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72)
  • “네 헛소리가 진실이라 치자. 호아킴이 내 아비라 치자고. 그렇다고 해서 네가 무슨 상관이지? 내가 패륜을 저지르는 게 그렇게 싫었나? 왜지?”

    “놔.”

    말라붙은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떨렸다. 크리스티앙은 꼬리가 잘린 뱀을 공격하는 여우처럼 그녀를 몰아붙였다.

    “너 때문에 교황청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네 부하들은 털끝만큼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거잖아. 오로지 그때 네 머릿속에는 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되는군. 혹시나, 내가 호아킴을 죽일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죽여 버리기 전에 이거 놔!”

    “내가 아비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걸 바라지 않은 거잖아. 대체 이런 촌극이 어디 있지?”

    혜미가 침상 위로 몸을 날려 그를 억눌렀다. 크리스티앙은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아니, 밀어낼 의도조차 없었다. 상처 입은 팔과 어깨가 강하게 짓눌린 채, 그가 파리한 얼굴로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혜미의 얼굴에 피가 몰려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보라색 눈동자가 혼란과 자괴감을 내보이며 불안하게 떨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녀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더욱 환하게 이를 드러냈다.

    “팔을 통째로 잘라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이 씻은 듯 싹 사라지는구나.”

    “…입 다물어. 진짜 죽인다.”

    혜미가 꽉 깨문 잇새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비수처럼 파고들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바로 이런 거지. 인간은 때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감정에 사로잡혀 버리니까.”

    그만.

    “이토록 쉬운 게임이었다면 진작 마수에게 물어뜯기는 편이 좋았을 것을….”

    “마지막 경고야. 아무 말도 하지 마.”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크리스티앙이 눈을 가늘게 접은 채 잔인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써 나를 사랑해 버리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큭…!”

    이를 뿌득 갈며 혜미가 양손으로 그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비웃는 대신 손이 먼저 나간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었다. 목이 졸렸음에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활짝 벌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소름이 끼쳤다.

    미친놈. 이 미친 새끼. 죽여 버린다. 죽인다…!

    “폐하!”

    하이데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순간, 힘을 주던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마치 굳어 버린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괜찮으십니까?”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양손을 제 목에서 떼어 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뒤로 힘없이 넘어가는 그녀의 허리를 받친 채, 목을 가다듬고서 대공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저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오래가진 않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우리는 그저 놀고 있었을 뿐인데.”

    할짝.

    “안 그래?”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대로 굳은 혜미를 보았다. 이불이 스르륵 침상 아래로 떨어지며 시꺼먼 흉이 진 황제의 어깨를 드러냈다.

    “나가서 대기해.”

    “…예. 폐하.”

    황제가 그녀의 옷을 벌리고 가슴 선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꽉 무는 혜미의 뒤로 대공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누이의 열렬한 고백에는 답을 해 주는 것이 예의겠지.”

    실내복으로 챙겨 입은 얇은 드레스가 위로 올라가고 속옷이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혜미의 눈동자가 절망에 얼어붙었다.

    “정곡을 찔린 게 그 정도로 당황스러웠나?”

    크리스티앙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매만졌다. 몇 번의 느른한 손놀림만으로 아랫도리를 축축하게 적신 후, 그가 바지 앞섶을 풀어헤쳤다. 혜미는 눈물이 차오르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러지 마. 지금은 싫다. 절대 싫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소리 없는 외침을 가볍게 외면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내가 예상했었잖아.”

    빳빳이 고개를 든 페니스를 부드럽게 안에 찔러 넣은 후,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혜미의 입술에서 탁한 신음이 저절로 터졌다.

    “그래. 매일 밤 이리 뜨겁게 몸을 섞었는데, 몇 번이나 절정에 울부짖었는데,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아니야. 아니라고! 혜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소름이 돋아난 그녀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긴 숨을 내쉬었다.

