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1화 (1/90)
  • 1.

    “스승님, 스승님이 좋아요.”

    금발의 소년 황제가 스승을 보며 눈을 접고 웃었다. 초승달처럼 곱게 휜 눈썹 사이로 첫사랑의 기쁨으로 반짝이는 자색 눈동자가 보였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성인이 된 소년. 그 소년이 스승을 위해 구해 온 오색찬란한 꽃은 소년의 눈부신 미모에 미치지 못했다.

    “나도 너를 아낀단다. 유리.”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상한 말이었다. 스승은 제자를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폈기에 황제의 애정 표현이 익숙하기만 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무엇이 말이더냐?”

    “제가 스승님을 좋아한다는 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솨아아. 둘 사이를 제법 거친 바람이 헤치며 지나갔다.

    “나를…… 연애 상대로 본다는 말이냐?”

    “예. 스승님.”

    사랑합니다.

    다섯 음절을 내뱉는 황제는 더는 소년 같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미 스물로, 어엿한 청년이었으나 아직도 앳된 얼굴 탓에 스승은 제자를 그저 소년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눈앞의 사내가 낯설었다. 스승인 그가 말도 못 하던 젖먹이 때부터 먹이고 키워 온 어린아이는 어디로 가고, 사랑받길 원하는 수컷 하나가 서 있는 것인지.

    “……나는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

    어떤 술수도 없이 순수하게 진심을 맞부딪친 황제에게 스승은 축객령을 내렸다.

    하나 황제는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너의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너를 지켜 온 사람이다. 너는 지금 내게 연정과 익숙함을 혼동하여 떼를 쓰고 있는 것이야.”

    “제가 그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를 바보로 보이십니까?”

    젊은 황제, 율리시즈가 미간을 구겼다.

    “제가 언제까지 스승님 앞에서 어린아이일 줄만 아셨습니까. 혼란스러울 적은 이미 지났습니다.”

    “…….”

    성장의 벽을 넘어 근사한 금발의 미남이 된 황제가 스승에게 화사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스승님께 청혼합니다.”

    “…….”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대답은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스승님께서 편하실 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백을 마친 젊은 황제는 귓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자리를 피했다. 황제의 첫사랑이었다. 하늘하늘한 꽃잎이 흔들리는 봄의 정원에서, 황제의 스승은 그저 꽃다발을 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쩌려고 이러느냐.”

    꽃잎을 실은 바람이 색이 다 빠져 바랜 듯한 백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의 스승, 클로드 하센티온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미안하지만 유리, 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성 지향성 이전에……. 너랑은 이어질 수 없는 결격 사유가 있다고.”

    새하얀 머리의 남자는 제 머리카락처럼 흰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가슴팍에 그려진 시계 모양의 문신이 보였다.

    12시 자정까지 남은 칸은 고작 2칸이었다.

    “……얼마 안 남았네. 내가 살 수 있는 시간.”

    한 칸의 수명은 1년씩이니.

    고작 2년.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 아니 그 껍데기를 껴입은 남세진의 육신이 붕괴하기까지.

    앞으로 고작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죽음이 예정된 시한부 육신의 스승은 제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었다.

    절대로.

    * * *

    숨이 끊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차가운 물이 나를 삼켰다. 순식간에 폐부로 물이 차올라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다가올 죽음을 향해 몸을 늘어뜨렸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았으므로.

    * * *

    “……어나!”

    ‘누구지.’

    흐릿한 의식 속에서 겨우 생각했다. 낯선 목소리는 계속해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일어나. 지금 네가 죽어서는 곤란하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아.

    ‘……나는 분명 물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멍하던 정신이 퍼뜩 맑아졌다. 뛰어내린 순간 피부를 매섭게 때리던 물의 감촉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필시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죽어서 저승에라도 온 것인가. 얼떨떨해하면서 눈을 힘겹게 뜨자 시야에 웬 백발의 잘생긴 외국인 남성이 보였다.

    “드디어 일어났네.”

    “……너 뭐야?”

    “좋아.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영혼까지 소멸하기 전에 건질 수 있었다니. 휴, 잘못되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금색 눈동자를 찬란히 빛내는 남자는 내 목소리를 가뿐히 무시했다. 일어나라고 해 놓고서, 그는 태연히 자기 할 말만 지껄였다.

    자살했으니 천국에 갈 수는 없었을 터. 그렇다고 악마라고 보기엔 외형만큼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하, 이 완벽함이란.”

    “야, 너 뭐냐고.”

    나는 죽었다. 마지막 숨이 끊겨 주마등을 본 것까지 확실했다. 더구나 내가 눈을 뜬 공간은 온통 새하얗기만 해 절대 현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저승사자도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야?

    천사같이 생긴 미형의 남자는 경계심 어린 내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너를 살리러 왔어.”

    “……뭐?”

    “정확히는, 너를 이용하기 위해서 찾아왔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표정 가득 의구심을 떠올린 내 귓가에 남자가 속삭였다.

    “소년, 자네 혹시 책 빙의라는 걸 하지 않겠나?”

    그 말에 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인가?

    * * *

    나도 소설을 읽어 봐서 알았다. 책 빙의를 하는 주인공들은 꽤 많다는 것을.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우선 이 책부터 읽어. 너희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폭군에 관한 이야기지.”

    “이걸 왜?”

    “그거야 네가 그 책에 빙의해야 하니까?”

    ‘이 미친놈이?’

