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72)

발터가 짙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폐하는 오수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아름답습니다.”

그녀만이 알아챌 수 있는 그의 은근한 미소.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빗겨 나가는 대답에 탄식과 같은 한숨이 흘렀다. 혜미는 한 손으로 배를 잡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리하였겠지요.”

“하지만 난… 나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잖아.”

네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아니, 이게 용서를 빈다고 해결이 될 문제일까.

“그래서요?”

발터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꽉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것은 그녀를 단단히 붙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암갈색 눈동자.

“그래서 이제는 제가, 폐하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겁니까?”

“…발터.”

“난 상관이 없는데.”

“어떻게 상관이 없어…? 어떻게….”

혜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발터의 마음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혜미는 그의 뜨거운 눈에 집어삼켜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폐하가 누군가의 어미가 되어도, 그 누군가가 또다시 아이를 낳아 폐하를 할머니라 부르는 날이 와도, 제게 폐하는 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단 하나의 상대이니까요.”

“…….”

“폐하와 아이를 반드시 무사히 지켜내겠습니다.”

혜미의 뺨을 타고 기다란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발터는 커다란 나무였다. 어떤 폭풍이 와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그 뿌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단단한 존재. 거친 바람에 가지가 엉망으로 꺾여 버려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푸른 새순을 싹틔워 보이는 강인한 남자였다.

“울지 마십시오. 몸에 좋지 않습니다.”

“…….”

“어서 돌아가십시오. 내일이 깁니다.”

발터가 짙어진 눈으로 그녀를 향해 속삭였을 때였다. 색이 짙은 눈썹이 휘어지며 미간에 모였다. 동물적으로 발달한 청력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알아차린 것이다.

“발터…! 누가 오고 있어!”

레나 역시 눈치를 챈 듯 소리죽여 그들을 향해 속삭였다. 발터가 혜미를 향해 다급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마주했다. 어서 가라고 눈짓하는 순간이었다.

“폐하, 어서 가셔야…!”

“사랑해. 발터….”

혜미의 입에서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도 흔들림 없던 발터의 눈이 어둡게 짙어져 떨렸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창살에 바싹 다가와 붙었다.

뜨거운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고백하는 그녀를 끌어안고 싶지만 쇠사슬로 양손이 묶여 그럴 수가 없다. 결박된 양 팔뚝에 핏줄이 거칠게 불거졌다.

“사랑해….”

혜미가 흐느끼며 다시 한번 되뇌자 발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살에 이마를 짓눌렀다. 혜미가 팔을 뻗어 새까매진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흣…!”

발터는 그녀에게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를 결박해 놓은 쇠사슬 벽에서 흙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입술이 마침내 창살 사이에서 마주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는 그 짧은 키스에 모든 것을 다 걸었다. 버석한 입술 끝에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이 아릿한 느낌. 혜미는 복잡한 미로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아….”

혜미는 발자국 소리가 모퉁이를 돌기 직전, 발터에게서 간신히 얼굴을 떼어냈다.

“누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닐 텐데.”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혜미는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길을 잃었어.”

크리스티앙이 쓰러져 있는 보초병의 시체를 밟고 넘어선 후, 그녀를 보았다.

“그랬군.”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은 태연한 듯 보였으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산책을 하고 싶으면 말을 할 것이지.”

새하얀 낯빛의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난, 또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잖아.”

당장이라도 그녀의 뺨을 후려칠 것처럼 공중에 올라갔던 손이 스륵, 내려와 그녀의 턱을 잡았다.

“불가능한 거, 알지?”

크리스티앙이 서서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기 전, 혜미는 손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멈칫하는 크리스티앙의 몸을 꽉 안은 채,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발터를 보며 말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뿐이야.”

황제는 그녀의 말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혜미는 그를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이제 진짜 안녕이니까. 내일, 너와 나. 결혼할 거잖아.”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말했어?”

“그래. 다 했어.”

