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72)

베네딕트가 손을 들어 마법진을 그리자 공중에 일렁이는 싱크홀이 생겼다. 에데르트가 북부에 오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기도 했다.

자카리는 마수에 사로잡힌 발터의 육신을 치료했지만 그의 영혼까지 붙잡지는 못하였다. 에데르트에게도 이미 한 번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모르는 세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발터를 찾아내기 위해 에데르트는 늘 짤막한 시간 여행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매번 기대에 부풀어 떠났다가 그녀 홀로 돌아온 지가 벌써 몇 번째일까.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가시면 꼭 만날 수 있기를.”

그는 소망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발터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지 않았기를, 그래서 전언을 받자마자 달려온 그녀의 웃는 얼굴에 숨겨진 외로움이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고마워요, 베네딕트.”

“제가 더.”

베네딕트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휙, 떠밀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시야로 쏟아져 내렸다.

***

날카로운 빛이 눈을 마구 찔렀다. 에데르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늘 그렇듯 정신을 차리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번에 베네딕트가 그녀를 보낸 곳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일까. 지난번에는 조선 시대에 떨어지는 바람에 도착하자마자 귀신으로 몰려 죽을 뻔했다.

늘어진 교각의 기둥, 눈부신 시야 너머로 보이는 빌딩 숲. 오랜만에 보는 현대적인 풍경에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빠앙!

커다란 경적이 울렸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리 위. 쏟아지는 햇살을 반사하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에데르트는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찾았다.

얼굴이 달라도, 눈동자 색이 달라도, 입고 있는 옷차림이 달라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였다.

“발터!!!”

뛰어내리기라도 하려는 듯, 다리 아래를 살펴보고 있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뛰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빠앙!

경적을 울리던 대형 트럭이 찢어지는 타이어 자국을 내며 급하게 멈춰 섰다. 그녀를 안고 바닥을 구른 그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잇새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봐요. 차도 위에서…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죽으려고 환장했어!!!”

그들 바로 앞에서 멈춰 선 트럭에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사가 튀어나오며 삿대질을 했다. 얼굴에 생채기가 난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공손히 사과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시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당신은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어…?”

“알아서 하겠습니다.”

기사는 몇 번의 다짐 끝에 트럭을 몰고 사라졌고 덕분에 약간 이어지던 다리 위의 정체는 곧 풀렸다. 에데르트는 그제야 그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깨달았다. 눈에 익은 풍경은 그녀의 집 앞. 그녀가 우울할 때면 자주 나와서 뛰어내릴지 말지를 고민하던 장소였다.

“하아….”

발터의 영혼이 사라진 곳은 바로, 그가 그녀와 재회했던 시대의 한국이었다. 낯선 모습의 그가 화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흙먼지가 묻은 부츠가 아니라 윤이 나게 잘 닦인 구두. 피에 젖어 찢긴 옷이 아니라 주름 한 점 없는 흰 셔츠. 아무리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는 그녀가 찾던 단 한 사람이었다. 꿈에도 찾아와 주지 않던 야속한 남자였다.

“…이봐요.”

커다란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팔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나라 사람 아니죠? 혹시 한국말 할 줄 알아요?”

“발터….”

그녀가 떨어지려는 그의 팔을 꽉 붙잡자 발터가 눈썹을 미간에 모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정신이 좀 이상한 건가?”

“너, 너…. 아까 왜… 자살하려고 했어?”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그를 더욱 꽉 붙든 채 물었다. 발터는 그녀의 손을 떨치지도 못한 채 더욱 난처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까, 저기 아래 내려다보고 있었잖아. 뛰어내리려고 했었잖아!! 심각한 표정 짓고 있었잖아!!! 나는 네 표정을 안단 말이야.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에데르트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마침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여자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 진지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며칠 전에 여기서 진짜 뛰어내리려던 여자애가 생각이 나서 와 본 것뿐입니다.”