    “회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네 안이 더 기분 좋아지는 거.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갈라진 목소리에 흥분 섞인 만족감이 새어 나왔다. 혜미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온몸이 뜨끈뜨끈하게 끓어 대기 시작한 이유는 그를 증오하는 마음 탓이라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달아오른 목덜미와 어깨, 가슴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몸을 제 위에서 흔들었다. 달궈진 피부가 마찰하는 느낌마저 너무도 생생하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임신 중 성감이 극대화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더군. 근데 너처럼 이 정도로 온몸이 민감해진 건 특이 케이스이긴 하다고.”

    “흣…!”

    말이 되어 튀어나오지 않는 입술 사이로 절정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혜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안쪽에 삽입하고 부드럽게 흔들어 주었을 뿐인데 이내 절정에 이르는 몸뚱이를 저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과 몸을 섞을 때면 늘 이런 상태였다. 수치감에 자살하고 싶을 때마다 오히려 성감이 극대화되며 자괴감을 뒤덮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궁합이 더욱 좋아진 건, 바로 임신 때문인 것 같더라고.”

    크리스티앙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가볍게 아래로 누인 후, 체위를 바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러누운 채 반항하지 못하는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고 핥으며 체취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따끈한 과육같이 페니스를 빨아들이는 그녀의 내벽을 왕복하며 크리스티앙이 봉긋해진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우리의 즐거운 밤을 생각하면 늘 임신 상태여도 좋을 것 같아.”

    혜미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그의 말을 무시하려 애를 썼다. 푹신한 침대가 크리스티앙의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렸다. 세고 있는 천장의 무늬가 흐릿해지며 그 자리에 창백한 얼굴에 열기를 담은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자리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다만 황실에 애새끼들이 늘어나는 건 골치가 아프잖아?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쑥, 쑥,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안팎을 거침없이 드나들며 숨을 몰아쉬었다. 임신 기간에 비해 발육이 빠른 태아의 상태를 보았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확실했다. 빌어먹을 마법사의 눈앞에서 아이의 목을 가차 없이 잘라 주리라.

    “애가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이미 있는 자식을 죽이는 건 어때?”

    그의 몸 아래 없이 정처 없이 흔들리던 혜미가 눈을 번쩍 떴다. 보랏빛 눈동자가 경악에 부릅 뜨였다. 지금… 뭐라고?

    “그러면 후계자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테니 그야말로 두 마리 짐승을 한꺼번에 잡는 거나 다름없겠지.”

    “아…. 하…!”

    혜미의 손이 드디어 움직였다. 대공의 마법이 풀리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애를 썼다. 그녀의 양어깨를 결박하듯 꽉 끌어안은 크리스티앙은 사정감을 느끼며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싫어…. 싫어…!”

    마침내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녀가 외치는 순간 달갑지 않은 오르가슴이 온몸을 강력히 덮쳤다. 크리스티앙은 쥐어짜이는 느낌을 음미하듯 깊게 삽입한 채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진짜… 싫었던 거 맞아?”

    혜미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피가 터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크리스티앙이 못 참겠다는 듯 커다랗게 웃었다. 시뻘건 손자국이 선연한 목을 치켜들면서 야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싫은 게 이 정도면 좋을 땐 날 아주 죽이겠구나.”

    그녀가 크리스티앙을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그래. 소원대로 해 줄게. 난 널 가장 잔인하게 죽일 거야.”

    그녀가 느낀 모멸감, 수치스러움과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을 전부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크리스티앙이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이마에서 떼어 주며 더욱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회복기에는 절대 안정하라는 대공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결과였다.

    “동생이자 이제 곧 남편이 될 이에게 그런 소릴 지껄이면 안 되지.”

    할 말을 잃은 그녀의 위에 축 늘어지듯 엎드린 채, 크리스티앙이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겨울제에 나는 누이와의 결혼을 세상에 공표할 예정이야. 모든 국민의 축복을 받으며…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티앙은 다시 잠에 빠졌다. 혜미는 그의 몸을 거칠게 밀쳐 냈다. 기절하듯 잠든 그의 얼굴을 때려 깨우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저주를 퍼붓고 싶었지만 기회는 없었다.