“작별 인사가 아니라 고해성사를 하러 온 건가?”

크리스티앙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야기 다 끝났으면 이만 가지.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혜미가 호위병을 밀치고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몸을 돌리려던 크리스티앙이 발터가 갇힌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 섰다.

“기분이 어때?”

쾅!

발터가 몸을 날리며 창살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자 크리스티앙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이제 살기를 숨길 의도조차 없었다.

물어뜯길 것 같은 기분에 크리스티앙은 오래간만에 숨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갇혀 있는 빗장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황제를 보며 발터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 뿐.”

찢어진 이마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려 눈썹과 눈동자를 차례로 적셨지만 발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그가 지금 의연한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목숨을 가지고 위협했던 크리스티앙의 협박이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찌직.

생쥐 한 마리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앙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것들을 싹 죽이고 새로 출발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몸에 강하게 번졌다. 황녀에게 줄 결혼 선물은 그녀가 총애하던 호위 기사의 목으로 하고 싶었는데.

목에 칼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떨지 않을 것 같은 그를 생각하니 짙은 패배감이 올라왔다. 크리스티앙은 숨을 몰아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발터의 말대로 이제 정말 다 끝이니까.

마지막에 웃는 자는 바로 그가 될 것이다.

크리스티앙은 시종과 경비병들을 이끌고 그녀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 냄새와 흙냄새가 차가운 바람에 휘감겼다. 숲 한가운데 있는 호수에서 달빛이 이지러진 채 일렁였다.

“…죽이기라도 하려고 데려온 거야?”

하얀 입김을 뿜으며 혜미가 낮게 묻자 크리스티앙이 피식 웃었다.

“죽을 짓 한 걸 알긴 하나 보군.”

혜미는 황제의 제복을 입고 선 당당한 모습의 크리스티앙을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교황청 지하에서 보았던 끔찍한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생생히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배 속이 뒤틀렸다.

신체가 조각조각 나서 수조에 담긴 그들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망각하려 했던 걸까.

“넌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어쩜 그렇게 잔인해?”

푸른 달빛이 말없이 미소 짓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니. 너도 인간인데… 어떻게 같은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혜미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그저 그에게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속삭이는 혜미를 향해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입을 뗐다.

“내게 실망했나?”

“그 정도라면 차라리 낫겠어.”

“내게 뭘 기대했는데?”

허를 찌르는 질문에 혜미의 말문이 틀어막혔다.

“선함을 기대했나? 내가 성군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실망한 거야?”

“네가… 그 정도로 악마일 줄은 몰랐을 뿐이야.”

“그러니까 거길 왜 가서 혼자 충격을 받아.”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마음뿐이었다.

“출입을 엄금한 데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인데, 무엇 하러 그 더러운 곳에 제 발로 찾아가서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거냐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어, 크리스티앙.”

“보기 좋은 네 두 눈 정도는 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대체 왜 그렇게 만든 거야!”

혜미가 그의 붉은 재킷을 꽉 틀어쥐었다. 경비병들이 움찔했지만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가진 목숨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야. 밑바닥에서 태어난 게 그들의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영광스럽게 희생한 것뿐. 바로 너와 나 같은 고귀한 이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혜미의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끔찍했다.

“희생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발전하겠어.”

그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낸 후,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열어.”

시종장이 다가와 황금으로 각인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놓인 것은 황제의 왕관이었다. 베네딕트의 몸을 수백 번 난도질하여 흘린 피로 만들어 낸 붉은 보석. 마법사의 보석을 받지 못한 크리스티앙이 스스로 만들어 낸 황제의 증표 앞에서 또렷하게 내뱉었다.

“이제 네가 희생할 차례야.”

혜미가 눈썹을 모았다.

“받아들인다면 사비오족의 자유를 약속하지. 더 이상 희생당하는 어린아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게 뭐야.”