“…뭐?”

“신발까지 벗는 걸 보고 놀라서 신고하려고 했는데…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다시 내려가더군요. 왜 마지막에 맘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란 눈물이 다시 흘러나와 자그마한 턱 아래로 떨어졌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비집었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어서 그랬어.”

“뭐?”

남자가 그녀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에데르트가 벌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신발을… 짝짝이로… 흐윽…. 신어서… 못 죽었다고.”

그날이었다. 그녀가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생일날. 이 세계에서 사라졌던 그날.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발터는 이 세계에서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에데르트가 얼굴에 손을 묻고 오열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기.”

울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아 들었다. 낯선 이름. 낯선 직위.

“내 연락처입니다. 혹시 나중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해요.”

“여기가… 뭐 하는 데인데?”

“내가 운영하는 사설 경호 업체입니다만.”

“하하하….”

벌겋게 부은 그녀의 입술에서 울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이 터졌다. 에데르트가 뜨끈한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웃깁니까?”

남자가 조금 기분이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들고 자랑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만한 삶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사람을 지켰어?”

울음 같은 웃음을 지으며 묻는 여자를 보는데 남자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어 목 끝으로 치닫는 느낌.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들이 내 고객입니다.”

“그래. 넌 잘했을 거야.”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그런 말을 하지?”

남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있는 집에서 태어나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오지 여행도 해 보았고 산을 타다 죽을 뻔도 했다. 편한 인생을 놔두고 모험을 이어 나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마치, 바다에 떠다니는 부표처럼 정처 없는 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하면 더더욱 이해를 못 하겠지.

“대답해요. 당신 나 알아?”

“네가 사람 지키는 일에 진심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지.”

이상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보며 웃었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슬픔이 쌓인 눈을 보자 이번에는 속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 심장이 격하게 진동하는 소리가 귓가에 몰아쳤다.

왜 그런 얼굴로 날 바라보지…?

울음이 가득한 눈으로 애써 웃는 여자를 바라보는데 남자의 입 안이 버석거리며 말라붙었다. 그 어떤 비싼 고객을 보호하면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강력한 보호 본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행이다. 잘 살고 있어서.”

그녀가 손으로 벌건 눈을 훔치며 다시 웃었다.

“정말… 다행이야….”

입술을 질끈 깨문 여자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봐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 당장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붙들어 눈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겁니까?”

묵묵부답. 그를 외면하듯 땅만 바라보는 여자를 보는데 손가락 끄트머리가 저릿했다. 심장이 손끝으로 이동하기라도 한 듯 손이 멋대로 떨린다.

“난 갑니다.”

협박조로 내뱉는 스스로가 우습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짤막한 단발머리가 바람에 날려 눈물 젖은 뺨에 붙었다.

남자가 굳은살이 밴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이를 악물었다. 처음 본 미친 여자를 끌어안고 젖은 얼굴에 입맞춤을 퍼붓고, 그녀의 날숨을 모조리 흡입하며 혀를 비비고 싶다는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젠장. 욕구 불만인가? 단순한 욕구불만이라기엔 너무나 구체적인 상상이었다.

“더 이상 같이 있다간 정신 병원에 신고할 것 같아.”

마지막 말을 간신히 토해 낸 후, 그가 몸을 휙 돌려 거침없이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데르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을 마침내 떨구었다.

발터의 영혼을 찾아 헤매면서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그가 그녀를 잊고 잘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그를 굳이 불러들여서 좋을 게 있을까…?

사랑한다는 명제로 발터가 인내해야 했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함께했던 그 모든 기억을 상기시켜서 그가 과연 행복할까? 그의 인생에 있어서 나는 그저, 그를 괴롭고 슬프게만 만드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철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잘된 거야.

