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0화 (10/90)
  • 10.

    “황제 폐하께서 대마법사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올 게 왔군.’

    황후 셀레스틴은 내 조언대로 황비 카밀라를 고발했다.

    죄목은 황족 독살죄였다. 증거품으로는 윈터의 털실쥐들이 모아 온 위스퍼 티백 뭉치가 제출됐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시녀의 시신조차 어디서 찾아와 황비에게 사주받아 독을 주입한 자라고 내놓았다.

    “말도 안 됩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시기하여 모함에 빠뜨리려는 계략입니다!”

    카밀라는 황제, 빈센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로 결백함을 주장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절절히 호소하니 넘어가지 않을 이가 만무했으나, 이번만큼은 빈센트도 대충 눈감아 주기 어려웠다.

    “카밀라.”

    “예, 폐하. 신첩 여기 있사옵니다.”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이 이 사건의 증인으로 나섰다.”

    그 말에 황비의 고개가 홱 들렸다. 카밀라의 녹색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고귀하신 대마법사께서 어찌 제국 황실의 일에 끼어든단 말입니까?”

    정중한 말투였으나 어조는 그렇지 못했다. 카밀라는 신경을 거스르는 사건에까지 힘을 보탠 클로드가 찢어 죽이고 싶을 만치 미웠다.

    ‘조금만 더 위스퍼를 먹이면 그 여자를 죽일 수 있었는데……!’

    카밀라로서는 원통하고 아쉬운 일이었다. 황후 셀레스틴만 죽이면 1황자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너무도 연약해서 쉽게 죽기 마련이었다. 민가와 귀족가, 황가를 가리지 않고 영아의 사망률은 높은 편이었기에 카밀라는 불행을 위장하여 1황자마저도 살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원대한 계획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대마법사란 작자가 다 망치려 들고 있었다.

    카밀라가 상상 속에서 클로드의 섬세한 낯짝을 갈기갈기 찢고 있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후의 부름 때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할 줄은 몰랐단 말이지.”

    ‘무엇이 대마법사를 움직이게 했을까?’

    황제의 관심사는 그것이었다. 아끼고 어여삐 여기던 황비의 처벌에 대한 사안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대마법사에게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은 나를 구명해 주는 데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폐하?’

    황비는 속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무언가 아주 귀한 것을 대가로 내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카밀라는 올라오는 원망과 설움을 삼킨 채 황제에게 대답했다. 기실 황제가 미천한 출신인 그녀에게 딱히 정답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귀한 것이라, 세상 어느 것에도 쉽게 마음이 동하지 않던 목석같던 사내가 무엇을 보고 이리 순순히 남아 주었을까…… 황후의 편까지 들어주면서 말이야.”

    빈센트가 안락한 카우치에 앉아 시가를 피웠다.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다. 선과 정의를 지키는 백의 마법사가 독살 사건의 증인을 자처하자 일각에서는 더 볼 것도 없이 황비를 처벌해야 한다고 작게나마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모르지 않지.’

    황비 카밀라가 황후 셀레스틴과 그 아들을 치워 버리기만을 고대한다는 걸.

    하지만 피로 점철된 황좌를 차지한 폭군과 그를 똑 닮아 영악하고 악랄한 황비에게 직언할 사람은 없어 그 사실은 암묵적으로 퍼져 있었다.

    그 허물을, 대마법사 클로드가 들춰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그렇사옵니다, 폐하.”

    카밀라는 황제의 자비를 바라며 붉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그의 무릎께에 비볐다. 애첩의 교태 어린 애교에 빈센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따스한 눈동자는 일변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을 거야.”

    “……어째서요!”

    “목소리 낮춰, 카밀라. 대마법사란 거물이 끼어들었잖아.”

    황제가 황비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곱게 머릿기름을 발라 탐스럽게 기른 머리카락이 붙잡히자 카밀라는 긴장감으로 떨었다.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 제아무리 내가 이 나라의 황제라고 해도 말이지. 그쪽은 백의 마법사고, 나는 반란으로 황좌를 차지한 인간이니까.”

    “…….”

    “당분간 근신해, 카밀라. 사고 치지 말고 있어. 알았지?”

    카밀라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더니,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빈센트는 마치 애완견을 대하듯 카밀라를 달랬다.

    “하오나……”

    “너의 근신으로는 부족하겠지. 이때를 틈타 피델리움 백작을 비롯한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목소리를 높일 테니까. 셀레스틴의 유폐령을 풀어 준다면 그럭저럭 만족하려나.”

    붉은 머리채 아래의 고운 얼굴이 표독스럽게도 일그러졌다.

    ‘황후는 자유로이 풀어 주고, 나는 가둔다고?’