“정식으로 청혼하고 있는 거잖아. 우리 사이에는 아무래도 반지보다는 이쪽이니까.”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함께 해가 뜨는 걸 바라보며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맨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제게 돌린 후,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기울였다. 차가운 체온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결혼해. 나와.”

“…….”

“네가 희생해서 나를 한 번 바꿔 봐. 베갯머리 송사를 하든 거짓 아양을 떨든 상관없으니 황제인 나를 뒤에서 네 마음대로 이끌어 보라는 뜻이다.”

“…….”

“모르는 척 이끌려 줄 테니까.”

혜미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늘하다 못해 쌀쌀한 밤공기가 뜨끈한 얼굴을 식히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나, 3년 동안 의식을 잃고 일어나지 못했던 때가 있었어. 세르노티에서 처음 암살 시도를 당했을 때.”

“과거의 일로 여전히 날 원망할 셈인가?”

“아니.”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때 다른 세계를 다녀왔거든. 여기와는 모든 게… 참 많이 다른 세상이었어.”

크리스티앙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을 비웃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혜미의 예상대로였다.

“뭐가 달랐지?”

앞으로 그녀가 하는 말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아둔한 이가 아니었다. 혜미는 그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기를 바랐다.

“…사람들의 목숨값이 같아. 누군가는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질서가 없는 세계이겠구나.”

“폭력을 이용해 억지로 만들어진 질서는 절대 끝이 좋을 수가 없었거든.”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만일 내가 그 세상에서 널 만났더라면 어땠을지를 생각해 봤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서로를 원했겠지.”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을 거라는 걸 깨달았어.”

혜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환상 속에서 튀어나온 듯,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매혹적인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부정하지 마. 넌 이미 내게 끌리고 있잖아. 네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

“그래. 그런 순간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죽도록 힘들게 할 때마다 차라리 다 포기하고 그에게 순응하듯 끌려가면 모든 게 편해지지 않을까, 잠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자 크리스티앙의 얼굴에서 새벽처럼 아스라한 찰나의 미소가 스쳐 갔다. 그 웃음에 담긴 만족을 보며 혜미가 물었다.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그걸 위해 넌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왕관을 준 걸로도 부족한가?”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망설임 없이 되물었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 일인지 그녀 역시 잘 알았다. 제국의 꼭대기에 위치한 황제이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한낱 제가 가진 모든 걸 바쳐 구애하는 남자일 거라는 상징적인 뜻이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재차 물었다.

“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길 바라? 눈물을 흘리며 처절해지길 바라나?”

“크리스티앙.”

그녀의 입에서 크리스티앙의 예상과는 다른 뜻밖의 말이 나왔다.

“너. 나랑 도망가서 살 수 있어?”

그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말 한 필만 가지고 성을 떠나서,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가서, 농사건 사냥이건 해서 그렇게.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도 네 애로 키우면서. 황궁 따위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처럼. 그 누구도 우리의 신분을 짐작하지 못하는 곳에서 평범한 부부를 가장하며 평생을 사는 거야. 증오는 옅어지고, 체념이 결국 사랑으로 바뀌는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어때?”

“…….”

“내 사랑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테니까, 너도 네 사랑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그것은 크리스티앙을 향한 그녀의 마지막 제안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이 혜미에게는 영원처럼 길었다. 두려움, 혹은 기대. 둘 중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두 가지가 다 섞인 복합적인 느낌이었으리라.

“너는 아니라고 했지만….”

침묵하던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입을 뗐다.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네게 또다시 반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어도 너와 내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고, 그가 사랑한 여자 역시 더럽게 고집이 센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는, 그래서 그녀가 좋았는지도 몰랐다.

“나라는 사람은 어디서 태어나건 그 세계의 가장 꼭대기에 있을 거야. 그래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의 선택으로 결국 네가 모든 걸 다 잃어도?”

혜미는 그에게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여자의 곁에서 힘없는 범부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혜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침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티앙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물을 수 있었다. 실망감보다 더 큰 안도감, 그것보다 더 큰 안타까움이 그녀의 속을 뜨끈하게 적셨다.