마지막으로 발터와 눈을 마주 보았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그에게 매달릴 것 같아 애써 시선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에데르트는 축축해진 양손으로 난간을 꽉 쥐었다. 매번 이렇게 발터를 찾아 여행했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결국 아무도 찾지 못한 채 아메티스로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그 세계에서 목숨을 던져야 했다. 그것이 돌아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강물이 초여름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이전에는 도저히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곳.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두려웠지만 이전과는 이유가 달랐다.

이제 그녀는 돌아가면 영원히 발터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로 젖은 얼굴은 엉망이었고 입술에서는 연신 억눌린 울음만이 흘러나왔다.

안녕. 발터.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날렸을 때였다.

턱.

그녀의 팔목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이를 꽉 문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달린 그의 잇새에서 헐떡이는 숨이 연신 흘러나왔다.

“발터…?”

땀방울이 맺힌 남자의 관자놀이에 푸른 혈관이 곤두섰다. 양팔로만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차마 말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자일룬으로 가던 도중 절벽에서 함께 떨어졌을 때. 그 끝이 어떠했더라. 이러다가 그를 또 한 번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졌다.

“괜찮…. 괜찮아…! 그냥 놔…!”

그녀가 외치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마지막 힘을 쓰더니, 결국 그녀의 몸이 붕 뜨듯 위로 잡아 끌어당겨졌다.

“하아…. 너 왜 이래 진짜!!!”

발터가 그녀를 난간과 자신 사이에 가둔 채 포효하듯 거칠게 소리를 쳤다. 눈앞에서 사람 죽는 걸 목격할 뻔했다는 충격 탓이 아니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친 여자를 마주하는데 심장이 아까보다 더한 속도로 터질 듯 격하게 뛰었다.

“왜 내 눈앞에서 이래! 왜!!!”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으며 화를 냈다. 그녀가 젖은 눈으로 그를 보며 속삭이듯 내뱉었다.

“미안해…. 발터….”

황혼 녘의 밤하늘 같기도 하고, 새벽빛이 깃든 아침 하늘 같기도 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저를 부르는 낯선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사무치게 반응한다.

젠장. 젠장…!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마치 껴안듯 등을 꽉 붙들었다. 정신이 나간 거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껏 삶에서 그 무엇도 두려웠던 적이 없는데 지금은 이 여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죽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그녀의 뒤통수를 꽉 움켜쥔 후 떨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날 용서하지 마. 발터.”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시선을 박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스라한 죄책감이 번졌다. 남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살렸는데!! 내가 널 어떻게 살려놨는데…!”

“응. 역시 나는 널 포기할 수 없어.”

네가 내게 그러하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그러하듯이.

에데르트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는 발터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얼어붙었다.

주르륵. 에데르트의 속눈썹에서 무거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괴로운 눈동자에 혼란한 균열이 퍼지는 속도보다 그의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남자는 꽉 막혔던 숨을 내쉬며, 난생처음 보는 여자와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서러운 눈물이 묻은 입술이 몇 번이나 포개지며 문질러졌다. 갈급한 광인처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겨우 만난 행자처럼 그는 그녀를 들이마시고 탐했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원인 모를 슬픔이 온몸을 지배한다.

이 여자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 공허함에 차 있던 그의 인생 최초로, 남자는 그녀에게 모든 걸 다 바치고 싶다는 열정을 느꼈다. 이런 기분을 분명 언젠가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괴로운 사랑이지만 그걸 놓는 것이 더욱 괴로웠던 순간이.

“사랑해, 발터.”

“…이든?”

발터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중얼거렸다. 물밀 듯 밀려오는 기억의 홍수에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사랑해. 사랑해 발터.

그의 시체를 붙잡고 절규하던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나는 네가 포기가 안 돼, 발터.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했던 건, 그가 그녀의 인생에서 제 몫을 다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하는 사랑의 끝에 그녀가 불행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보가….”

결국 너는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발터가 그녀를 보며 젖은 눈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내가 너를 잊고 살 수 있었을까. 메마르고 건조한 삶.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내기할까?”

