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안 돼. 정신 잃지 마. 눈 감지 마! 내가 너한테 말해 줄 게 아직 많아…. 너 아직 기억 못 하잖아. 우리가 어땠는지, 네가 날 위해 무슨 일들을 했는지, 이번엔 내가 말해 줄게.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나 봐, 나 보라고 이 바보야!!”
타 버린 장작 같은 손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에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죽었습니다.”
에데르트가 젖은 얼굴로 베네딕트를 바라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폐하.”
“아니잖아요, 거짓말하지 마!! 나 이제 안 속아!!”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광인처럼 악을 썼다.
“당신이 살릴 수 있잖아.”
베네딕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그의 답을 직감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늘 서려 있던 여유가 없었다.
아니잖아.
“사… 살려 주세요.”
그녀가 무릎을 꿇고 그의 발치에 매달렸다.
“살려 주세요. 제발…. 교황님, 제발 발터 좀 살려 주세요…. 다 할게요.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할게요. 응?”
“폐하.”
“발터가 없으면 난 안 돼요…. 아아…. 난…. 난…! 흐으윽!”
에데르트가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터뜨렸다. 베네딕트가 몸을 숙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발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이렇게 죽으면… 너무… 불쌍하잖아. 그에게 너무 심하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너무 가혹하잖아!!!”
그녀의 목이 엉망으로 쉬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그녀가 베네딕트의 얼굴을 더듬더듬 감싸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두서없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베네딕트,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까…!”
“에데르트.”
그녀가 그를 향해 숨을 꺽꺽 몰아쉬었다.
“당신 마법사잖아…. 흑…. 사랑하면 힘이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발터를 좀 살려줘, 흑, 흐으윽…. 뭐든 다 할게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할 테니까…. 제발…. 아아…. 제발…!”
세상을 잃은 자의 슬픔이 처절한 울음이 되어 까만 밤의 성을 흔들었다. 에데르트는 발터의 시체 앞에서 무너져 포효하듯 울었다.
***
그날은 축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아메티스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랐어요. 황금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성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거든요. 우리 가족은 한 번도 성에 가본 적이 없지만 매년 이곳에 와서 축제를 즐기곤 했습니다. 아, 로렌스네 가족도 캐롤네 가족도 마찬가지로요.
정오까지는 환하던 하늘이 꾸물꾸물한 회색으로 바뀌었고 성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실망한 건 당연했어요. 기억에 비춰봤을 때 이런 날씨에는 불꽃놀이도 꽝이었거든요.
추위에 손을 호호 불며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놀랄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거예요. 네! 동화책에서만 읽었던 그 눈이요!
사실 저는 눈을 처음 보아서 그게 눈인지도 몰랐답니다. 처음에는 작은 소금 알갱이 같던 눈이 점점 굵어졌어요. 마침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순간, 멀리 비죽 솟아 있던 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달이 걸릴 때면 무섭고 음침하게 보이던 교황청이었어요.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어요. 엄마는 저를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인지 무섭지가 않았어요. 곧 밤하늘이 어두워졌고, 새까만 밤하늘에 아름다운 불꽃이 뒤덮었기 때문이에요.
율리시스 나비처럼 새파란 색의 불꽃이었어요. 그것은 이제껏 보았던 불꽃놀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길고 아름다운 불꽃이었습니다. 불꽃은 나무가 되고, 예쁜 사과 열매가 되었다가 꽃송이가 되고, 나비와 새가 되어 하늘을 수놓았습니다. 휘둥그레진 로렌스의 푸른 눈에도, 주근깨가 예쁜 캐롤의 초록빛 눈에도 불꽃이 반짝였어요. 아마 제 까만 눈동자 안에도 그러했겠지요.
영원히 잊지 못할,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어른들은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어요. 다만 몇 해 전 감쪽같이 사라져서 모두를 걱정시켰던 내 친구가 돌아왔고, 꼬마 마법사들과 늦게까지 거리에서 함께 놀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지 못하였던 할머니가 황성에 새로 생긴 병원에 갈 수 있어 병세가 호전된 것이 무척이나 기뻤을 뿐이에요.
아마도 그날, 그 언덕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걸요.
