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1화 (11/90)

11.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마법사이시여.”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피델리움 변경백.”

황후의 아버지이자 율리시즈의 외할아버지인 엘리엇 피델리움은 성성한 백발을 지닌 노장이었다.

그는 외동딸인 셀레스틴이 새장에 갇히듯 황궁에 유폐되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매일매일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갔다.

“제…… 제 딸과 손자의 안전을 위해 이곳으로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엘리엇이 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왜 이러세요, 변경백.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먼 옛날 피델리움 가에 진 빚을 갚으러 온 것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마법사님께서는 저희 피델리움 가문의 큰 은인이십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엘리엇은 황후에 대한 유폐령이 풀리자마자 수도 이크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아내를 잃은 뒤 홀로 남은 가족 셀레스틴은 엘리엇의 전부였다. 건강하게 자라기만 해도 고마웠을 딸은 아름답고 영특하기까지 하여 예비 황태자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딸의 앞날에 행복만 있을 줄 알았으나 현 황제인 빈센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딸은 강제로 황후가 되었고, 불행해졌다.

“딸아이가 얼마나 밖을 그리워했을지…… 아비인 저만큼은 잘 압니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늑한 응접실에서 엘리엇은 눈물을 훔쳤다. 셀레스틴이 손수건을 가져와 아버지의 눈물을 닦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셨어요, 아버지. 주름도 많이 느셨습니다.”

“……너야말로 그새 많이 야위었구나. 손목이 이렇게 가늘어서야…….”

“저는 괜찮습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더 걱정이지요.”

“무슨 소리냐! 아직 변경의 회색곰을 때려잡을 정도는 된다. 나보다…… 네가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만 겨우 받으며 황궁에 갇혀 있는 모습이 더 슬프구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변경백의 얼굴은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율리시즈를 보자마자 흐물흐물 풀렸다.

“1황자 전하, 반갑습니다. 저는 전하의 외할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아우으?”

“황후 폐하의 어릴 적과 똑 닮았군요.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세상 어느 아기도 황자 전하만큼은 못할 겁니다.”

“꺄아아.”

저를 칭찬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지, 율리시즈가 방싯방싯 웃었다. 천사 같은 아기의 웃음에 엘리엇도 같이 따라 웃었다.

그리고 아기를 한번 안아 봤다가 겹겹이 걸려 있는 보호 마법과 축복에 놀랐다.

‘중첩된 마법이 이렇게나 많이…….’

“전부 대마법사님께서 하신 겁니까?”

“네.”

“1황자 전하는 계단 위에서 굴러도 상처 하나 나지 않겠군요.”

“그전에 제가 유리를 놓치지 않을 테니 그런 불상사는 없을 것입니다.”

1황자의 애칭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내 태도에 엘리엇은 검은 백조를 본 것처럼 신기해했다.

“대마법사께서는 저희 가문과의 옛 약속보다 황자 전하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온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맞았다. 현명한 노인의 통찰력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피델리움 변경백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으십니다.”

곤란해하는 나를 위해 타이밍 좋게 윈터가 끼어들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홍차와 과자를 챙겨 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겨우 만난 외동딸의 부탁이 거론된 이상, 엘리엇의 눈엔 다과가 보일 리가 없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말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율리시즈의 선생을 구해 주세요, 아버지.”

표면적으로 스승이란 직위를 내세운 나를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제왕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과 무술, 사교를 위한 예절과 춤 등을 가르칠 가정교사를 셀레스틴은 원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젖먹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황궁에서 교육을 서두르는 경향이라 한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의아해하는 엘리엇에게 셀레스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제 몸이니 제가 잘 알지요. 제가 죽고 난 이후의 아들의 미래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쾅.

충격적인 발언에 엘리엇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소리 나게 내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셀레스틴!”

“위스퍼는…… 해독할 방법이 없는 독입니다. 클로드 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체내에 농축되었다고 합니다.”

셀레스틴의 시선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윈터가 위스퍼 뭉치를 발견해 황비를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셀레스틴은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대마법사님이시라면 어떻게든……”

“제가 클로드 님께 부탁드린 것은 제 아이의 안전이었습니다. 그 이상을 저분께 바라는 건 욕심입니다.”

차분히 죽음을 각오하는 딸의 모습에 엘리엇이 꺽꺽거리며 울었다. 구슬피 우는 할아버지의 소리에 율리시즈도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으으…….”

“괜찮아, 유리. 괜찮아.”

나는 선의의 거짓말로 율리시즈를 달랬다. 따뜻한 손길로 토닥여 주자 아기는 곧 안정을 찾았다.