에데르트가 숨을 들이마시며 환히 웃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날리며 눈물 젖은 뺨에 붙었다. 남자의 손이 저절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둘 사이에 미풍이 불었다. 오래전, 토끼풀이 가득한 언덕에서 함께 맞았던 바람의 온도였다.

“얼마든지.”

그의 어깨를 짚고 가볍게 몸을 날리는 그녀를 보며, 발터 역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두려워?’

‘아니. 기대돼.’

발터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녀를 제 몸으로 감싸 안았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고통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공중에서 뜨겁게 안겨 한데 붙은 남녀의 모습이 거친 파열음을 내며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영화… 촬영인가…?”

“그런 것 같아. 얼른 가자.”

빵빵. 경적 소리에 속도를 늦추던 차가 다시 움직였다.

햇살이 강물에 부서지며 쏟아지는 초여름 한낮의 오후. 강물에는 자그마한 파동이 일었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폐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지금쯤 아메티스의 이곳저곳에는 보랏빛 클레마티스가 한창이겠군요. 폐하의 눈동자를 닮은 색의 꽃들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참 이상하죠.

그곳에 있을 때는 그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가끔 생각나며 그리워진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움이란 마법으로 수련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때론 분노나 슬픔보다도 강력한 감정의 형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데르트.

그대가 어렸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아. 오해는 마시길. 폐하의 마음을 또 흔들 생각은 아닙니다. 물론 폐하가 흔들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폐하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7년에 걸친 마력 결계 작업 끝에, 클라겐타비스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보고를 정식으로 드립니다. 이제 이 땅에 마법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북부에서 마물이 깨어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이였던 그대는 정이 참 많은 아이였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꿈꾸었지요.

몇 해 전 저는 폐하께 감히 언질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때 폐하께서 웃으며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모두가 행복을 꿈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죠. 폐하의 소망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걸 볼 때마다 일전에 그대를 비웃었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그와 별개로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북부는 마법 학교의 기숙사 증축이 한창입니다. 로즈와 타우는 꽤 실력 있는 교육자가 되어 제 몫을 다해 주고 있고, 반짝거리는 재능을 발휘하는 어린 마법사들도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다 수장인 제가 잘해서 그런 거라고 말씀드린다면 폐하께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합니다.

보고 싶군요.

제 자랑만 늘어놓으려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닙니다. 아메티스에서 온 관료를 통해 들었습니다. 폐하의 연인이 긴 잠에서 깨어나 황성이 축제 분위기라고요. 결국 그를 찾는 데 성공하셨군요. 시간이 더 늦어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홀로 섧게 우시는 일은 없겠지요. 잘된 일입니다.

한때 저는 사랑하는 이를 죽을 만큼 원하였습니다. 한때는 나를 보지 않는 그 사람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요.

사랑하는 이가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건 마지막에 곁에 남는 이가 제가 된다면 실패는 없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어리석었지요. 제가 사랑한 건 반짝거리며 환하게 웃는 상대였는데, 저는 그 반짝임을 제 손으로 직접 꺼트리려고 한 것입니다.

반딧불이를 손에 쥐어서는 안 된다고, 꽃은 꺾는 것보다 그 자리에 두는 게 더욱 아름답다고 폐하께 타일렀던 저는 결국, 스스로를 되돌아보지도 못했던 자만한 마법사일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새벽입니다. 자카리가 잠들어 있는 창 너머로 별이 가득히 보이는군요.

폐하께 편지를 쓰며 바라보는 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 반짝임을 지켜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 별이 빛을 잃는다면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플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 역시 행복일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그대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부디 행복하여 그 빛으로 나를 살아가게 하시길.

에데르트가 편지를 다 읽자 양피지 귀퉁이에 불빛이 붙었다. 타들어 간 편지는 반짝거리는 금가루가 되어 허공에 떠올라 빛났다. 그녀는 베네딕트의 마지막 선물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디어 에데르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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