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시력을 잃은 시녀를 보고 황비는 하등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제, 제발…….”
“[이동하라.]”
울며불며 자비를 호소하려던 시녀는 주문 한 번에 곧바로 사라졌다. 윈터가 내게 물었다.
“황비궁으로 보낸 것입니까?”
“응.”
“다음 날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가 되어 궁 밖을 빠져나가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내가 죽인 거야.’
어디선가 너 때문이라고 악다구니를 치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내 자아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클로드의 몸에 빙의당하면서 강제로 몸에 주입당한 기억과 이식받은 자아가 뒤섞여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토할 것 같아…….’
윈터가 내 흔들림을 느끼고 등줄기를 기어올라 뺨을 앞발로 감쌌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안 괜찮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오연한 척하시는 게 제 주인님답기는 하네요.”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죽어 마땅한 짓을 한 건 그 시녀야. 내가 쓸데없이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지.”
“거짓말 진짜 못하시네요.”
“……알면 그 입 좀 다물지?”
“넵.”
다행히도 혼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율리시즈, 약속의 대상인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시녀가 충실히 첩자의 임무를 해냈더라면 위스퍼는 머지않아 율리시즈에게도 먹여졌을 수도 있겠지.’
연약한 아기에게는 아무리 약한 독이더라도 치명적이다. 아기를 돌보며 가호와 축복의 주문을 걸어 두었으나, 덜 여문 장기에 독이 스며든다면 피할 수 없이 위독한 상태를 맞을 터.
그것을 생각하자 내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다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변화가 다행스러우면서도 다소 소름 끼쳤다.
가라앉은 내 심기를 살피며 윈터가 털실쥐들을 모았다. 첩자를 찾아낸 털실은 구불구불 몸을 말더니 쥐의 형상으로 나타나 윈터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찍찍.”
“무려 제국의 안주인을 독살하려던 증거품이다. 고발용으로 넘길 것이니 소중히 간직해.”
“찍찍찍.”
화사한 분홍색 털실쥐들은 위스퍼 뭉치 앞으로 가 몸을 뭉쳤다. 이윽고 분홍색 털실로 짜인 작은 주머니가 나타났다. 윈터는 그 주머니를 주워 내게 건넸다.
“황후 폐하께 드릴 거죠?”
“응.”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율리시즈 황자님을 위해서요.”
“……그래.”
내가 다시 한번 주어진 삶을 받아들인 이유는 오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내 관심은 온통 율리시즈에게만 쏠려 있었다. 셀레스틴과 로라는 절대 짐작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대마법사에게 하루 종일 1황자의 유모 역할을 하라고 억지를 부려도 난 그러려니 받아들일 것이다.
현재 내게 의미가 있는 존재는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 단 한 사람뿐이었기에.
“……저한테도 신경 좀 써 주십시오.”
윈터는 그것을 짐작했는지 내게 투정을 부렸다.
패밀리어는 마법사의 단 하나뿐인 충실한 종복.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이나 신뢰와 애정을 먹고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길 바라는 건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윈터는 내게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렸다.
“수고했으니 쓰다듬어 주십시오.”
“응?”
“상입니다. 유능한 패밀리어에게는 포상이 필요합니다.”
굳어졌던 얼굴 근육이 그 말에 사르르 녹아 작은 웃음꽃을 피웠다.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던 마음이 겨우 혹한을 피했다.
“그래. 여기 상 줄게.”
윈터를 무르팍에 앉히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윈터는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고 내게 종알거렸다.
“주인님께서 약속을 이루신 후에도 살아 계시면 좋겠어요.”
“…….”
“안 될까요?”
“미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
윈터도 봤으니까 알겠지. 제 주인의 몸에 새겨진 클로드의 지독한 저주를.
약속을 지킨 순간부터 몸에 조금씩 금이 가게 만들어 끝내 가루로 변해 흩어져 버릴 그 끔찍한 저주를.
윈터는 포상의 보드라운 촉감을 음미하며 살며시 눈을 떴다. 집사복 주머니에는 독살 증거품이 빵빵하게 들어 있었다.
“로라, 이것을 황후 폐하께 전해 줘요.”
“이게 무엇입니까?”
로라는 윈터가 몇십 년 묵은 패밀리어라는 것을 알자, 공대를 사용했다. 이에 윈터도 로라에게 예의를 차렸다.
야무지고 충실한 종복은 어디에서 보든 마음에 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황후 폐하의 병세를 악화시키던 원인입니다.”
“……!”
“내 주인님께서 나를 시켜 며칠 전 잡아낸 것이고.”
주인이 밥 먹듯이 안위를 위협받다 보니 시녀장도 자연스럽게 독에 민감해지게 되었다. 로라는 꾸러미 속 티백들의 정체가 위스퍼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또한 그 티백 귀퉁이에 낸 자수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 시녀의 이니셜이라는 것도, 요사이 황비궁에서 귀중한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한 시녀를 매질해 궁 밖으로 쫓아낸 것도.
“……황후 폐하.”
“왜 그러니, 로라.”
로라는 조심스럽게 셀레스틴에게 위스퍼 뭉치를 건넸다.