    보통은 자신이 읽었던 책에 빙의하는 것 아니었나? 책 빙의를 시켜 줄 테니 다짜고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어이없는 내 표정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읽어! 읽으라고! 1분 1초가 급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소설의 주인공이란, 대체로 더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내게 책 빙의를 시켜 주겠다는 남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 찾아봐.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들이 많을걸?”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사정이 있어서.”

    “그게 뭔데?”

    생글생글 재수 없게도 계속 웃던 남자가 그 순간에는 정색했다.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 몸, 원래 네가 진짜 주인이거든.”

    “진짜 미친놈 아니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책부터 읽어, 책부터.”

    “싫어.”

    “[읽어]”

    남자의 손놀림 한 번에, 나는 제목도 없는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다 읽으면 내 몸에 빙의시켜서 그 책 속 세계로 보내 버릴 거야.”

    ‘뭐?!’

    “그러니 잘 읽어. 거기서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협박이었다. 욕이라도 한 사발 해 주고 싶었으나, 말문까지 막힌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개소리였다.

    모든 종교에서 자살이 큰 죄라고는 하지만 설마 이런 미친놈을 만날 줄이야.

    속으로 이를 갈며 책을 다 읽기만 하면 저놈의 잘난 상판대기를 후려쳐 주리라 마음먹었다.

    * * *

    제목도 없는 책의 내용은 꿈도 희망도 없었다.

    간략하게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불쌍히 죽은 황후의 아들인 1황자가 폭군이 되자 악독한 황비 소생의 2황자가 그를 죽이고 행복해지는 이야기였다.

    보통이라면 주인공에게 집중해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주인공인 2황자는 교활하고 난폭한 성정이었다. 그가 오히려 더 악역 같아서, 나는 1황자에게 더 관심이 갔다.

    “……나는 내 어머니를 위한 정당한 복수를 하는 것뿐이다.”

    폭군이 되어 선황인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면서 남긴 1황자의 대사가 이상하리만치 눈에 밟혔다.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 악역은 죽고 주인공인 2황자는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물론 2황자의 어머니인 황비도 그 행복한 결말에 함께 있었다.

    해피 엔딩이었지만, 해피 엔딩이라 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내가 책을 덮자, 여전히 뺀질거리는 얼굴의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다 읽었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을 한 대 날렸지만, 남자가 피했다.

    “이크, 폭력은 옳지 않아.”

    누가 할 소린데?

    “……여기에 네 몸을 입고 가서 뭘 하라는 거야?”

    “간단해. 그 이야기 속 폭군을 살려 줘.”

    “뭐라고?”

    “더 정확하고 길게 설명하자면, 그 폭군의 아주 어릴 적부터 네가 스승이 되어 올바르게 키워 주면 돼.”

    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인지.

    갓 성인이 된 내 처지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스승이 될 만큼의 스펙은 못 되었으니까.

    “그렇게 하면 넌 내게 뭘 해 줄 수 있는데?”

    “그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바르게 키워 주기만 하면, 그땐 죽게 해 줄게.”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너무 길잖아. 거절하면?”

    “억지로라도 하게 만들 거야. 이건 본래 네 몸이고,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거든. 자세히 알려 줄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래.”

    아리송한 소리만 하는 남자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아까의 경험으로 남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이 공간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는 기분 나쁜 직감이 스쳤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남자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 일만 무사히 끝내 주면, 너는 네가 바랐던 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고통 없이, 약속을 지킨 순간부터 네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릴 거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된 후 딱 2년만 지나면, 넌 흔적도 없이 죽어 사라질 수 있을 거고.”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

    무서운 이야기였으나 나는 그 말에 혹했다.

    “……그거면 돼?”

    “응. 스승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보호자 역할을 맡아 달라는 것에 가깝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다. 저 남자는 능력 있는 미친놈이었다. 내가 거절한다 해도 아까처럼 억지로 밀어붙일 게 분명했다.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웃으며 거슬리는 말을 내뱉었다.

    “약속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는 저주 따윈 걸어 주지 않을 거야. 이 몸뚱어리, 나 정도가 아니고서야 저주도 쉽게 통하지 않는 몸이라서.”

    자기 몸을 가지고 물건처럼 흥정하는 남자의 웃는 얼굴은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알았어. 할게.”

    “고마워.”

    선택권 따위 없는 협박을 내세웠으면서, 남자는 뭐가 좋은지 웃기만 했다. 역시 얄미운 놈이니 한 대 쳐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어?’

    “어때? 진짜 너의 몸은.”

    눈앞에 내가 있었다. 약 20년간 익숙히 봐 왔던 내 모습을 타인이 걸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내가 좀 잘난 마법사라, 몸 바꾸는 건 일도 아니라서. 아, 이 경우는 원래대로 되돌렸다는 말이 맞겠지만.”

    “알아듣게 설명을 해! 이게 진짜 내 몸이라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걸?”

    이질감이 드는 남자의 몸에 당혹해하는 나를, 남자가 가볍게 밀쳤다.

    “어?”

    그러자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더니 나를, 이제는 이름 모를 남자가 된 날 끌어당겼다. 허우적거렸으나 빨려 들어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명 지를 새도 없이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다시 꺼졌다.

    “참, 이제 ‘네’ 이름은 클로드, 클로드 하센티온이야.”

    얄미운 남자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제 이름을 밝혔다.

    그를 한 대 때려 주지 못한 것을 나는 미치도록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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