***
서기관의 기록
클라웨 9세의 폭정으로 제국의 민심이 어지러워진 가운데, 제1 황녀 에데르트 아이나 클라웨가 겨울제를 기점으로 혁명을 일으킨다. 원로원은 새로 황위에 오른 그녀에게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제국은 정복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제위에 오른 그녀는 교황청에서 일어난 마력 실험과 인신매매를 통해 벌어진 아이들의 연관성을 조사하여 밝혀낸 후, 관련인들을 모두 처형한다.
사비오족은 대마법사를 따라 북부로 대거 이주하였고, 전대 교황이자 대마법사인 베네딕트 블라이는 그곳에서 마법 학교를 설립한다.
제국력 186년. 클라웨 10세 재위 7년 차, 북부의 마물은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클라웨는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
제국력 186년 겨울, 아메티스
노크 소리가 다급했다.
“들어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황제의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성큼성큼 들어오는 키 큰 남자의 발걸음이 과격했다.
“폐하.”
“어, 왔어? 일단 차 한 잔….”
“저를 과로사시키려고 작정을 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슈네 경은 아주 오래오래 사셔서 저를 도와주셔야 하는걸요.”
에데르트가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온화한 미소를 짓자 세드릭이 질색을 했다.
“그렇게 가증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쓰셔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경에게 미안한 건 진심인걸?”
“폐하는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만.”
“아, 알았어. 안 어울리는 짓 그만할 테니까 이번에도 한 번 눈 딱 감고 고생해 줘, 세드릭.”
그녀는 황위에 오르고 나서 해가 갈수록 얼굴이 더욱 두꺼워지는 것 같았다. 에데르트가 깃털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방정맞게 까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일라가 날 원망하겠지? 저번에 입궁했을 때 남부로 휴가 간다고 엄청 들떠 있었는데.”
“그걸 말이라고…!”
세드릭이 지위도 잊은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길고 달콤한 휴가를 보낼 생각으로 지난 몇 달간 철야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휴가를 반납하라니.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이건 직권 남용이지 않은가.
“그럼 어떡해. 레나랑 얀은 지금 해안 지대로 파견 갔잖아.”
“토비아스가 있지 않습니까? 조세핀의 병가도 곧 끝나는 걸로 알고 있고요.”
에데르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도 둘 중 하나 부르려고 했지. 그런데 방금 토비아스가 와서 폭탄 던지고 갔어. 나도 당황스럽다고.”
세드릭의 얼굴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토비아스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에데르트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한쪽 손을 입에 대고 속닥거렸다.
“글쎄 조세핀이 임신했다지 뭐야. 몸이 안 좋았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대.”
“뭐라고?”
세드릭이 잿빛 눈을 부라리자 에데르트가 의자를 쭉 앞으로 당긴 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가을에 조세핀이 부대원들 끌고 산악 훈련 갔을 때 있지? 토비아스가 갑자기 따라간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캠핑 중에 결국 눈 맞은 듯해. 뭐, 하긴….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조세핀이 다른 남자 사귀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 보면서 토비아스도 느낀 바가 많았을 거야. 내가 그런 거 많이 봐서 잘 알아. 막 나만 좋아해 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다가 갑자기 다른 남자 만나면 억울하고 열 받고 그런 거. 그러니까 어장 관리를 작작 했어야지….”
마치 자신이 연애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기 시작한 황제를 향해 세드릭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지를 짚었다.
“어장이고 나발이고 둘은 아직 결혼도 안 한 사이지 않습니까. 아니 결혼은커녕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하여간 고지식해서는. 차라리 잘됐어. 둘이 연애할 듯 말 듯 서로 간 보면서 주위 사람 열통 터지게 만든 게 벌써 몇 년째냐고. 뭐, 요즘은 애가 혼수란 말도 있고.”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세드릭이 기가 찬 표정을 짓자 그녀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암튼 토비아스는 지금부터 결혼 준비로 바쁠 예정이라고 휴가 쓴대. 말로는 정말 당황스럽다고 하는데 입은 귀까지 찢어졌더라? 그런 애를 붙잡고 어떻게 나 대신 보름 동안 고생 좀 해 달라고 해?”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세드릭을 보며 에데르트가 설득을 이어나갔다.
“임신했을 때 얼마나 남편의 내조가 중요한지는 슈네 경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 이미 세 번이나 겪었으니까. 안 그래?”
일부러 ‘세 번’을 강조한 걸 알아들었는지, 세드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겪을 생각입니다만.”
