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72)

순간 혜미는 말문이 턱 막혔다. 크리스티앙이 한숨을 뱉어 내며 속삭임을 이어갔다.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더군. 수준 낮은 책에서나 보고 비웃었던 말은 사실이었지. 어이없게도.”

그녀가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표정에 단 한 톨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의 모래사장이 순식간에 깊어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었다.”

혜미는 그가 내뱉는 고백이 진심이라는 사실에 차마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붙였다. 움푹 들어간 눈매에 숱 많은 속눈썹이 바짝 올라가 그의 내면을 드러냈다.

“허우적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었지. 당연했다. 난 단 한 번도… 바다에 빠져 본 적이 없으니까. 영원히 빠질 생각도 없었지.”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결론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널 처음 봤을 때… 난 이미 네게 반한 거였어.”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입술을 진하게 집어삼켰다. 불어오는 바람에 혜미의 머리가 마구 흩날려 가까이 있는 크리스티앙의 뺨을 간질였다.

“결국 너도 그렇게 될 거다.”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끝까지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눈을 보면 알거든.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혜미는 문득 그를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자신해…?”

“내가 자신하는 걸로 보여?”

“부러울 정도야.”

패기, 혹은 치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혜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테라스 난간에 기댄 그녀를 제 팔 안에 가둔 후,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시선을 꽉 잡았다.

“그럼 성공이구나.”

중얼거리며 쿡쿡대던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확 굳어진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녀의 몸이 휙 반대로 돌아가며 크리스티앙에게 안겼다.

“……!”

테라스의 난간은 겨우 그녀의 허리 아래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그녀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너 이게 대체 무슨…!”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던 혜미가 말을 잃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크리스티앙의 어깨에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뭐야?

“폐, 폐하…!”

하이데거가 테이블을 박차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흣…. 이런 씨팔….”

크리스티앙이 고통에 숨을 멈추었다. 원인은 아래에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황녀를 겨냥했던 화살은 황제의 몸을 뚫는 순간 시커먼 불길이 되었다.

“폐하…. 조금만 참으십시오.”

고통을 간신히 견디는 그의 몸을 붙잡으며 하이데거가 내뱉었다. 시커먼 마수의 화살에 꿰뚫린 자리는 썩어 가는 모양새로 구멍이 점점 크게 넓어지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꽉 깨문 후, 마력으로 황제의 환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검은 불길이 온몸을 휩싸이게 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흣…. 으아아아아!!!”

부들부들 떠는 크리스티앙에게서 날 선 비명이 터져나갔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잡으려다 멈칫하며 손을 뗐다.

“견디셔야 합니다. 폐하…. 조금만 더…!”

“아아…. 아아!!!”

팔이 활활 불타오르는 느낌에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창백함을 넘어 회색으로 질렸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렬한 고통. 움푹 들어간 눈매 안의 그림 같은 눈동자에 핏발이 터져 나갔다.

“황녀 저하…. 괜찮으십니까…?”

황궁 근위대가 달려와 그들 주위에 방어벽을 만들었지만 아래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더 이상 없었다. 혜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절규하는 크리스티앙을 보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호아킴을…. 데려와…. 흣…. 당장 그자를 내 앞에 데려와 무릎 꿇려라!!!”

“폐하,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이데거가 인상을 쓰며 더욱 힘을 썼다. 썩어 가는 피부에 남아 있는 마수의 기운을 모조리 없애지 않으면 온몸이 잠식당하고 말 것이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다른 쪽 주먹으로 대리석 바닥을 내리쳤다.

“으아아!!!”

혜미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저도 모르게 축축해졌다. 몸부림치고 있는 크리스티앙이 자신 대신 화살을 맞았다는 사실에 귀가 먹먹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고통을 참으려 바닥을 내려치던 크리스티앙의 주먹 뼈가 부서졌다. 혜미는 이를 꽉 깨물며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하아…!”

크리스티앙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로 그녀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는 밀리지 않고 더욱 힘을 주었다. 혜미의 손등에 크리스티앙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이를 악문 그의 입술에 피가 터졌다.

“흐으으…!”

혜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크리스티앙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통에 말도 할 수 없는 그를 보며, 그녀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끝났습니다, 폐하.”