“청혼의 대답은?”

크리스티앙이 황금 궤짝에서 왕관을 손에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나 역시 거절이야.”

혜미가 그의 손에 들린 왕관을 탁, 쳐냈다. 보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왕관이 풀밭에 나뒹굴자 지켜보던 이들이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며 뜨겁게 입술을 훔치기 전, 크리스티앙이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너와 난, 쉽게 변할 이들이 아니니까.”

이제 아침이 밝아 오면 축제의 시작이었다.

“네가 내게 도망치자고 말할 정도로 진심이라는 것만 받아들이지.”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며 숨을 헐떡였다.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고, 완벽한 나체가 된 그녀를 풀숲에 누이는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혜미는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베어 무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뜨거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크리스티앙.”

“뭐가?”

“끝까지 변하지 않아 주어서.”

크리스티앙이 악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며 잇자국을 냈다.

“나는 말이지. 다수의 일인인 척 숨어 선을 위장하며 악의 책임을 나눠지는 것보다, 차라리 홀로 악인이 되는 편이 덜 역겹다고 생각해.”

새벽이슬이 떨어지는 풀밭. 황제의 옷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시종과 경비병들은 결국 뒤를 돌았다. 황제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누이의 아랫도리를 게걸스레 핥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만 둬 줄게.”

혜미는 그녀의 위에서 뜨겁게 헐떡이는 크리스티앙의 옆에서 나뒹구는 왕관을 바라보았다.

“날 악역으로 만드는 건 너다.”

신음하지 않으려 이를 악무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길게 떨어졌다.

희미하게 동이 트는 새벽,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밤새도록 그녀를 가진 크리스티앙이 마침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몸을 떼어 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

황금성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원형 경기장으로 통하는 통로에 손이 앞으로 묶여 결박된 이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가장 선두에 선 발터는 흥분과 긴장으로 꽉 찬 공기를 감지했다.

“나가시오.”

누군가 그의 등을 쿡, 찔렀다. 발터는 기사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걸어 나왔다.

내딛는 걸음은 신중했고 눈초리는 매서웠다. 황금성에 온 이후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가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위험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크헝!

통로와 경기장을 연결하는 문이 닫히자마자 굶긴 사자가 포효하며 그에게 뛰어들었다. 발터는 손이 묶인 채 바닥을 굴러 간신히 맹수의 발톱을 피했다. 반역의 죄를 뒤집어쓴 이들을 처형하기 전, 귀족들에게 보여 줄 쇼는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오히려 좋다.

“하아….”

흙먼지 바람 속에서 발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이 지켜야 할 상대를 정확히 감지했다. 그녀는 원로원과 귀족들로 꽉 찬 경기장 한가운데, 높다랗게 튀어나온 상석에 앉아 있었다. 황제의 옆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잔뜩 성이 난 맹수가 다시 그를 공격했다.

“흣…!”

옷이 찢긴 자리에 피가 터졌다. 피 냄새를 맡은 육식 동물이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울부짖었다. 살기에 찬 짐승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발터는 벌떡 일어나 중앙으로 달렸다. 그와 동시에 원형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문이 일제히 열리며 다른 맹수들이 뛰어들었다.

경기장 한가운데로 돌진하는 사자들 사이에서, 손이 묶인 발터가 이를 꽉 물었다. 혜미에게 고개를 슬쩍 기대며 크리스티앙이 중얼거렸다.

“저런. 검을 쥐여 주는 걸 깜빡했군.”

혜미는 주먹을 꽉 쥔 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해는 완전히 창공에 떠올라 있었다. 다른 짐승들 사이에서 가장 맹렬히 돌진하는 사자가 입을 떡, 벌리는 순간 이를 질끈 깨문 발터가 위로 뛰어올랐다. 양손이 묶인 채, 제 자리에서 뛰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점프였다.