“미쳤어, 진짜!”
이번에는 에데르트가 펄쩍 뛰며 그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변태인 줄은 알았지만 짐승이었냐? 아일라 고생하는 거 생각 안 해?”
“그녀가 아이를 좋아합니다.”
세드릭이 목덜미를 붉혔다.
“뭐?”
“집안이 시끌시끌한 게 좋다고 하니…. 남편으로서도… 딱히… 부인의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는 걸 보며 에데르트가 민망해 입맛을 다셨다. 뭐.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부부 금슬이 너무 좋아 죽겠다는데, 그녀가 막을 이유는 없으니까.
“아아. 외롭다. 외로워.”
에데르트의 입에서 저절로 한탄이 튀어나오자 세드릭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녀가 딱히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든.”
“응?”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에 에데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세드릭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뗐다.
“내가 아일라와 이야기를 해 봤는데 계속 네가 이렇게 혼자서 지내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왜 혼자야? 아들도 있고 애 아버지도 있고 발터도 있는데.”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꾸하자 세드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발터 깨면 싹 다 고자질할 거야. 걘 아마 널 죽이려고 들걸?”
의식이 없는 상태로 수년째 누워 있는 발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투는, 마치 그가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 때마다 세드릭은 오히려 미안해져 할 말이 없었다.
“암튼 오랜만에 아이 만나러 간다는데, 이렇게 빡빡하게 굴 거냐고.”
에데르트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세드릭은 결국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7년 전, 새파란 눈동자가 아름다운 남자아이를 낳았다. 자카리라 직접 이름 붙인 아기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무렵 대마법사의 품에 안겨 북부로 떠났다. 마수가 점령하던 북부는 대마법사인 베네딕트가 평정한 이후, 뛰어난 마법사들의 양성소가 된 지 오래였다.
“날씨가 추우니 단단히 채비하고 가십시오. 아일라에게도 일러두겠습니다.”
“육아하느라 바쁜데 번거롭게 입궁 안 해도 된다고 해.”
세드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도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녀가 나중에 알면 마음 불편해할 게 뻔하니까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아직도 익숙해하지 않는 아일라는 가끔 깊은 밤이면, 세드릭의 품에 안겨 조심스레 말을 꺼내곤 했다. 이 행복을 만들어 준 이든에게 평생 고마워하며 살 것 같다고.
“누가 애처가 아니랄까 봐. 아일라 이야기만 해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네.”
에데르트가 피식 웃으며 만족스러운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그녀의 눈에 스쳐 가는 외로움을 다시금 보았다.
“세르노티에서는 연락 없지?”
그녀가 서류철을 다시 뒤적이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세드릭이 한숨을 삼켰다.
“폐하….”
“없다고? 알았어. 그만 나가 봐. 나 밥 먹어야 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세드릭이 뭐라고 말을 떼려 하기가 무섭게 에데르트가 손사래를 쳤다.
“안녕히 가세요.”
그는 조금 망설이다 문 앞에 멈춰 섰다.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그가, 그녀가 달에도 몇 번씩 세르노티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숨만 붙어 있는 시체에 불과한 발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것이다.
그를 아메티스가 아닌 세르노티에 데려다 놓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가장 행복한 기억이 있는 곳에서 그가 깨어나길 바란다며 웃었던 그녀의 표정을 세드릭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벌써 7년입니다. 폐하.”
에데르트가 펜 끝을 물고 있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그렇게 됐나?”
벌써 일곱 번째 돌아온 겨울.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하,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몰랐네.”
그녀의 말은 진실이기도 했고 거짓말이기도 했다. 발터가 없는 하루는 너무 긴데, 정신을 차려보면 계절이 바뀌어 있다.
발터.
너도 그랬겠지. 나는 이제야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인생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는 건, 너의 그 짙은 눈동자를 단 한 번만 더 보고 싶기 때문이야. 딱 한 번만. 삶에서 단 한 번만 날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는 네 눈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발터도 폐하가 이렇게 사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것….”
“그만. 거기까지.”
에데르트가 손뼉을 한 번 짝 소리 나게 부딪혔다. 친우이자 조카인 발터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세드릭의 심정이 어떨지는 그녀가 잘 알고 있다. 길게 한숨을 쉬는 세드릭을 보며 그녀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세드릭.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뭡니까?”