    “이거 놔…. 이거 놔!!!”

    정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하이데거 대공이 그녀를 질질 끌어냈기 때문이다.

    “저 새끼한테 할 말이 있다고!”

    “황녀 저하께서 해야 할 일은 이미 다 끝났습니다.”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그녀를 보는 대공의 표정은 벌레를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

    절벽 위, 바위로 막힌 동굴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베네딕트는 비스듬히 기댄 채 긴장 어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로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요!”

    로즈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상기된 자그마한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까지 보였다.

    “다녀올 수 있어요. 친구들에게도 상황을 말할 거고요. 폐하께서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확실히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두렵지 않느냐?”

    로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타우는 동굴 깊숙한 안쪽에 숨어 무릎에 얼굴을 박은 채 웅크리고 있는 중이었다.

    “대마법사님이 그러셨잖아요. 내면의 두려움마저 힘으로 변화할 수 있는 마법사가… 진정한 마법사라고.”

    달달 떨리는 입술에 힘을 꽉 주며 로즈가 말을 끝냈다. 베네딕트는 얼룩덜룩한 팔을 들어 소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니. 내가 하는 말 따위는 상관없다. 결국 마법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 내키지 않는다면 이대로 도망치거라.”

    “이제 저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로즈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자 베네딕트가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하려무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이 화상의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호아킴의 군대와 맞서며 마력을 바닥까지 끌어 쓴 탓에 회복은 느렸다.

    겨울제가 열리는 내일은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어린 로즈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황금성의 동태를 살피러 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 로즈가 대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로즈는 두 눈을 꼭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갇혀 있다가 차례로 끌려간 곳. 타우의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채 돌아온 곳. 친구들이 고통에 울부짖었던 그곳.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교황청.

    이제껏 본능적으로 피했던 곳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로… 로즈…!”

    쭈그려 있던 타우가 달려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코를 문질렀다.

    “정말… 성으로 돌아간 거야?”

    함께 손을 잡고 간신히 도망쳤던 그 무서운 곳으로 로즈가 돌아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괜찮겠지…?

    “로즈는 너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이니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오늘 치 훈련은 다 끝났느냐?”

    베네딕트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이요.”

    반항하거나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던 타우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뒤를 돌았다. 베네딕트는 동굴 깊숙이 들어가는 타우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삼켰다. 로즈가 공간 이동 마법을 시현하기 직전, 타우 쪽에서 생쥐 한 마리가 달려와 그녀의 호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드디어 인간이 아닌 동물의 정신에 닿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지금은 겨우 생쥐 한 마리지만, 시작이 이미 반 이상이었다. 마법사의 성장은 한번 가속이 붙으면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게 되는 탓이었다.

    ‘폐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베네딕트는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마력을 바닥까지 소진한 탓에 회복이 더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마력 회복의 기본으로, 특히나 감정의 제어를 통해 마력을 향상시킨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한 번만, 말을 좀 걸어 주시면 안 됩니까?’

    북부에서 마물과 싸웠던 호아킴이 마력이 깃든 무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베네딕트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교황청에 반은 자의, 반은 타의로 갇혀 사는 동안 세상은 확실히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폐하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를 모른 체하십니까.’

    간밤에 그는 환청까지 들었다. 어디 있냐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마법사의 돌을 꺼내 보았지만 그 말이 끝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베네딕트는 꺼멓게 죽은 피부를 갈라 보석을 꺼내 들었다. 설마 발터의 기억을 지운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세르노티의 기억만 떠오르지 못하게 수를 쓴 것이 들통이라도 난 것일까. 보석은 영롱한 빛을 발휘하기만 할 뿐, 그녀의 모습을 보여 주지도, 목소리를 들려주지도 않았다.

    ‘화가 나신 겁니까?’

    보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베네딕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보석을 애무하듯 길게 핥았을 때였다.

    ‘푸히히.’