“저리 발버둥을 쳐봤자 소용없는 것을…!”

그가 맹수의 머리통을 발로 강하게 가격하는 순간, 속삭이던 원로원의 귀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커다란 짐승이 그의 공격에 네 발이 바닥에서 밀릴 정도로 비틀거렸던 것이다.

크허엉!!

경기장의 관중석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의 허리에서 칼 한 자루가 사라진 것은 그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게 울부짖던 맹수 한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칼을 뒤로 돌려 묶인 손의 결박을 단박에 끊어 낸 발터의 움직임은 보는 이의 눈을 믿기 어렵게 할 정도로 신속했다. 사지가 자유로워진 발터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동족의 죽음을 본 맹수들은 더더욱 흥분했다.

땀을 뚝뚝 흘리는 발터에게 달려드는 사자의 배가 갈렸다.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쓴 그의 손이 다시 움직여 다른 놈의 목을 찔렀다.

“꽤 열심히 버티네?”

크리스티앙이 차양 아래에서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경기장에 모래바람을 피우며 쓰러지는 맹수의 사체가 하나둘씩 늘어 갔다. 헉, 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발터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경기장 중앙에 서 있는 그는 하나였고, 그에게 굶주린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의 수는 아직도 너무 많았다.

“애써 봤자 곧 죽을 테지만.”

“그가 지금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

혜미가 작게 중얼거리자 크리스티앙이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곁눈질을 했다. 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고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에서 맹수의 공격을 피해 다시금 바닥을 구르는 발터를 바라보았다. 칼을 놓친 그에게 달려드는 사자의 발톱이 그의 등허리를 거칠게 할퀴었다.

“발터는 지금 시간 끌고 있는 거야.”

“…뭘 위해서?”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번지고 입술이 붉어져 떨렸다. 꽉 마주 잡은 양손에 진땀이 배어났다. 피를 흘리며 일어난 발터가 순식간에 칼을 낚아채고는 아가리를 쩍 벌린 맹수의 급소를 베어 냈다. 그가 피로 어지러워진 시야를 닦을 새도 없이 또다시 공격하는 맹수와 한데 뒹굴었다.

“팔이 물어 뜯겼군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게임이었지 않습니까.”

앞줄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혜미가 흐린 눈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 당신들은 틀렸어.

백 번을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녀에게 심장을 바친다고 고백할 사람. 본인은 불타는 가시밭길을 달려가면서도 그녀의 발에 설사 돌멩이가 채지 않을까 염려할 사람. 그녀를 위해 명예 따위는 기꺼이 버리고 무릎 꿇을 수 있는 남자. 발터는 당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가 뭘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건지 물었어.”

혜미가 흐릿하게 웃으며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짚으며 다시금 일어나는 발터를 보며 그녀가 뜨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날 위해서.”

크리스티앙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슬쩍 씹었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를 애써 낮추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

“엘데이라성에 화재가 났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달려온 경비병이 소식을 알리자마자 날카로운 경보 소리가 황금성 안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터의 간절한 기다림. 아니, 그녀의 간절한 기다림은 드디어 끝났다.

“…뭐 하는 거야.”

크리스티앙이 뒤늦게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려 팔을 뻗었지만 허사였다. 이미 그녀는 높다란 상석에서 날듯이 뛰어내린 후였다.

“지금 가면 넌 죽는다. 내 손에 넌 죽어…!”

원로원들의 몸을 짓밟으며 관중석을 넘어가는 그녀는 멈칫하지도, 소리치는 그를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뜨거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발터를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잡아…!!!”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을 억세게 밀쳐 내고 그녀가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자기 일어난 경보 사태에 우왕좌왕하느라 장내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발터!!!”

발터는 혜미를 낚아채듯 끌어안으며 검을 공중에 휘갈랐다. 그녀의 뒤를 공격하던 맹수가 단칼에 털썩,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발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데리러 간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서 내가 먼저 왔어.”