하이데거가 창백한 낯빛으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황제의 제복은 어깨 부분이 완전히 타들어 가 끔찍한 상처를 그대로 드러냈다. 크리스티앙의 얼굴 역시 식은땀과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호아킴을 데려와….”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폐하, 일단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

“어서!!!”

그가 소리치는 동시에 서재 쪽에서 호아킴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폐하.”

“감히…. 감히 누구에게…!”

크리스티앙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호아킴이 착잡한 얼굴로 굳게 다문 천천히 입을 뗐다. 상처로 새까맣게 변한 황제의 어깨를 보자 감정을 자제하기가 어려웠다.

“훈련 중에 일어난 실수였습니다, 폐하.”

“실수…?”

한숨을 터뜨리듯 날카롭게 조소한 크리스티앙이 눈을 부라렸다.

“하아…. 황녀에게 칼을 주어라.”

하이데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중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이 경비병 하나의 칼을 낚아채 내밀자, 혜미는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떨렸다.

“죽여….”

크리스티앙이 테라스에 기대선 채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뭐라고? 혜미의 가지런한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그녀는 호아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씨도둑은 못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그는 크리스티앙의 친부가 확실했다.

“널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네 손으로 직접 죽여!!!”

크리스티앙과 꼭 닮은 호아킴의 노란 눈동자가 일그러져 흔들렸다.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아들을 보는 얼굴 표정은 참담했다.

“씨발, 당장 모가지를 자르라고!!!”

그가 그녀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고 호아킴에게 달려가는 순간, 혜미는 크리스티앙을 뒤에서 붙잡았다.

“그만해, 크리스티앙…. 그만해!!!”

“내가 죽일 것이다! 하아, 아아!!!”

몸부림치는 크리스티앙을 단단히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격렬히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티앙의 떨림이 몸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손에서 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발작하던 크리스티앙은 혜미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

휘잉.

창밖으로 싸늘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혜미는 붉은 커튼을 젖힌 후, 우울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이 올 것 같이 흐린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축제는 이제 고작 닷새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댄 채 길게 한숨을 쉬었다. 테라스에서의 화살 사건 이후, 크리스티앙은 집중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 덕에 혜미를 찾아오는 사람은 세 끼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녀와 목욕 시중을 드는 이 하나가 전부였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이었나.

혜미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닷새 전, 그녀는 호아킴을 직접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발로 걷어찼다. 분노해 직접 움직이려는 크리스티앙을 저지한 것도 자신이었다.

미친년.

그녀는 일인용 소파 위에 다리를 그러모으고 머리를 꽉 쥐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행동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목숨을 건 전시 상황. 강력한 사령관인 호아킴이 죽었다면 일이 얼마나 더 수월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자 죄책감은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답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호아킴의 목을 베러 달려가는 크리스티앙에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르륵.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씨….”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그녀는 더욱 곤란했다. 혜미는 손을 들어 벌게진 눈을 훔쳤다. 아랫배가 봉긋 솟아 있는 게 이제는 스스로가 자각할 만큼 몸이 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순간에 식욕이 동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보다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에 올라타듯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엄마가 되면 다들 강해진다고 하는데, 그녀는 반대로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았다.

“나 좀 살려 줘라. 응?”

그녀는 배 속의 아이에게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지만 응답의 기운은 전혀 없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베네딕트라는 걸 느낄 때는 바로 이럴 때였다. 배고플 때는 그렇게 오밤중에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면서 어쩜 이렇게 마이페이스일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미는 화장대로 다가가 코를 팽 풀었다. 혼자서 질질 짜고 있는 처량한 모양새를 보자 우스운 와중에 배가 또 고팠다. 시녀를 불러야 하나, 생각하는 와중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뭐지?’

혜미는 손수건을 잡은 채 바짝 긴장했다. 크리스티앙의 발소리는 이미 외우고 있다. 하이데거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호아킴일까. 아니면 세드릭이 황궁에 심어 놓은 간자일까, 생각하는 와중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딱 들어도 곤란해하는 말투였다. 일단 지체 높은 자가 틀림없다. 혜미는 포크를 구겨 만든 흉기가 의자 아래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자세를 바로 했다. 들어오라는 명령과 동시에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혜미는 침실로 들어선 인영을 보며 잠시 얼어 있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황후… 전하…?”