    울컥하는 카밀라였으나 황제 앞에서는 순종만이 미덕이었다.

    “……예. 존귀하고 사랑하는 나의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착하지. 카밀라. 너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잘 알잖아.”

    빈센트는 불편한 자세로 내내 있던 카밀라를 일으켜 품에 꼭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를 곤란하게 만든 그 대마법사에게서 나도 무언가를 대가로 받아야겠다. 감히 황궁의 일에 마법사 따위가 나서다니, 이건 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봐야겠지.”

    카밀라는 기뻐했다.

    ‘빈센트, 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엾고 어리석은 남자 같으니.’

    황제의 열등감이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될 것을 알기에.

    “그럼요, 폐하.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된 이유로 황제는 클로드, 그러니까 세진을 불렀다.

    * * *

    “귀찮게 됐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윈터가 로라의 도움을 받아 티타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스킷 사이에 달콤한 크림을 끼워 넣은 샌드와 따끈한 밀크티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가야겠지. 이미 우리가 챙길 건 챙겼는데 거절하면 몹시 체면이 상할 테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실로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가 산책을 즐기는 여인이 있었다. 셀레스틴이었다.

    “꺄우아아아!”

    내 품에 안긴 율리시즈는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기뻐했다. 아이가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유리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안 갈 수는 없지.”

    “주인님…….”

    “괜찮을 거야. 윈터.”

    아직까지는.

    빈센트는 적당히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소인배였다. 나는 책을 읽어 그의 성질머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은 알았다.

    ‘욕심이 많은 작자이니 이 일로 인해 기분이 나쁘면서도 나를 제국에 속하게 만들려고 시도해 보겠지.’

    짐작대로였다. 금과 상아로 수놓은 듯한 육중한 문을 건너 만난 황제는 세진을 제국에 묶어 두려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반갑군.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 짐은 윈프리드 제국의 황제인 빈센트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윈프리드 제국의 황제시여. 클로드라 합니다.”

    대마법사에게 주어진 특권인 약식 인사를 아낌없이 사용하니 황제의 미간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못하고 은근히 제국에 소속될 의향이 있는지를 캐물었다.

    “1황자 율리시즈의 스승이 되어 남겠다고 들었네.”

    “네, 사실입니다. 황후 폐하의 부탁으로 1황자 전하께서 성인이 되실 때까지 남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예 윈프리드 제국에 남는 것은 어떠한가? 1황자와 그토록 오래 지내다 보면 정이 쌓일 테고, 자네도 이 나라를 떠나기 아쉽지 않겠는가.”

    그럴 일은 결단코 없을 터였다. 나는 율리시즈의 성장을 무사히 지켜본 뒤 서서히 죽어 갈 테니까.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날 수 있게 해야겠지.’

    내가 사라진다 한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도록.

    “마법사의 거취는 자유로워야 마땅합니다. 권유는 잘 들었으나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부러 감사하다는 겉치레식 인사조차 붙이지 않았다. ‘클로드 하센티온’은 그래야 했으니까. 내가 물렁하게 나선다면 이 탐욕스러운 황제는 그를 어떻게든 더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처럼 나설 것이다.

    “흠…… 알겠네. 단,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 귀화 요청을 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개자식아.

    괜한 소리라는 걸 나도, 황제도 모두 모르지 않았다. 빈센트는 구겨진 제 체면을 살리고자 내뱉은 말인 걸 모르지 않는지, 웃고 있던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폐하.”

    “……그리하게.”

    황제궁을 나온 나는 황제 근처에 1초도 더 있기 싫어서 이동 마법을 사용해 황후궁의 별채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응.”

    윈터가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뒤로 율리시즈를 품에 안은 로라와 셀레스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다들 나와 계세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셀레스틴이 대답했다.

    “은인께서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시는데, 걱정이 안 될 수 있을 리가요.”

    “괜찮습니다. 거슬리기야 했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지금 저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겁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좋았더라면 모를 일이었다. 황제가 어질고, 현명한 남편이었더라면 나는 윈터의 반대를 무시하고 이 나라에 남으려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탐욕스럽기만 한 폭군이어서야 되겠나.’

    저런 인간이 천사 같은 율리시즈의 아비라니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동시에 저런 아비 때문에 미래에 그가 불행한 폭군이 되어 모든 것을 해치려고 했던 것일까 슬퍼졌다.

    “들어가시죠. 아직 바람이 차갑습니다.”

    셀레스틴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이었는데, 그녀가 빙긋 웃으며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했다.

    “대마법사님 덕분에 제게 귀한 손님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구십니까?”

    “저의 아버지십니다.”

    피델리움 변경백이 찾아왔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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