발터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당겨 안았다. 툭 튀어나온 남성적인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미간에 모인 짙은 눈썹. 그 아래 길게 빠진 눈매에서 암갈색 눈동자가 뜨겁게 이글거렸다.

“…달려오는 걸 보고 혹시 잡히기라도 할까 봐, 제가 얼마나…!”

“나도 너랑 같이 훈련했어. 무시하지 마.”

그녀가 눈물 젖은 눈으로 웃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등허리를 꽉 붙잡은 커다란 양손에 힘이 들어가 떨렸다. 혜미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물었다.

“아까 다친 데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물어본 그녀가 바보였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렀고 찢어진 옷깃 사이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온몸의 체온이 위험수위를 넘은 듯 뜨겁다. 혜미는 새하얀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을 거칠게 찢어 낸 후, 피 흘리는 그의 팔뚝을 지혈했다.

“발터! 이리로!!!”

발터가 시간을 끌 동안 결박을 진작 풀어내고 경비병을 처리한 얀이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혜미와 발터는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통로를 향해 경기장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저 반역자 연놈을 당장 잡아!!!”

크리스티앙이 악을 쓰자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들을 따라붙었다. 발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클라웨 황궁의 제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모랫바닥에 차례로 쓰러졌다. 아직도 날뛰는 맹수들이 달려들어 시체의 목을 물어뜯었다.

“따라가. 끝까지 따라가라…!”

크리스티앙이 잇새로 분노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된 건가. 자조하는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뒤틀렸다.

황녀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말한 것은 하이데거였다. 크리스티앙 역시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병력을 성안에 집중시키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녀를 믿고 싶었다. 멍청한 그녀가 결국 안정된 미래가 아닌 파국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실망과 분노로 머릿속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폐하, 일단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적어도 대공이 있는 곳으로….”

시종장이 그의 곁에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를 냈다. 배를 어지간히 채운 맹수들이 무너진 경기장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 몸 하나는 내가 간수할 수 있으니 입 닥쳐.”

크리스티앙이 숨을 몰아쉬었을 때였다. 으르렁거리던 사자들이 갑자기 울음을 멈추더니 어슬렁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희한한 모양새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인상을 구겼다. 원형 경기장의 가장 끄트머리에 보이는 희미한 인영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흣…!”

익숙한 체형이 그의 코앞으로 이동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두 눈에서 시퍼런 빛을 뿜고 있는 베네딕트가 황제의 머리를 손으로 턱, 거칠게 잡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실례를.”

“감히 어디에 더러운 손을 대는가!”

크리스티앙이 분노에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경비병들이 그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청명하던 하늘이 회색빛으로 완전히 어두워지며 바람이 거칠어졌다.

그간, 황녀와 있었던 크리스티앙의 기억을 모조리 읽는 베네딕트의 하얀 얼굴에 여러 가지 빛이 뒤섞여 일렁였다.

“씨팔, 이 역겨운 마법사 새끼가…!”

베네딕트의 손이 욕설을 내뱉는 크리스티앙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그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터졌다. 황제의 얼굴에 시뻘건 손자국이 확연했다.

크리스티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무리 몸을 난도질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베네딕트였다. 얻어맞은 관자놀이가 얼얼한 것보다도 늘 허수아비 같던 그의 반격이 더욱 충격적이다.

“왜 이러지…? 미친 건가…. 흑…!”

다시 그의 뺨이 반대로 거칠게 돌아갔다. 베네딕트가 크리스티앙의 멱살을 붙잡자 그의 몸이 위로 붕 뜨듯 들어 올려졌다. 베네딕트의 시퍼런 안광은 생전 처음 보는 분노한 표정을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은 마치 불길이 지나친 듯 얼룩덜룩했다.

“내 아이를 가진 이에게 그리하면 안 되셨습니다.”

