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셀레스틴과 엘리엇은 밤새도록 부녀지간의 회포를 풀었다. 황후궁의 불빛은 아침 해가 뜨기까지 꺼지지 않았다.
율리시즈는 로라가 아기방에 데려가 재우려 했지만, 엄마가 없어서인지 빽빽 울어 내가 대신 그 곁을 지켰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했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저어, 황자 전하의 방에는 대마법사님께서 주무실 침상이 없사온데…….”
곤란해진 로라가 애꿎은 치맛자락만 쥐어뜯었다. 내가 황후궁을 전반적으로 보수했으나 궁핍한 재정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만들면 그만이라.”
“아…….”
로라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마법으로 킹사이즈의 침대를 만들어 냈다. 잠옷에 굿 나이트 캡까지 쓴 윈터가 내 이부자리를 꼼꼼히 펼쳤다.
“유리 옆에는 제가 있을 테니 시녀님은 들어가서 쉬시지요.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황자 전하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죠.”
대마법사인 나보다 믿음직한 호위는 없었다. 로라는 안심하며 꾸벅 인사를 올린 뒤 물러갔다.
아기 침대에 율리시즈를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 줬다. 낮은 미성이 만들어 내는 허밍에 아이는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곧 잠이 들었다.
방 안의 불빛을 모두 꺼뜨린 후, 세진은 먼저 침대에 자리 잡은 윈터 옆에 누웠다. 윈터는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로라의 일 때문인가?’
“내일 로라에게 사과해. 윈터. 알았지?”
내 말에 윈터를 덮은 이불 뭉치가 움찔거렸다. 잘못한 것은 아는지, 시무룩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잘못한 것은 압니다. 주인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셨더라도 신사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로라에겐 사과할 예정이었습니다.”
“알면 됐어.”
“책망하시지는 않습니까? 주인님의 패밀리어로서 미숙한 모습을 보였잖습니까.”
“미숙한 게 어디가 어때서. 윈터 너라면 이런 잘못은 다신 하지 않을 거잖아. 그리고 그런 논리라면 나는 ‘클로드’로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마지막 말은 농담조였는데도, 윈터는 크게 화를 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주인님께서는…… 제 주인님이 맞으십니다.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 마세요. 세진 님은 제게 소중한 분이십니다.”
갈색 털의 페럿이 울먹거리니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윈터를 폭 끌어안고 토닥여 주며 그를 달랬다.
“미안해. 앞으로 그런 말 안 할게.”
“킁. 저도 주인님을 믿겠습니다.”
“……그래.”
품 안의 윈터는 따끈따끈한 보온주머니 같아서 잠이 솔솔 쏟아졌다. 푹신한 이부자리에, 희미하게 풍겨 오는 아기 냄새에 세진은 모처럼 편안한 잠에 들었다.
‘……너 같은 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어!’
비록, 잠결에 꾸게 된 꿈은 한결같이 끔찍했더라도.
그때, 누군가 나타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에게 따스한 말을 건넸다. 끝내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잔재를 부수고 나온 말은 너무도 따뜻해서, 나는 웅크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나의 ……님.’
당신은 누구지.
눈을 번쩍 뜨자, 따끈한 보온주머니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느껴졌다. 양쪽 옆구리를 한 군데씩 차지한 윈터와 아기 황자님이 보였다.
새액새액 고른 숨을 쉬는 율리시즈를 보던 나는 두 눈을 비비고 아기 침대와 내 침대와의 간격을 멍하니 바라봤다.
“발육이 빠른 편은 아닌 것 같고…….”
아기를 살피니 마법을 쓴 후에 공기에 잔존하는 미미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지난번에 이어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쓴 게 틀림없었다.
‘거기다 이번엔 입고 있는 옷이 깨끗해.’
암살의 위협을 받고 나를 찾아왔을 때보다 상위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고작 내 옆으로 오겠다고 자는 동안 마법을 부린 셈이라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제자님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황비 일파에게 죽을 걱정은 덜었다며 흐뭇해하는데, 아기가 깼다.
“우으으으…….”
“아, 깨워서 미안. 조금만 더 자.”
내가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 줬으나, 율리시즈는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에…… 으에에엥!”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윈터가 황자의 울음소리에 깼다. 나는 갓 일어난 페럿 집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애, 애가 우는데 어떡하지?”
“밥을 먹여야죠. 아침이잖습니까.”
그때 시의적절하게도 로라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다들 식당으로 나와 주세요.”
* * *
식당에 내려오니 먼저 온 셀레스틴과 엘리엇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눈이……”
“좀 많이 부었죠?”