    어디선가 어린아이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름 하나 없이 평평한 베네딕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하늘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변하며 서서히 커졌다. 보석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가 떨렸다.

    …설마.

    그의 몸 주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새어 나오던 푸른 마력이 넘실거리며 붉은빛이 뒤섞여 보랏빛을 띠었다. 캄캄한 동굴 속이 환하게 밝아지자 구석에 있던 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대마법사님. 왜 그래요?”

    베네딕트가 고개를 돌려 바다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색이 채 돌아오지 않은 머리카락이 뭉쳐 흔들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감정의 파동이 타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방금 네가 웃었느냐?”

    “네? 아… 아뇨…?”

    타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베네딕트는 입술을 질근 씹었다. 심장이 쿵쿵 강하게 뛰며 그의 호흡이 빨라졌다. 어두운 장막에 가려진 듯 에데르트에 관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나?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베네딕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아내린 이마를 짚는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정수리에서 빛을 발하는 은발이 길게 자라나며 타들어 간 머리카락을 아래로 떨구었다.

    “네가 보낸 생쥐.”

    “…네?”

    “그게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이 앞에 펼쳐라.”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타우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로즈에게 몰래 생쥐를 딸려 보낸 걸 걸리면 혼이 날까 봐 감추었는데, 대마법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기 그게….”

    “어서.”

    그에게 재촉하는 베네딕트의 얼굴은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다급한 쪽에 가까웠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인간인지 조각상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교황의 얼굴에 처음으로 깃든 급박함을 보며 타우가 자그마한 손을 공중에 번쩍 치켜들었다. 보랏빛이 가득한 동굴 안에 교황청의 어둑한 풍경이 펼쳐졌다.

    ***

    이제 내일 아침이면 축제의 시작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지금까지 회복실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지내는 것은, 그만큼 그의 상처가 깊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내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터와 다른 기사들을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발터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회. 그가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실패는 곧 죽음을 뜻했다.

    ‘발터를 만나서 말해 줘야 해.’

    혜미가 창문을 타고 침실을 빠져나와, 황후가 미리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 엘데이라성 뒤편의 숲으로 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저장고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는 널빤지가 엑스자로 못질 되어 그곳이 방치된 지 오래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안에 바닥이 빈 곳이 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와인 창고가 있는데, 와인 선반을 치우면 또 다른 통로가 보입니다.”

    “네.”

    수수한 옷을 입고 머리를 내린 황후는 성의 사람이라기보다 여염집 아가씨로 보였다. 그녀가 혜미에게 말을 이었다.

    “그 통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물비린내가 날 겁니다. 운하가 가까워졌다면 머지않은 거예요. 거기서부터 약 반 시간. 그러면 교황청의 뒤편 수로가 나올 거예요.”

    혜미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부른 배를 펑퍼짐한 드레스로 가린 황후가 문이 닫히기 전, 작게 중얼거렸다.

    “몸조심하셔요.”

    혜미가 마차의 문을 닫자마자 허름한 마차가 성의 반대 방향을 향해 출발했다.

    “당신이야말로… 꼭 살아남아요.”

    혜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황후에게 성을 떠나 있으라고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 저녁에 재봉사가 내일 입을 드레스를 가져왔을 때, 혜미는 크리스티앙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랄프가 가져온 것은 눈부신 웨딩드레스였다. 크리스티앙은 정말로, 겨울제의 포문을 여는 연설 때 제 누이와의 결혼을 선포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겨울제 때 황후가 공식 석상에 나서는 일이 없을 거라는 건, 그녀를 빼돌릴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황후 미리엄이 삼엄한 궁의 경비병들에게 오늘의 외출을 눈감아 달라는 거래를 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했을지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홀몸도 아닌데.

    “후….”

    자신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지를 다시금 상기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괜찮아.

