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3화 (13/90)

13.

‘거의 다 된 거였는데!’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황후 셀레스틴을 죽이는 건 카밀라의 오랜 바람이자 숙원이었으므로,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병든 목숨을 놓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밀라의 시녀들은 제 상전이 던지는 조각 파편에 맞지 않도록 몸을 피하며 그녀를 말렸다.

“고, 고정하시옵소서. 황비 마마!”

“허,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냐? 너도 내가 우스운 게냐?”

카밀라가 깨진 도자기 파편 하나를 거머쥐었다. 분노와 좌절로 눈에 뵈는 것 없는 지금의 황비라면 그것으로 시녀 한 명의 얼굴 정도는 가를 것 같아 공포스러웠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황자 전하를 잉태하신 몸이시니 걱정이 되어서 말리고자 하였습니다.”

황제의 총애를 얻어 무서울 것 없는 황비의 곁에는 아첨에 능하고 눈치를 잘 보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아직 성별조차 모르는 아이를 ‘황자 전하’라 칭하며 걱정하는 체하자 과연 카밀라의 분노는 수그러들었다.

“그래…… 내겐 소중한 아드님이 계셨지.”

‘살았다…….’

카밀라가 밴 아이는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호화로운 방 안을 채운 온갖 물건을 부수던 카밀라가 곧장 옷매무새를 다듬고 부푼 배를 조심스레 쓸었다.

“이런, 내 귀한 아드님. 미안합니다. 이 어미가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조금이라기엔 엉망진창이 된 방 안이 더없이 살벌했다.

하지만 시녀들은 아무 말 없이 어지러워진 방을 치우고, 임산부인 황비를 위한 푹신한 의자를 가지고 오는 등 부산을 떨었다. 빠릿빠릿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분노의 화살은 시녀들을 향해 날아갈 테니.

패악을 저지른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카밀라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부푼 배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황자, 내 아이는 분명 황자로 태어나겠지요? 이 어미는 믿고 있답니다. 내 아드님께서는 어미인 나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정한 말투와 달리 그 내용은 무거웠다. 카밀라는 오로지 아들만을 바랐다. 황후가 낳은 적장자인 1황자를 꺾고 제국을 차지할 사내아이를 몹시도 원했다.

‘네가 아들만 낳으면 당연히 그 아이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다.’

현 황제, 빈센트는 총애하는 카밀라에게 약속했다.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제위가, 그녀에겐 황후의 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사랑하는 내 아드님은 아들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아이는 그녀에게 필요치 않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황비궁의 시녀들은 카밀라의 아이가 사내아이이길 간절히 빌었다. 황녀가 태어난다면 그 분노는 고스란히 아랫것들에게로 떨어질 것이니.

“그럼요. 황비님. 황비님과 황제 폐하 두 분이 간절히 바라시니 영특하신 황자 전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시녀들은 두려운 속내를 감추고 다디단 말만 황비 앞에서 반복했다. 카밀라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화를 충분히 가라앉힌 카밀라가 한 시녀에게 물었다.

“황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좋지 못한 질문이었다. 카밀라는 거짓말을 하는 자를 싫어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또다시 그녀를 화나게 만들 게 뻔해서였다.

달콤한 거짓을 고해 혀를 뽑히느냐, 불쾌한 진실을 고해 황비가 진노하는 것을 또 보느냐.

시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실을 전달했다.

“그, 그것이…… 후원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하옵니다.”

“뭐?”

“황후 폐하의 부친 되시는 피델리움 변경백과 시녀장, 1황자 전하까지 함께 데리고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쥐새끼 같은 첩자를 잡아냈다 해도 최근 황후궁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나들이를 가려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기에 이 사실은 아주 쉽게 카밀라의 귀까지 와 닿았다.

“왜?”

“그, 그것까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사오나…… 오랜만에 부친을 만나 기쁘신 황후 폐하께서 결정하신 사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이 좁은 궁에서 반성하라며 근신을 하고 있는데, 황후는 팔자 좋게도 나들이를 간다, 이거지.”

아아악!

또 무언가가 부서졌다. 뜨거운 찻잔이 바닥으로 엎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비명은 카밀라의 것이 아니라 사실을 전한 시녀의 것이었다. 뜨거운 찻물이 시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뜨거움에 몸서리치는 시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카밀라가 중얼거렸다.

“필시 그 대마법사라는 자의 짓이겠구나. 그렇지 않니?”

“으… 으으…….”

“황후는 내내 조용히 엎드려 지냈어. 마치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처럼. 차마 죽지 못해 목숨만 붙어 있었으나 그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려웠지.”

카밀라는 황후의 자리를 탐낸 만큼, 그 자리에 억지로 앉게 된 셀레스틴을 집요하게 주시했다.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나 현 황제로 인해 날개가 꺾인 셀레스틴은 시시각각 말라비틀어져 갔다. 가문의 힘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셀레스틴과 피델리움 백작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질이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황비 마마, 제발… 자비를…….”

