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님! 일어나세요!”
‘뭐야.’
모르는 누군가가 또 날 보고 일어나라고 보채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엔 작게나마 뺨도 두들기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타인에게 얻어맞는 순간이 유쾌할 수는 없었다. 짜증을 왈칵 내며 일어났다.
“누구야!”
“아이고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십니까?! 접니다, 저! 윈터요!”
“……?”
사람의 말투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웬 갈색 털의 귀여운 페럿 한 마리가 내 배 위에 서 있었다.
두 발로 선 페럿은 앙증맞게도 맞춤 제작으로 만들어진 듯한 집사용 의복을 입고 있었다. 두 앞발은 방금까지 내 얼굴을 때리고 있었는지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동물이 말을 해?’
클로드란 놈이 멋대로 몸을 바꿔 빙의시킬 때부터 느꼈다지만, 설마 동물이 말을 할 줄 아는 판타지적 세계에 올 줄은 몰랐다.
꿈은 아니었다. 방금까지도 저 페럿이 찰싹찰싹 볼을 찰지게 때리면서 깨우질 않았나.
“주인님께서 이렇게 무례한 방법으로 깨우라 하셔 놓고는 어떻게 제게 화를 내십니까?”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윈터라는 페럿이 도리어 버럭 화를 냈다. 갈색 털로 뒤덮인 조그마한 페럿의 눈에서 억울함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이런 식으로 깨우라고 했다고?”
“예! 평소에는 누가 손만 닿으려 해도 질색하시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아침 내내 고민했습니다! 일어날 때까지 반드시 얼굴을 때리면서 깨우라고요!”
고민한 것치고는 페럿의 손놀림은 꽤 야무졌다. 필시 주인에게 쌓인 것이 많으리라.
‘클로드 이 자식이…….’
윈터의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이건 클로드란 그 괴상한 남자가 그의 몸에 빙의할 나를 위한답시고 마련한 조치였다.
윈터를 지그시 바라봤다. 귀여운 페럿 집사는 양심에 찔렸는지 작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저, 저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지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내 배 위에서 인제 그만 내려와.”
피곤했다. 조잘거리는 윈터를 혼내기는커녕 얼른 내보내고 잠이나 더 자고 싶었다.
방 안은 언뜻 보기에 굉장히 화려했으나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침대와 베개가 폭신한 건 마음에 들었다.
‘클로드랑 한 약속이야 천천히 지키면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윈터를 잡아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늑했다.
“……주인님?”
“잘 거야. 나가 줘.”
축객령을 내렸는데도 윈터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 우리 주인님이 아니구나. 정말로.”
충격에 빠진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앳되어서 괜히 사람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나는 클로드를 다시 욕했다. 진짜 몸에 되돌려 놓겠다더니 인수인계(?)가 아주 형편없었다.
“그래. 아니니까 나가 줄래? 나 정말 피곤하거든.”
“싫어요. 당신이 우리 주인님이 아니라면 더더욱 일어나야 합니다.”
홱. 두꺼운 이불이 윈터의 앞발 짓 한 번에 옆으로 날아갔다. 나는 몸을 옹송그리며 인상을 썼다.
“무슨 짓이야?”
“여기는 윈프리드 제국의 황성입니다. 저의 주인님이자 대륙의 위대한 대마법사인 클로드 하센티온께서는 이곳에 초대된 귀빈이고요.”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것인가, 라는 표정으로 윈터를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자 작은 페럿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주인님을 이곳으로 초대하신 황후 폐하와 만나기로 한 날입니다. 일어나셔야 해요. 지금도 늦었습니다.”
윈터가 앞발을 손뼉을 치는 것처럼 두드렸다. 그러자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강제로 욕실로 향했다.
“뭐야 이게!”
“깨끗이 씻고 단장해서 황후 폐하를 만나러 가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새’ 주인님.”
윈터는 인정사정없었다. 귀여운 페럿은 외모와는 달리 몹시 냉정한 태도로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종알거렸다.
“시간이 없으니 준비하면서 말씀드리지요.”
“야!”
“자! [세면 도구들아, 주인님을 씻겨 드려!]”
발버둥 쳤으나 윈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따뜻한 장미수와 향유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시중드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저 맹랑한 페럿 한 마리가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모든 것이 마법처럼 이루어졌다.
그래, 마법처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이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어.’
알몸이 된 가슴팍 위로 못 보던 시계 문신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탈출, 탈출해야 해.’
그런데 저 갈색 페럿을 어떻게 따돌리고 도망치지?
머리를 굴리던 중, 아까 저 페럿이 주문을 통해 마법을 부렸던 게 생각났다.
이 육신은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의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마법을 부릴 수 있을지도 몰라!’
기대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요리조리 바삐 움직이는 페럿에게 소리쳤다.
“[멈춰!]”
그러자 갈색 페럿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페럿이 마법으로 부리던 세면 도구들도 공중에서 힘을 잃고 툭툭 떨어졌다.
‘서…… 성공인가?’
기쁨도 잠시, 갈색 페럿이 입을 움직였다.
“호, 제법이시군요. 하지만 탈출하고 싶으셨다면 입을 닥치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이랍니다. [구속]!”
“으아앗!”