    혜미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러자 같은 메아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배에 손을 올린 후, 걸음을 빨리했다. 어두운 동굴 속을 빠르게 걷는 내내 꼭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뭐지? 누구냐.”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교황청 수로에서 오수를 뒤집어쓴 혜미를 공격하던 경비병이 쓰러졌을 때였다. 혜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경비병을 돌아보다 깜짝 놀랐다.

    “…조세핀?”

    혜미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나 시꺼먼 구정물로 엉망이 된 조세핀이 검에 묻은 피를 떨어 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조세핀이 숨을 몰아쉬며 혜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임신했다더니 진짠가 보네요.”

    혜미는 반갑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마음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근데 여긴 어떻게 왔어? 리비에르는…?”

    “걱정 마세요. 리비에르 님은 모르니까.”

    조세핀이 착잡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동생을 찾는 걸 꼭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리비에르는 최근 그 화제가 나올 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허겁지겁 어딜 가는 걸 우연히 보고 따라와 봤어요.”

    조세핀은 황녀가 몰래 향하는 목적지가 교황청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세르노티의 기사들이 반역죄로 몽땅 갇혀 있는 이 상황에 그녀가 뭐라도 할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게 겨울제 바로 전날일 줄은 몰랐지만.

    “저도 이곳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요.”

    혜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내뱉는 조세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기… 설마 토비아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지?”

    “전 남자 때문에 목숨 거는 누구 같은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조세핀이 기가 찬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누구가, 설마 나 말하는 거야?”

    “알면서 뭘 물어요.”

    “쉿!”

    경비병이 순찰을 도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동시에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뗐다.

    “무슨 유령 나올 것 같은 곳이네요.”

    1층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높다란 탑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부서져 바람이 들이쳤고 천장 구석구석에는 거미줄투성이였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 주르륵 걸린 의복은 베네딕트가 늘 입고 다니던 것과 일치했다.

    그는 이 황량한 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걸까.

    혜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조세핀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

    찍. 찌직.

    비쩍 마른 쥐들이 하수도 바닥을 빠른 속도로 기며 소음을 냈다. 쥐 한 마리가 혜미의 발등 위로 지나갔을 때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누, 누구…. 크헉…!”

    교황청의 출입구는 마력으로 봉쇄되어 있었기에 의외로 건물 안 경비병의 숫자는 적었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한 명씩 서 있는 경비병을 처리하며 더 깊숙한 아래로 향했다. 온도가 점점 낮아지고 음습한 기운이 몸을 뒤덮는 것은 그저 착각만이 아닐 터였다.

    열두 번째 시체를 발로 치우고 통로를 돌았을 때, 탁 트인 공간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

    혜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고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수백 개의 커다란 유리 수조였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의 시체. 내장이 다 드러나 보이는 것도 있었고 신체가 조각조각 잘려 부분만 전시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탯줄을 잡고 있는 태아까지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해 그녀는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거친 숨이 손가락 새로 들락였다.

    “싫… 싫어…. 싫어요…!”

    혜미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커졌다. 짙은 녹색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물 옆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자. 오늘은 빨리 끝내자.”

    아이의 몸을 묶었던 밧줄을 풀어내며 늙은 경비병 하나가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자 아이는 반항하지 못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사다리를 타고 시체가 담긴 수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비병이 아래에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아이를 칼끝으로 찌르며 재촉했다.

    “내려오면 더 아플 거야. 그냥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뿐이잖아. 엄살떨지 말고 하라고…. 크윽…!”

    경비병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보다 그녀의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그의 어깨를 비틀어 칼을 빼앗고 목을 꿰뚫어 죽인 후, 혜미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겁에 질린 아이가 그녀를 보며 오줌을 지렸다. 공포에 얼어붙은 눈동자.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데 혜미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괜찮… 괜찮아.”

    혜미는 안타까운 마음을 삼키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제야 아이의 턱이 딱딱 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흑…. 흐윽….”

    결국 혜미는 사다리 위에 직접 올라가 아이를 간신히 안고 내려왔다. 수조에 담긴 시체들은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갖가지 색을 발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수조 안에는 아이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은 무자비한 학살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얼굴이 온전히 붙은 시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마에 숫자가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하아….”