이런 식으로 둘이 만나기는 굉장히 어색한 상대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인사가 늦은 걸 용서하셔요.”

황후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긴 어쩐 일로….”

“남부 지방의 특산물인 과일을 가져왔습니다. 회임한 여성에게 특히나 좋다고 해요.”

“…아, 네.”

혜미는 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황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 황금성 안에 쫙 퍼져 있음은 이미 예상했지만 그 이야기를 황후의 입에서 듣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물론 배 속의 아이 아버지는 크리스티앙이 아니었으므로 조금 억울하긴 했다. 하지만 황제의 침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뭐라 입을 떼는 것도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황녀 저하와 담소를 좀 나누고 싶어.”

황후가 우아하게 입을 열자 시녀가 곧 사라졌다. 문이 닫힌 후,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본격적으로 머리채를 잡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무리 자신이 원해서 이리된 게 아니라고 해도, 그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리가 없는 황후가 불쾌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혜미는 머리털이 다 뽑힐 각오를 단단히 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

실눈을 살짝 뜬 혜미가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황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뭐야. 사람 곤란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인가…?

“실은 황녀 저하에게 드릴 선물은 따로 있습니다.”

“네에…?”

뭐든 좋으니까 좀 일어서면 좋겠다 싶은데 황후가 말을 이었다.

“바구니 맨 아래쪽을 보십시오.”

설마 독사를 숨겨 온 것은 아니겠지…? 혜미는 조심스레 붉은 과실 여러 개를 대나무 바구니 안에서 꺼냈다.

“…이건…?”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익숙한 모양의 단검이었다. 손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이 눈에 익숙했다. 황후가 혜미를 향해 조용히 입을 뗐다.

“오라버니의 서재에서 몰래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저하께 돌려드린 걸 안다면 오라비는 아마 저를 죽일지도 모르지요.”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서슬 퍼런 하이데거의 얼굴을 떠올리며 혜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왜… 이걸 굳이 제게 가져오셨나요?”

“황녀께 소중한 물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법사의 보석은 베네딕트와 이어진 유일한 물건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배 속에는 그와 이어진 다른 증표가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혜미는 말을 아끼며 단검의 손잡이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베네딕트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녀는 방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라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시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다물었으므로 혜미가 아는 것은 호아킴이 돌아왔다는 사실뿐이었다.

살아 있는 거겠지….?

혜미는 가능하다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라면 이 모든 아이러니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할지, 답을 알려 줄 것 같았다. 물론 순순히는 아닐 테지만.

‘베네딕트. 대체 어디 있어요…?’

그녀는 이제껏 약 오백 번 정도 혼자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 한번 속삭였다.

‘호아킴이 이상한 무기를 사용한단 말이에요. 그건 알고 있는 거예요…?’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혜미는 한숨을 쉬고 칼을 내려놓은 후,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황후를 다시 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러시면 제가 불편하거든요.”

그녀는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 황후를 부축해 의자에 도로 앉혔다. 그녀의 허리를 보는 순간 혜미는 멈칫했으나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칼은 감사합니다. 여기서는… 선물을 받으면 답례를 돌려주는 게 예의라고 하던데…. 어쩌죠. 저는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서….”

“아뇨. 황녀 저하만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바라서 이곳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온 것이고요.”

크리스티앙과 하이데거 두 사람이 모두 바쁜 지금 이 상황이 아니라면 황후가 그녀를 몰래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리엄에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였던 것이다.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뭔데요?”

“저와….”

미리엄이 마른침을 삼킨 후, 마침내 결심을 끝낸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와, 제 아이의 안전입니다.”

…역시 그랬구나.

황후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임신 중이었다. 혜미는 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헐렁한 옷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방금 그녀를 부축할 때 황후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혜미의 입술에서 자동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크리스티앙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뇨.”

“왜죠…?”

“폐하가 알면 제 아이가 무사하지 않을 테니까요.”

황후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 역시도.”

“하지만 그 아이는 크리스티앙의 아이가 아닌가요?”

인간적으로 애 아빠는 알아야 하지 않나? 혜미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자 황후가 조용히 답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미 황녀 저하의 복중에 있는 아이를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하셨으니까요.”