“생을 체념한 사람은 제거하기가 참 쉬워. 황후도 내가 그녀를 죽이려 하는 걸 모르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아악!”

우드득. 날카롭고 높은 구두 굽이 고통에 버둥거리던 시녀의 손을 짓밟았다. 분풀이란 걸 알았으나 황비궁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희생양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으므로.

“……그런데 지금 와서 살고 싶다는 사람처럼 굴다니.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황비라는 신분이 무색하게도, 카밀라는 시녀를 폭행했다. 시정잡배처럼 마구잡이로 두들기는 손짓 발짓은 아이를 임신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섭고 잔인했다.

‘대마법사! 그깟 게 뭐라고. 희망을 가진 것처럼 굴어!’

카밀라는 초조했다. 대마법사를 욕했으나 그녀도 알았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전설 같은 대마법사의 존재만큼 훌륭한 뒷배를 찾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잘나신 대마법사께서는 카밀라를 못마땅히 여긴다는 것도 지난번의 만남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구타당한 시녀가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카밀라는 분풀이를 했다.

“바닥이 더러워졌잖아. 어서 이것을 내 눈 밖으로 치워!”

“……네. 황비 마마.”

피거품을 문 시녀는 실려 나가고, 엉망이 된 바닥은 깨끗이 치워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하지만 카밀라의 불안함은 가라앉지 않고 더 커져만 갔다.

‘……둘 중 하나라도 황궁에서 치울 수 있을까?’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이 버티는 한, 무리였다. 황후를 해치려는 수작을 부린다면 대마법사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덮어 준 덕에 이번에는 근신으로 끝났으나 다음번에는 목이 잘릴 수도 있으리라.

쿵쿵. 배 속에서 태동이 울렸다. 어미의 불안에 반응한 태아의 몸짓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황자. 이 어미가 추한 모습을 보였지요?”

미친개처럼 날뛰던 카밀라는 그제서야 분노를 거뒀다. 귀한 황자가 잘못되어서는 안 되니 행동거지는 되도록 바르게 하는 것이 좋았다.

“괜찮을 겁니다, 황자. 이 어미만 믿으세요. 곧 태어날 황자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가 아무도 없도록 어미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작은 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는 무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녀는 기어코 황후를 제가 낳을 아이를 위해, 정확히는 그녀 자신을 위해 제거할 것이다.

“그렇지?”

둥글게 부푼 배를 도닥이며 카밀라가 시녀들을 쳐다봤다.

“무…… 물론이지요. 황비 마마.”

황비궁의 시녀들은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대마법사의 등장에도 아직까지 황제의 총애는 여전하니 황비에게 거슬렸다간 아까 실려 나간 시녀의 꼴이 될 것이다.

시녀들은 카밀라의 눈치를 보며 테이블의 꽃병을 새로 갈았다. 탐스러운 장미가 다시 올라오자, 카밀라는 신경질적으로 그 꽃잎을 하나씩 뜯어 댔다.

“……잠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 대신 누군가 후원에 꽃을 꺾으러 다녀와 주면 좋겠구나. 상심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많이, 큰 꽃다발을 여러 개 가져다주렴.”

“예…… 예.”

나들이하는 황후 일행을 염탐하고 오라는 지시였다. 대마법사가 반드시 따를 테니 안 들킬 리는 없겠지만, 시녀들은 카밀라의 곁에 있다가 변을 당하는 게 더 두려워 몸을 피했다.

카밀라는 배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황자, 황자는 반드시 황자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 어미에게 냉대받고 싶지 않다면요…….

카밀라에게 이용 가치가 없는 것들은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곧 태어날 아이가 제국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가 되길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황후의 자식인 1황자에게 이 제국이 주어질 테니까.

‘그러니 그 전에 둘 다 죽여야 한다.’

무엇이 있으려나. 대마법사의 후광이 있어도 황후와 1황자를 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은.

* * *

“와아.”

“꺄우아!”

황궁의 후원은 거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겨우 표정 관리를 했지만, 율리시즈는 마음껏 입을 벌리고 꺄르륵거리며 좋아했다.

‘이 넓은 부지가 전부 정원이라니.’

후원은 마치 거대한 식물원을 통째로 옮긴 듯한 모습이었다. 희귀한 식물들과 꽃은 물론이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화려한 유리 온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과실마저 관상용으로 정원사들의 정성 아래에서 쑥쑥 자라고 있었다.

‘클로드가 가진 ‘텃밭’에 비하면 작지만, 이 후원 자체도 엄청나게 사치스럽고 호화스럽네…….’

꽃의 종류가 너무나 많아 셀 수조차 없었다. 황후의 부재로 필시 카밀라의 취향껏 심어졌을 후원은 불쾌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예쁜 정원을 정작 황후는 한 번도 못 왔다니, 너무한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