    로즈와 타우의 이마에 선명하던 숫자가 떠오르자 혜미의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황실이 주도하는 끔찍한 마력 실험의 현장.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목격하자 온몸에 힘이 빠져 기절할 것만 같았다.

    “조세핀, 넌 일단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다.”

    조세핀은 대답이 없었다.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서 있는 조세핀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세핀…?”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가장 구석에 위치한 어느 한 수조 앞이었다. 조세핀은 마치 돌이 된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혜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떨칠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정수리가 쭈뼛거린다. 조세핀이 눈을 떼지 못하는 수조에는 금장으로 장식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마력 이식의 가능성을 열어 준 첫 번째 발자취를 기념하며.

    크리스티앙 디트리히 클라웨 9세>

    수조 안에는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채 양 손바닥을 벽에 대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짤막한 단발머리는 하얗게 세어 변했지만 얼굴은 아이였다. 조세핀과 판에 박은 듯 닮은 여자아이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안에서 죽어 있었다.

    “…조세핀.”

    눈을 뜨지 않는 동생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기다란 눈물이 툭, 떨어졌다. 혜미의 양 주먹이 소리 없이 떨렸다. 조세핀이 용병단에 입단하고, 리비에르를 따라 입궁해야 했던 이유. 무슨 일이 있어도 교황청에 와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토비아스를 통해 이미 들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조세핀이 그녀를 보지도 않고 팻말에 눈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죽일 수 있어요…?”

    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는 그녀 역시 스스로를 의심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죽일 거야. 반드시.”

    휘익.

    어디선가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혜미는 휙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찾았다. 얀의 휘파람 소리. 캠핑 때면 늘 들려오던 노랫소리였다.

    “어서 가세요.”

    조세핀이 그녀를 향해 내뱉었다. 늘 얄미울 정도로 당당하던 조세핀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고 눈은 시뻘겠다.

    “저는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경비병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조세핀은 겁에 질린 아이의 손을 낚아챈 후, 수조 뒤로 숨었다. 혜미는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 해 보인 후 휘파람 소리가 난 쪽으로 빠르게 뛰었다.

    ***

    “얀. 시끄러워.”

    레나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맞은편에 갇혀 있는 얀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려고 그러는 거야. 정신 차리려고.”

    끊임없이 이어진 고문에 이대로 눈을 감으면 죽을까 두렵다는 말이었다. 그의 심정을 알고 있었으므로 레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네 덕에 또 얻어맞게 생겼잖아. 이제 그만 맞아도 되는데.”

    “그래도 뼈는 안 부수는 게 신기하지?”

    “공개 처형으로 사람들 앞에 세우려면 온전히 걸을 수는 있어야 할 테니까.”

    토비아스가 작게 내뱉자 얀이 불평을 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잔인한 새끼들…. 진짜 짐승만도 못한 천벌 받을 새끼들.”

    때마침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쉬던 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발소리가 간수의 그것과는 다른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이든…?”

    그녀가 작게 내뱉음과 동시에 쇠사슬이 휙, 하고 끌리는 소리가 났다. 몇 시간 전까지 고문을 당한 발터가 일어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발터…!”

    그들을 발견한 혜미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발터가 창살 너머 그녀를 보며 찢어진 눈두덩이를 일그러뜨렸다.

    “폐하.”

    쇠사슬에 발이 묶여 있는 기사들, 그리고 양팔까지 뒤로 결박된 발터를 보는 혜미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질질 짜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의연하려 노력하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이곳에서 엘데이라성으로 바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어. 운하를 빙 둘러 올 필요 없이 그곳만 통과하면 엘데이라성으로 바로 연결돼.”

    “설마 그걸 말해 주기 위해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혜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터는 숨을 몰아쉬며 낮게 물었다.

    “그게 어딥니까?”

    “이쪽에서 모퉁이를 세 번 돌고 지나가다 보면….”