“나 없을 때 발터가 혹시 깨어나더라도… 절대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내가 다 말해 줄 거란 말이야.”
희망.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는 한 줄기 희망 때문에 어쩌면 발터 역시, 생의 마지막 끈을 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뭘 말씀이십니까. 폐하가 잠든 발터에게 몰래 입맞춤한다는 것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발터에게 여자 옷을 입히고 혼자 키득거렸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까?”
그것뿐일까. 그의 앞에서 울다가 탈수로 쓰러져 세르노티 탑을 지키는 시종들이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그의 생일에는 세르노티의 기사들을 궁으로 모조리 불러 모아 함께 옛 추억을 신나게 떠들다가, 모두가 떠난 후엔 침실에서 무릎에 얼굴을 박고 소리 없이 오열한다는 사실도 모조리 세드릭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특히 드레스 입힌 건 절대 말하면 안 된다. 발터 성격 알지? 내가 여장시킨 걸 알면 충격 먹고 다시 쓰러질 수도 있다고.”
착잡한 세드릭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데르트는 그저 꿈꾸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발터가 깨어나면 해 줄 말이 너무 많은데.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말해 주려면 한 달도 부족할 거야. 그때 나 휴가 좀 길게 써도 되지?”
“…물론입니다. 폐하.”
세드릭은 진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
탕!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으으…. 추워….”
베네딕트는 두꺼운 망토를 걸친 채 오들오들 떨면서 나타난 에데르트를 보며 그림처럼 웃었다.
“이리 오십시오.”
“못 가요. 발 얼어서 한 발자국도 못 가겠어.”
소리도 없이 다가온 베네딕트가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스르륵. 기다란 은발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폭신한 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온기가 퍼졌다.
“어떻게 여긴 매번 와도 이렇게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워요?”
코를 훌쩍이는 그녀를 향해 베네딕트가 속삭였다.
“다행이군요.”
“추워 죽겠다니까 뭐가 다행이란 거야.”
“그때마다 폐하를 이리 제 품 안에서 녹여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어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이렇게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지 놀랄 정도였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베네딕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뚫어져라 보지 마십시오. 자제할 수 없어지니까.”
“얼레리 꼴레리.”
순간, 에데르트가 고개를 휙 돌렸다. 보드라운 은발의 바가지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물빛 눈동자를 빛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자카리.”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허락도 없이 이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였을 텐데.”
베네딕트가 조금 차가워진 목소리로 나무라자 자카리가 눈을 깜빡이며 당돌하게 대꾸했다.
“보고 싶을 땐 언제든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한 건 아버지십니다.”
베네딕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닮아서 그리 말대답을 잘하느냐?”
“아시면서 왜 굳이 질문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제가 꼭 대마법사님을 작게 줄여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또박또박 내뱉는 아이를 보며 에데르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리 오렴. 아가.”
“히히히.”
와다다 달려오며 아이가 그녀에게 안겼다. 에데르트가 아이에게 눈을 맞추며 발을 흔들흔들 움직였다.
“자카리. 왜 이렇게 많이 컸어?”
“저번에 폐하를 보았을 때보다 요만큼밖에 안 컸는걸요.”
아이가 손바닥을 야무지게 펴 보였다. 에데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너무 빨리 크면 엄마가 섭섭해서 그렇지. 넌 지금이 딱 귀엽단 말이야.”
“괜찮습니다. 저는 다 커도 귀여울 거니까요. 아. 제 꿈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마법사가 되는 것입니다.”
“너는 꿈이 매일 바뀌는구나. 열흘 전엔 세상에서 가장 큰 코끼리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베네딕트의 날카로운 지적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개만 돌려 찌릿, 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책장에 꽂혀 있던 두꺼운 마법 서적들이 우르르 빠지더니 공중에 두둥, 떠올라 그들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깜짝이야….”
에데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정말 마법사를 낳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이럴 때였다.
“이제 이렇게 무거운 것도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야? 저번에는 펜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했잖아.”
“그건 제가 고작 다섯 살 때 일이고요.”
이제 고작 여섯 살인 아이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며 웃고 있는데 책들을 뚫고 베네딕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폐하. 자카리가 흥분해서 이것저것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벌로 오늘은 본인이 여기 꺼내 놓은 마법 서적을 모두 다 외우는 숙제를 내릴까 합니다만.”