엘리엇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비통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정녕 황후 폐하를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까?”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수명의 유지 및 연명만이 제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것조차도 오래갈 수준은 아니었다.

그 말에 한참을 울던 엘리엇은 마음을 다잡았다.

“죄송합니다. 늙은이가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거듭 고마워했다.

“그렇다면 황후 폐하의 남은 시간을 값지게 쓸 방도를 지금부터 짜내야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언제든 피델리움 백작령에 오시면 환대해 드리겠습니다. 대마법사님께서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보다 황후 폐하와 황자 전하에게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노인은 순수하게 기쁨을 표출하며 딸인 황후와 밀린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나와 로라, 윈터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율리시즈는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여 내가 계속 안고 있었다.

로라를 두고 나와 윈터는 머물던 별채로 들어가려는데, 로라가 그들을 붙잡았다.

“대마법사님.”

“뭡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얼마나 더 살아가실 수 있는 건가요?”

그 질문은 나로서도 난감한 것이었다.

‘나야말로 그걸 알고 싶은데.’

원작대로라면 셀레스틴은 위스퍼 복용 과다로 의문사할 예정이었다. 황비 카밀라의 짓임을 알아차리고 저지했으나, 남은 수명이 정확히 얼마일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마법사이지 의사가 아니니까요.”

“그렇습니까…….”

내 말에 로라가 실망한 티를 냈다.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충성스러운 시녀인 만큼, 로라는 셀레스틴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윈터도 로라의 슬픔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잔뜩 경계했다.

“로라, 혹시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내 주인님께 금기의 소생술 따위를 걸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이미 큰 은혜를 입은 분께 당치도 않은 무리한 부탁을 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아니라는 말과 달리 로라의 얼굴은 눈이 내린 듯 창백했다. 앞치마를 쥔 그녀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분수도 모를 욕심을 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황후 폐하가 너무도 안타까워서…… 그래서 여쭤봤습니다.”

로라가 뺨 위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의연하고 초탈하기까지 했던 셀레스틴의 슬픔마저도 몰아서 흘리는 것처럼.

저 뒤로 부녀의 다정한 대화가 들렸다. 셀레스틴의 목소리에서는 물기 한 점 묻어나지 않았다. 사정을 몰랐다면 누구도 황후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는 걸 모를 정도로.

“죽음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황후 폐하도 그저 사람일 뿐이십니다. 의연한 척, 괜찮은 척하시는 거죠. 있는 슬픔을 전부 드러낸다면 주변이 더한 불행에 빠질 거라는 걸 뼈저리게 아시는 분이시니까요.”

“…….”

로라는 내 앞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윈터는 못된 소리를 한 게 양심에 찔렸는지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나는 무표정하게 우는 시녀장을 보며 묻고 싶었다.

‘그럼 나는?’

죽음을 편안한 안식으로 여기며, 죽기 위해 대마법사의 껍데기를 두른 나는 뭘까?

이 순간 로라가 내 속내를 읽을 수 없음이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필시 로라는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원하는 나를 원망하고 욕했을 것이다.

“으에에엥…….”

어두워진 분위기를 감지한 율리시즈가 칭얼거렸다. 구김살이 진 아기 황자의 표정에 로라는 황급히 황자를 위한 재롱을 피웠다.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렸다가 펼 때 활짝 웃으려 노력하면서.

“황자님? 황자님? 여길 보세요. 로라는 울지 않았답니다. 이것 보셔요. 웃고 있지 않습니까. 로라와 대마법사님은 싸우지 않았어요.”

“우으…….”

눈물 자국이 진 얼굴로 웃어 봤자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아기 황자는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상냥해지니 다시 얼굴을 폈다.

‘참 예민한 황자님이야.’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율리시즈가 신기했다. 애들 앞에서는 말조심이 필수라더니, 과연 그 말이 옳았다.

“괜찮습니다, 황자 전하. 모든 것이 괜찮을 거예요…….”

그건 아기 황자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로라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었다.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미래도 무서운데, 하물며 이 황자님의 앞에는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곁에 있는 나조차 믿음직한 어른은 못 되고.’

“꺄우으으!”

하지만 티 없이 맑게 웃는 아이를 향해 어두운 현실을 말해 주기는 싫었다.

“……그래. 유리.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안락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라지만, 이 아기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율리시즈가 이대로 웃을 수만 있다면, 내가 상처받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율리시즈의 작고 오동통한 손가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거짓말같이 행복한 미래를 네게 꼭 선사해 줄게.’

어디선가 클로드의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거봐. 너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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