황후와 그 아비의 두 눈은 퉁퉁 부은 붕어눈이 되어 있었다. 시녀들이 황후를 위해 부지런히 얼음찜질을 해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피델리움 변경백은 충혈된 눈을 하고 있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율리시즈는 외할아버지인 엘리엇에게 안기기를 거부했다.
“으에에에엥!”
“저, 황자 전하. 제가 전하의 외할아버지입니다만…….”
“으에엥!”
“……죄송합니다.”
아기 황자에게 거부당한 엘리엇은 건장한 덩치가 무색하리만치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셀레스틴이 나직하게 웃었다.
“아버지께서 너무 무섭게 생기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흥. 황후 폐하께서도 오늘만큼은 연못 속의 금붕어 같습니다만.”
서로를 놀려 먹는 부녀는 화기애애했다.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인지, 밤을 새 피곤한 얼굴임에도 개운함이 서려 있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풍요로웠다. 엘리엇이 황후를 위해 피델리움 백작령의 요리사와 식재료를 공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피델리움식 요리인지. 너무 맛있어요, 아버지!”
약해진 몸으로 인해 새 모이만큼 먹던 셀레스틴도 오늘만큼은 접시를 비우는 데 열중했다. 나 역시 훌륭히 준비된 식사에 감탄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윈터는 식사를 하면서도 로라를 흘끔거렸다. 율리시즈는 분유통을 쭙쭙 빨았다.
“황후 폐하께서 맛있으시다면 다행입니다.”
발갛게 상기된 딸의 미소를 보며 엘리엇이 행복해했다. 나 또한 음식의 맛을 칭찬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피델리움 백.”
“대마법사님께서도 만족스러워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준비하길 잘했군요.”
이후로도 화목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디저트인 딸기 소르베를 먹은 셀레스틴은 소녀처럼 설레어했다. 엘리엇은 따스한 눈으로 딸과 손자를 닳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황비를 잠시 눈 밖으로 치웠을 뿐인데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이대로 황후궁을 통째로 피델리움 백작령에 옮겨 버리면 안 될까? 그럼 이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마법사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하나 셀레스틴은 황후였고, 율리시즈는 1황자 신분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황족의 신분을 빼앗기거나 죽지 않는 이상, 황궁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비뚤어진 심성의 황제가 그들을 놔줄 리도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피델리움 변경백은 딸을 위한 만찬을 아침부터 준비했으리라.
앞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딸을 지금 이 순간 당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화목하나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3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후원으로 나들이라도 갈까요?”
“예?”
“볕이 좋고 꽃이 만발했으니 황후 폐하께서 즐기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있을 테니 황후 폐하, 황자 전하 모두 무사할 테고요.”
제국의 국모이면서도 유폐되어 살아온 셀레스틴은 한 번도 후원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황제와 황비가 그녀를 못마땅히 여겨 황후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암묵적으로 압박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대마법사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윈프리드 제국 황성이 술렁이고 있었다. 황제인 빈센트는 대마법사를 구워삶고 싶어 해 눈치를 보고, 황비인 카밀라는 현재 근신을 당했으니 황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황제는 황후가 독살당할 뻔했다는 걸 쉬쉬하며 덮었지.’
외부 인사들은 황후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황비와 황제를 제외한다면.
“이참에 황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와 함께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총명함이 바래지 않은 셀레스틴은 내가 말하는 바를 곧바로 파악했다.
“……가고 싶습니다. 나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나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아요.”
딸의 결연한 의지에 엘리엇도 찬성했다.
“황후 폐하께서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하셔야지요. 요리사에게 최고의 피크닉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셀레스틴은 오랜만의 외출에 무척 설레어했다.
“햄과 치즈, 그리고 양상추를 가득 넣은 신선한 샌드위치가 좋겠어요.”
“제가 황후 폐하가 좋아하는 것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맞아. 로라! 로라도 같이 가자.”
“어머, 저도요?”
로라는 어떤 종류의 차를 준비할까 고심하다 지목되자 깜짝 놀랐다.
“로라도 우리 가족이잖아. 우리가 언제 또 나들이를 같이 나가겠어. 로라, 같이 갈 거지?”
“저야 황후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요.”
로라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도 역시 숨길 수 없는 운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아우아!”
“유리도 기분 좋은 모양인데요?”
아기 황자님도 주변이 기분 좋은 분위기로 시끌벅적해지자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율리시즈를 번쩍 안아 주자 아이는 더 환하게 웃었다.
* * *
그 시각, 황비궁에서는 카밀라가 값비싼 도자기를 집어 던지며 분을 삭이는 중이었다.
“아아악! 그 마법사만 아니었더라면……!”
한 번만 더 위스퍼를 먹이면 황후를 치워 버릴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