“이것이 무엇이니?”
“황후 폐하 독살 시도의 증거품이옵니다.”
“……뭐라고?”
황후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셀레스틴도 알았다. 이 황궁에서 그녀가 죽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사라진 시녀가 황비 전하의 끄나풀이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닌 것을 보아 지속적으로 황후 폐하의 체내에 위스퍼가 농축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시녀가 사라지고 위스퍼가 끊겨 잠시 몸이 회복되는 것처럼 느끼셨을 수도 있지만, 이미 중독된 황후 폐하의 몸이 어디까지 버텨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라의 눈가는 눈물로 흥건했다. 죄책감이 눈물로 아롱져 떨어졌다. 사람을 잘못 보고 황후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죄책감에 로라는 고통스러워했다.
셀레스틴은 야윈 얼굴로 시녀장을 다독였다.
“괜찮다, 로라. 다행히도 대마법사님 덕에 증거물도, 누가 이 일을 사주받아 행했는지도 알게 되었잖니.”
“하지만……”
“죽었겠지요. 그 시녀는.”
내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황비는 화근을 남겨 둘 성정이 아니었다. 위스퍼를 먹이던 것이 들통난 멍청한 시녀를 살려 봤자 황비에겐 손해였다.
“그렇지만 이 사태를 발견한 것은 저이니, 제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실지라도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름 불안한 황후와 로라를 안심시킬 겸, 또 치미는 분노를 억누를 겸 부러 환히 웃어 보았다.
하나, 내부 온도는 급격히 낮아진 것처럼 오싹해졌다.
“주인님의 눈에서 불똥이 튀긴다…….”
윈터가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주인님의 호박색 눈은 꿀처럼 달콤하여 적색 불티 따윈 보일 리가 없건만 어디선가 불꽃이 펑펑 터지는 듯한 환상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타오르던 분노가 푸시식 꺼졌다. 너무 부담스러워서였다.
“그런 말은 자제해 줄래, 윈터?”
“저는 바른말을 했을 뿐입니다.”
윈터가 고갯짓으로 셀레스틴과 로라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나는 두 사람이 나 때문에 숨도 못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대신 화를 내 주셔서 감사해요.”
평정심을 찾은 셀레스틴은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면…….”
“황비를 고발하죠, 황후 폐하. 당하고 살기만 하는 건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지 않았습니까?”
“……네.”
“다 조져 버려야지요.”
이 일로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은 완벽히 황후의 편에 섰다며 웅성거리는 무리들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다른 이도 아니고 율리시즈를 낳은 어미인 만큼, 나는 셀레스틴을 위해 최대한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머리 아프게 황제파니 귀족파니 하는 당파 정치에 끼어들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호사가들이 주절거리는 낭설 따위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저 말고 본인과 율리시즈의 안전만 생각하시어 결정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니 이리 온화하게 말할 수 있었다.
셀레스틴은 상황의 맥락도 파악 못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쇠약해지긴 했어도, 이 기회가 대마법사가 손수 떠먹여 주는 복수라는 건 알았는지 눈빛이 번뜩였다.
“오랜만에 황제 폐하께 문안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품에 안은 율리시즈를 향해 짙은 웃음을 흘렸다.
“꺄아아아!”
“1황자 전하께서도 좋아하시는군요.”
“주인님, 그건 억지입니다.”
윈터가 태클을 걸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율리시즈를 둥개둥개 얼러 주며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어. 마나에 대한 재능이.”
“예?”
“살기 위해 갓난아이인 몸으로도 미숙하게나마 마법을 발휘했다면, 어쩌면 지능도 높아서 알아들을지도 모르지. 안 그래?”
의기양양한 내 말에 윈터는 황당해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꺄우으아!”
윈터는 그저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귀여운 아기 1황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제 주인의 잘난 외양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주인님께서 반짝거리는 얼굴을 가지고 계시니 그럴 겁니다.”
“내가?”
“그리고 1황자 전하께서는 황족답게 벌써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시는 거 같고요.”
“아아아우!”
율리시즈가 동의하듯이 크게 소리를 냈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기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로라와 셀레스틴도 피식피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마법사님께서 아름답기는 하시지요. 조금만 더 자라면 대마법사님과 결혼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분께서도 어릴 적, 예쁘고 빛나는 외모를 지닌 분들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셨거든요. 거울을 보면서도 행복해하셨습니다.”
“로라, 그 정도는 아니었어.”
“제가 몇십 년을 황후 폐하 곁을 지켰는데 아니라니요?”
훈훈하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고발이란 무거운 사안은 잠시 잊혔다.
셀레스틴은 오랜만에 남편인 황제를 만나 황비가 저지른 사특한 짓을 까발릴 것이고, 그로 인해 한바탕 궁내부가 시끄러워질 테지만 이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진 않았다.
‘안 되면 내가 나서서 되게 만들어야지.’
“그렇지, 유리?”
“꺄우아!”
이 아이의 올바르고 건전한 미래를 지켜 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괜찮았다.
그게 꼴 보기 싫은 황제, 빈센트를 마주하는 일이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