    방금 보았던 끔찍한 장면을 되새기며 혜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마력 실험이 이뤄지는 곳을 지나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너도 봤어?”

    “예.”

    발터가 무거운 목소리로 짤막하게 답했다. 그녀가 절대 눈으로 보지 않길 바랐던 광경이었다.

    “어떻게?”

    “고문실이 그 옆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면 마법사들을 가둬 놓은 곳이 나오고요.”

    그들은 일부러 고문실에 차례로 끌려가며 교황청 안의 상황을 파악했다. 중간에 도망을 치며 곳곳의 지리를 익힌 후에는 더욱 혹독한 매질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덕에 갇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에게는 몰래 전언을 전달해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그들이 무사한 것이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켰다. 발터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이의 숫자는 마법사와 일반인을 포함해 약 7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렇게나… 많아…?”

    발터는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교황청 전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예. 내일, 이곳의 문이 열릴 때 토비아스가 뒤에 남아 숨을 것입니다.”

    토비아스는 축제의 서막으로 경비가 덜해진 틈을 타 교황청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을 그 안에서 보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말씀하신 비밀통로의 존재를 안 이상, 그곳을 탈출 경로로 삼겠습니다.”

    혜미는 발터의 바로 옆방에 갇힌 토비아스를 바라보았다. 토비아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는 아마 그 역시도 조세핀이 보았던 장면을 목격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말수는 적고 소심한 듯 보이지만 세심한 면이 있는 그가 박제된 조세핀의 동생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을 것이다.

    “발터. 너는… 괜찮은 거야…?”

    혜미는 다시 발터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아마 크리스티앙은 널 가장 먼저 처형대에 올리려 할 거야.”

    감정을 다스리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목에 쇠사슬을 걸고, 양팔이 묶인 채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발터가 입을 열었다.

    “예상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폐하의 안위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폐하께 다가갈 때까지만 제발 무사히….”

    그녀를 바라보던 발터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눈을 두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 찰나의 침묵이 공간에 감돌았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그녀의 복부. 동물적인 감각은 원래 그녀보다 발터가 더 뛰어났다. 혜미는 자신이 깨어나지 않는 3년 동안 그녀를 보살핀 발터가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하…. 설마….”

    발터의 눈동자에 드리운 충격, 그 기저에 아주 희미하게 깔린 기대감이 보이자 혜미는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을 느꼈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속삭이는 사과의 말이 흘렀다.

    “미안해.”

    그 한 마디로 발터는 모든 것을 직감했으리라. 아이의 아버지가 그가 아니라는 것도. 또한 그녀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묵직한 시선을 받는 그녀는 그 어떤 고문보다 지금이 더 괴로웠다. 차라리 마력이 실린 하이데거의 채찍에 등이 찢어졌을 때가 덜 아팠던 것 같다.

    “정말 미안해…. 발터.”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침내 발터가 입을 뗐다. 발터가 핏발선 눈으로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어지럽진 않습니까? 혼자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구역감은 없습니까?”

    그녀의 상태를 염려하는 그의 시선은 진심이었다.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얼른 돌아가십시오, 폐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될 테니 염려 말고….”

    혜미는 창살 사이로 손을 쭉 뻗어 그를 붙잡았다. 고문이 자행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직도 마르지 않은 피가 그녀의 손바닥에 묻었다. 보랏빛 동공이 물에 젖어 둥그렇게 커졌다.

    “…넌 나 안 미워?”

    “밉습니다.”

    발터가 턱에 힘을 주며 말을 토해 내듯 뱉었다.

    “홑몸도 아니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폐하가 원망스럽습니다.”

    혜미의 미간이 시큰거렸다. 발터. 너는 왜.

    “그런데 왜 화 안 내.”

    “…보고 싶었으니까.”

    발터가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옆방에 주르륵 갇혀 있던 다른 세르노티 기사들의 입술에서 소리 없는 긴 한숨이 흘렀다.

    “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이런 꼴인데도… 넌 내가 보고 싶었다는 말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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