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윈터가 사족을 붙였다.
“캣닢 발견한 고양이처럼 매달리는데 싫어하다뇨. 주인님도 1황자님이 매달리는 걸 좋아하시면서 왜 아닌 척하십니까?”
“조용히 해, 윈터.”
“저한테는 꼭 사과하라고 엄포를 놓고서는. 정작 본인은 솔직하지 못하시다니요!”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가서 로라한테 사과해.”
“예? 잠…… 으아악!”
손가락 튕김 한 번에 윈터가 돗자리 끝으로 밀려났다. 로라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대마법사님? 패밀리어를 제게 보내신 연유가…….”
“윈터가 로라에게 사과하고 싶대요. 그것 때문에 밤새 걱정했어요.”
“주인님!”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사소한 복수에 윈터의 갈색 털이 부르르 떨렸지만 모른 척했다.
“……미안해요. 로라. 어제 당신을 오해하고, 기분 나쁠 발언을 해서요.”
로라는 윈터가 사과할 줄은 몰랐던지, 딸기 라떼를 쥐고 얼어붙었다. 몇 초 후에 해동된 로라가 입가에 고운 초승달을 띄웠다.
“괜찮아요, 윈터 님. 주인을 모시는 사람들의 마음이란 다 비슷한 것 아니겠어요? 저는 다 이해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훈훈한 광경이로군요.”
“그러게요.”
엘리엇과 셀레스틴이 작게나마 박수를 쳤다. 그러자 윈터와 로라 둘 모두가 부끄러워하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잘했어, 윈터.”
“……흠! 저도 나이 먹을 대로 먹었습니다. 아이처럼 대하지는 마시지요.”
“아우아!”
“봐. 유리도 윈터보고 잘했다고 하잖아?”
“1살인 인간 아기가 어떻게 주인님 말씀을 알아듣겠습니까……. 그냥 주인님이 그렇게 여기신다고 하시지요.”
“들켰네.”
영혼 없는 대꾸를 하며 나는 율리시즈를 고쳐 안았다. 배고프다 하면 로라의 지시대로 분유를 타 먹이고, 등을 토닥여 트림까지 시켰다.
청명한 봄 날씨 때문인지, 아기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천사 같은 아이가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항상 이렇게만 평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셀레스틴이 참지 못하고 아기의 뺨에 입맞춤하며 말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녀가 울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마음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곳은 황궁. 그리고 내가 지키려 하는 아이를 죽이려 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삭막한 곳이므로.
‘이 사람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셀레스틴에게 남아 있는 마력 냄새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그녀가 죽을 날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아직…… 아직은 버텨 주었으면.’
저 멀리 먹구름 한 떼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 위로 찍힌 오점 같은 먹구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