페럿의 주문에 내가 건 주문이 깨진 게 느껴졌다. 나를 다시 따뜻한 욕조 물속에 처넣은 페럿은 후후 웃으며 내게 말했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나의 ‘진짜’ 주인이시여.”
* * *
탈출은 글렀다. 윈터라는 저 페럿을 이길 수 없단 판단을 내린 나는 순순히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묻기로 했다.
“방금 우리가 썼던 게 진짜 마법이야?”
“네. 잘 보셨습니다. 진짜 몸의 주인이시라더니, 감이 좋군요. 주인님과 제가 한 건 전부 마법의 힘입니다.”
“정말…… 마법이라고?”
“이곳에 보내지기 전에 주인님께 들으셨을 텐데요. 이곳이 대충 어떤 세상인지를요.”
“……보긴 봤지.”
책 빙의를 시킨다더니, 그 괴짜가 살던 세상이었나. 원래부터 존재하던 세상을 책으로 만들어 단기간 속성 주입 교육을 내게 시킨 건가? 혼란스러웠다.
“아, 됐습니다. 주인님께는 무엇이든 다 잘 어울리지만, 역시 이 복장이 최고예요!”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새하얀 눈처럼 시린 백발에, 호박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그 또라이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머리 색처럼 흰 예복 위로 금실로 수를 놓은 푸른 띠를 두르고, 각종 푸른빛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낀 남자의 모습은 굉장히 화려했다.
‘……이게 이제 내 몸이라고?’
클로드는 진짜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낯선 몸이 주는 이질감은 엄청났다.
클로드와의 약속을 증명해 주는 계약의 인장을 목욕 도중 보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꿈일 거라고 단정했을 터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서늘한 표정으로 거울을 깨뜨릴 것처럼 노려보는 내게 윈터가 말을 걸었다. 밀어붙이던 아까와는 달리 내 눈치를 보며 조마조마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질 경황도 없고.”
“거슬리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윈터는 묘하게 기쁜 표정이었다. 저 갈색 털 공 같은 페럿이 무엇 때문에 저리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이것까지만 착용하면 됩니다.”
윈터의 손짓 아래에 보석함이 열리더니 내 손가락으로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졌다.
“귀걸이에 반지에 너무 거추장스러운데.”
“주인님은 이 정도는 치장하셨습니다. 황궁에 왔으니 꾸미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초청받은 손님으로서 예의를 다하는 셈이고요.”
그런 예의가 있나. 의아했지만 윈터는 신나서 열과 성을 다해 완성한 내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가시죠, ‘새’ 주인님. 윈프리드 제국의 황후 폐하를 알현할 시간입니다.”
“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그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등을 미는 윈터가 좋게 보이진 않았다.
“가시면 아실 겁니다. 반지가 길을 인도해 줄 거예요. 약속을 이뤄낼 수 있도록.”
“…….”
약속, 그 말은 마법보다 더 강력하게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윈터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정중한 태도로 대기 중인 시녀가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예정대로 뵙기를 청하십니다.”
“내 주인께서 지금 바로 갈 겁니다.”
윈터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약속을 들먹인 이상, 나도 윈터의 말에 따라야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피곤해서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작정 복도로 발을 내밀자, 반지가 푸른빛을 반짝였다.
‘아.’
낯선 감각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세찬 파도처럼 뇌 안을 침범했다.
그건 기억이었다.
내 것이 아닌, 클로드 하센티온의 육체가 겪은 세월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수한 육체의 기억이 내게 흡수되었다.
“황후 폐하,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 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마침내 시녀가 황후궁에 다다라 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클로드가 겪었던 모든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이질감은 사라지고 기묘한 안정감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낯설기만 했던 화려한 황성의 내부가 흔한 길가의 꽃처럼 더없이 익숙하게만 여겨졌다.
‘윈프리드 제국의 황후가 나를 찾은 이유는 아들 때문이다.’
깨어났을 때 하필 제국의 황성에 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마법사여.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후, 셀레스틴이 나와 윈터를 맞이했다. 그녀의 품 안에는 작은 아기가 강보에 싸여 안겨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1황자 전하.”
나는 묵례만, 윈터는 예법을 따라 정중히 황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저 아이가 1황자.’
화장으로도 황후의 얼굴에 완연한 병색과 피로의 기색을 지우긴 어려웠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던 성 내부와 달리 황후궁은 소박하고 조촐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건 아기인 1황자였다.
“뵙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는데, 이리 얼굴을 볼 수 있어 영광입니다, 대마법사님.”
“인사치레는 되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부탁하실 것이 있어 부르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습니다.”
황후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저 1황자가, 클로드에게 구하기로 약속한 미래의 폭군이라는 것을.
“내 아들, 1황자의 보호자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앙상한 여인의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꽉 붙들었다. 나는 무심히 그를 지나쳐 아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가슴팍에 있는 계약의 인이 발동했는지, 심장이 크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속은 지켜.’
그게 내가 원하는 죽음을 얻을 유일한 방도니까.
“많은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발 이 아이가 살아남아 주었으면 해서…….”
“하겠습니다.”
“……예?”
“제가 1황자 전하의 보호자가 되겠습니다. 황후 폐하.”
저 아기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나는 편안히 죽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나를 더없이 기껍게 만들었다.
“부족함 없이 1황자 전하를 돌볼 것입니다. 대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전하께서 성인이 되실 때까지는 제가 지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