베네딕트가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황금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아이를 임신한 에데르트에게 크리스티앙이 어떻게 대했는지를 엿본 순간, 그의 절제력은 완벽하게 휘발되어 날아갔다.

“아,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달려왔나? 등신 같은 게, 설마 본인에게 아이가 생긴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하….”

크리스티앙이 피 터진 얼굴로 소리 내어 비웃었다.

“배 속에 있는 네 아이가 가장 많이 본 것은 아마 내 좆일 것이다…. 큭…!”

크리스티앙의 몸에 푸른빛이 일렁이며 자그마한 수십 개의 구멍이 연달아 뚫리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의 몸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가는 마력이 그의 몸을 투과하고 있었다.

“더러운 혼종이 태어나면 교황을 떠올리며 잔인하게 괴롭히다 죽일 작정이었는데….”

“닥치십시오.”

베네딕트가 그의 몸을 바닥에 쿵, 하고 떨어뜨렸다. 아직 마력의 회복이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꺼번에 큰 힘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사의 손이 크리스티앙의 멱살을 거칠게 쥐었다.

“이리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인데…. 진작 좀 보여 주지 그랬어…. 난 교황의 표정이 하나밖에 없는지 알았지 뭐야….”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마십시오.”

“자비?”

크리스티앙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침을 뱉었다. 베네딕트의 얼굴에 피가 섞인 타액이 붙어 천천히 흘러내렸다.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황제가 이를 뿌득 갈았다.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가. 마법사의 운명은 결국 황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모르는가?”

“압니다. 매우 잘 알고 있지요.”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 베네딕트의 은발이 사방에 휘날렸다. 날 때부터 황실에 귀속되어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하는 삶. 황제의 조롱은 더 이상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 이전의 황제와 대마법사 사이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베네딕트는 그녀를 안으며 절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의도치 않은 임신은 이 세상에 자신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던 그에게 일어난 엄청난 변화였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에데르트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배 속의 아이를 지켰다는 것이다.

분노와 자괴감이 베네딕트의 황폐한 영혼을 휩쓸었다. 그녀가 임신한 줄 알았더라면 호아킴이 쳐들어오건 말건 그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에데르트가 아이를 가진 채 크리스티앙에게 더럽고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네가 뿌린 더러운 씨 역시도 너와 같은 운명이다.”

베네딕트의 몸이 푸르게 발열했다. 크리스티앙의 제복에 이리저리 피가 튀었다. 사지가 툭, 툭,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크리스티앙이 말을 이었다.

“황실의 성 노리개로 평생을 사는 삶. 너와 네 어미 같은 더러운 삶. 크윽….”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것뿐입니까.”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마법사의 교접으로 생산된 베네딕트 블라이. 넌 네 여자와 네 아이, 그 둘 중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기까지지. 넌 평생 우리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혼자 외로이 처절하게 죽게 될 것이다. 아무도 네 죽음을 기억하거나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버러지 같은 네 삶이니까.”

베네딕트는 이를 꽉 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엄청난 분노의 감정이 몸을 휩쓰는 순간 강력한 힘이 몸 안에서 도는 것이 느껴졌다. 베네딕트가 크리스티앙의 몸을 한 점 조각조차 찾을 수 없이 산산조각 내려는 순간이었다.

“흑…!”

온몸을 덮치는 강력한 기운에 베네딕트의 입술에서 울컥 피가 터졌다. 공중에 붕 날아간 그의 몸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일어나십시오, 폐하.”

하이데거가 크리스티앙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베네딕트는 숨을 탁, 하고 몰아쉬었다. 대공의 마력을 실제로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생생히 느껴졌다. 마법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이었으면 즉사했으리라. 크리스티앙의 마력 실험은 결국 성공을 거둔 것이다.

“에리히. 난 괜찮으니까. 가서 황녀를 죽여라.”

“…예?”

하이데거가 그를 부축하며 귀를 의심하듯 다시 물었다. 크리스티앙이 베네딕트를 바라보며 분노의 명령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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