히익, 하며 놀라 그녀의 뒤로 숨는 아이를 감싸 안으며 에데르트가 웃음을 감추었다.
“자카리. 배고프지 않니? 아버지랑 셋이서 오래간만에 같이 식사하자.”
“네!”
“일단 책 정리부터 하고. 알았지?”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공중에 있는 책이 하나둘씩 저절로 움직여 차례로 책장에 꽂혔다.
“아이쿠.”
책이 거꾸로 꽂히자 아이가 달려가 깡총거렸다. 베네딕트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자카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을 다시 똑바로 정리했다.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의 뒤통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베네딕트의 모습을 보며 그녀 역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
식사를 마친 후, 에데르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음 결정이 반짝이며 밤하늘의 별빛을 그대로 비춰내는 모습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황량하던 북부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든 것은 베네딕트였다. 그를 따라 이주한 마법사 일족과 아이들 역시 지금쯤 얼음집에서 행복을 말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의 온도는 알맞게 따뜻하였습니까?”
“엄청 좋았어요.”
“다행이군요, 차를 드시지요.”
베데딕트가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자 에데르트가 짐짓 수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상한 것 넣은 거 아니죠?”
“넣는다면 무엇을?”
“막 몸이 뜨겁고 후끈거리게 만들어 주는 거라든가….”
“혹시 그렇게 되길 원하는 겁니까?”
베네딕트가 얼굴을 쑥 들이밀며 옅게 미소 짓자 그녀의 가슴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그의 아름다움에 매번 감탄하는 것은 당연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는 늘 준비되어 있으니.”
차분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에데르트는 흠, 하며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에요.”
에데르트가 딱 잘라 말하자 베네딕트가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쉽군요.”
“…아버지.”
어느새 침실 안에 들어온 자카리가 졸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베네딕트가 눈을 찌푸리자 아이가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잠이 안 와요.”
“넌 매우 잠이 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히잉.”
에데르트가 실망하는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었다.
“같이 자고 싶어서 왔어? 그러자.”
“폐하가 오면 이때다 싶어서 어리광을 부립니다. 받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리광 좀 부리면 어때요.”
베네딕트의 침대 옆에는 딱 봐도 자카리의 것인 자그마한 침대가 따로 있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알고 준비해 놓았으면서 괜히 퉁명스레 내뱉는 베네딕트를 보니, 에데르트는 웃음만 나왔다. 침대에 얌전히 누운 자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연한 하늘색 눈을 끔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폐하.”
“응?”
“아버지가 아까 마법 쓴 거 알고 계시지요?”
“무슨?”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빛나는 마법이랑… 얼굴 환하게 하는 마법이랑… 또 심장 빨리 뛰게 하는 마법…. 흐아암….”
“졸리면 자거라.”
곁으로 다가온 베네딕트가 그의 이마를 한번 부드럽게 쓸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곤히 잠에 빠진 자카리를 두고 에데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을 흘겼다.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아셨어도 모른 척해 주십시오.”
“왜요.”
“폐하의 앞에서는 늘 부족함이 없이 보이고 싶으니까요.”
에데르트가 그와 마주 앉아 따끈한 차를 홀짝이며 웃었다.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꼭 이혼한 부부 같지 않아요?”
“죄송한데 저희는 결혼한 적도 없습니다만.”
“…결혼 안 해서 서운해요?”
“대마법사는 독신인 편인 더 매력적입니다.”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곁에서 베네딕트 역시 찻잔을 들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난 7년 동안 그들은 더욱 친밀해졌다. 힘든 일을 함께 겪어 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둘 사이엔 분명히 존재했다. 그녀는 그 친밀한 감정을 딱히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는 날까지 서로를 떠올릴 때면 둘 다 비슷한 표정을 지을 것 같다는 것뿐.
“자카리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네요.”
“아마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제는 더 할 겁니다. 곧 있으면 제가 가르칠 게 없을 거고요.”
차가운 호수 같은 베네딕트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애정이 뚝뚝 넘쳐흘렀다.
“와. 자식자랑 팔불출.”
“그 대단한 아이는 폐하의 아이기도 합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베네딕트와 잠든 자카리를 차례로 보며 에데르트가 중얼거렸다.
“자카리는 그때 왜 발터를 살려 준 걸까요.”
새까맣게 타들어 간 발터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던 그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발터의 몸을 휘감았던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아득해졌다.
그날, 발터를 살린 것은 바로 그녀의 배 속에 있던 아이였다.
“그때 자카리는 폐하의 감정을 모조리 흡수했을 테니까요. 폐하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식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막고 싶었을 테죠.”
에데르트는 자그마한 침대에서 입을 헤 벌린 채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는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었을 겁니다.”
아메티스의 밤하늘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불꽃이 떠올랐다. 꽃송이. 나무. 나비. 새. 구름. 세상의 예쁜 것들을 모두 보여 주는 것 같던 불꽃놀이를 떠올리자 에데르트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께선 자카리가 저와 판박이라고 하시지만, 제 눈에는 그가 어린 시절의 폐하로 보입니다. 자카리는… 폐하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지를 고스란히 느꼈을 테고, 폐하의 행복을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 덕에 잠재된 마력이 폭발하듯 터졌던 것이겠지요.”
발터의 숨이 기적적으로 다시 이어지던 순간. 그녀의 손길이 더듬는 자취를 따라 새까맣게 타들어 간 그의 육신이 제 모습을 되찾았던 순간을 상기하자 결국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데르트는 서둘러 손등으로 뜨끈한 눈매를 훔쳐냈다.
달칵.
그런 그녀를 모른 체해 주며 베네딕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년 여름에는 자카리를 아메티스로 잠시 보낼까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저야 좋죠. 그런데 갑자기 왜요?”
에데르트가 아직도 눈에 눈물을 단 채로 반색을 했다. 그녀는 내심 베네딕트가 그 말을 먼저 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카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아이가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그다음 문제다.
“자카리 역시 세계가 넓다는 걸 알 때도 되었으니까요. 외골수로 제 힘만 믿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대답하는 베네딕트를 향해 에데르트가 신나는 얼굴을 했다.
“마침 잘됐어요. 베르나도 성에서 친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베르나라면….”
에데르트가 후룩, 하고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지금 머리가 이렇게 고불고불해 가지고 딱 양옆으로 빨간 리본 해서 묶었거든요? 완전 인형이야, 인형.”
크리스티앙이 죽은 후 황후는 에데르트의 보호 아래 안전한 곳에서 딸아이를 출산했다. 자카리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아기, 베르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격은 여전합니까?”
“그 나이답지 않게 너무 어른스러워서 탈이죠. 가끔은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에데르트가 조숙한 베르나를 떠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베네딕트는 그녀가 베르나를 후계자로 낙점 지었다는 사실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아이가 있는 것도 몰랐느냐며 그를 비웃었던 크리스티앙이 자신과 똑같이 닮은 딸의 존재를 끝까지 모르고 죽었다는 것은 비극일까, 아니면 희극일까.
“폐하.”
“응?”
차기 황위 계승자를 베르나로 생각하는 그녀에게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아들인 자카리에게 무거운 짐을 씌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늘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으로 그를 놀랍게 하는 그녀가 새삼 사랑스럽게 보였다. 베르나를 건강하게 잘 기르는 것은 그녀가 직접 죽인 크리스티앙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 것이다.
“뭐요.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아닙니다.”
“나이 들더니 싱거워졌어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묻는 그녀를 보며 그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귀밑으로 짤막하게 자른 머리칼이 뺨을 스쳤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시간은 발터가 잠든 그때에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 괜찮은 거예요?”
에데르트가 그를 향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베네딕트는 북부로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아메티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와 그가 함께하는 계절 역시 줄곧 겨울에 멈춰 있는 것이다.
“이곳이 제집입니다.”
그녀가 그를 응시하며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폐하.”
그의 말에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마치 어릴 때처럼 천진한 미소였다.
“다행이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에데르트는 분기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북부를 방문했다. 베네딕트는 그녀를 즐겁게 기다렸다. 이제 그의 인생에는 또 다른 행복도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자카리를 보면 에데르트와 완벽하게 이어져 있다는 충만함이 밀려드는 것이다.
이전의 그는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의 느낌을 알아 버린 지금은 달랐다. 베네딕트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다.
“이제 그대도 행복하셔야죠.”
“…베네딕트.”
“이제, 가 보시겠습니까?”
에데르트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쥐었다 펴는 움직임에 긴장, 그리고 미약한 흥분이 번졌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