“아니, 그건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배 속의 아이가 크리스티앙의 후계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짜 아비인 베네딕트가 알면 경을 칠 일이며 크리스티앙이 바라는 것 역시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단지 그녀의 임신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리엄의 생각은 혜미와는 달랐다. 황후는 머리가 영특한 이였다. 크리스티앙이 씨를 남기는 것에 대해 얼마만큼 결벽적으로 굴었는지는 그간 의사를 통해 이미 다 들었다. 그런 그가 황실에 퍼진 만연한 소문을 그대로 놔두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의도이기 때문인 것이다.

“폐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면 일은 모두 그분의 뜻대로 되겠지요. 그러니 분란의 씨앗을 막기 위해서라도 폐하께 더 이상의 자식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선대의 실수를 반복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무슨 수를 써서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실 분입니다. 이혼을 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인 일이겠으나… 혹여나 제가 임신한 사실을 안다면 저는 아이와 함께 죽게 될 것입니다.”

잔인할 수도 있는 말을 너무나 나직하게 내뱉는 황후는 크리스티앙의 성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그를 질릴 대로 겪어 본 혜미는 그녀의 말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이데거… 대공 역시 이 사실을 모르나요…?”

이제껏 애써 태연하려 노력하던 미리엄의 낯빛이 조금 창백하게 바뀌었다. 그녀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오라버니는 제가 스스로 약을 마셔 아이를 낙태하길 원하십니다. 겨울제가 끝난 이후에도 제가 임신 중이라면 직접 태아의 씨를 말리겠다 하셨고요.”

경악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혜미의 입에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미친, 피도 눈물도 없는 쌍놈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제 조카를…! 아, 미,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뒤늦게 사과하는 그녀를 향해 미리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과 아이의 생존이 달린 문제에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게… 살려 달라는 부탁을 하셔도 제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랑 크리스티앙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혜미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후는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성격도 아니었으며, 그녀 역시도 그에게 머리 숙여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제 진심이 전달되기에 부족했나 보군요.”

미리엄은 입술을 꽉 깨문 후,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일 제가 교황청에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알려드린다면 절 신뢰할 수 있으시겠어요?”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어린 황후의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혜미의 가슴이 쿵, 쿵, 강하게 뛰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배 속의 아이만은 살리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기르고 싶어요.”

“…하지만….”

“황녀 저하께서 폐하의 연인이 되시건, 폐하의 심장에 칼을 꽂으시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와 아이의 목숨만은 보전하게 해 주셔요.”

미리엄은 결혼식 첫날 밤, 그녀에게 약속했던 크리스티앙을 떠올렸다. 마음이 바빠 그 공간에 어떤 사람도 들일 여유가 없다고 말하던 황제는 누군가를 위해 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까지 빠졌다.

믿을 수 없어 시녀를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한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두려울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황제의 목숨을 틀어쥔 이는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황녀였던 것이다.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간 여자가 미리엄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당신과 아이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하지만 대공의 목숨까지는 책임질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고 싶지 않아요.”

“상관없어요.”

망설임 없이 내뱉는 황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정말 상관이… 없다고요?”

“누이의 목을 언제든 칠 준비가 되어 있는 오라비에게 똑같이 해 준다고 해서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혜미는 가느다란 몸으로 배를 잡고 선 황후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꿈틀. 얇은 드레스 아래에서 무언가가 비죽 소리 없이 움직이자 태동을 느낀 황후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혜미는 갑자기 콧날이 시큰거렸다.

같은 여자로서, 아이를 가진 똑같은 상황. 살려 달라고 무릎 꿇는 여자를 도저히 내칠 수가 없다. 지금 이 선택을 나중에 또 뒤통수 맞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이를 위하는 그녀의 눈빛만큼은, 거짓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가슴이 쿵, 쿵, 뛰며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졌다. 배 속의 아이가 느끼는 감정일까.

너도… 좋은 거니…? 나 잘했어? 그래. 알았다. 너만 믿는다.

혜미는 아이를 향해 속으로 중얼거린 후, 황후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아까 교황청에 비밀 통로가 있다고 한 말, 정말인가요?”

“네.”

“그런 게 있다면 크리스티앙이 남들에게 알렸을 리가 없을 텐데…?”

“10년 전, 그걸 설계한 것이 제 오라비입니다. 당시 서재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해요?”

“몸이 약하다고 머리까지 약한 건 아니랍니다.”

혜미가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발터에게 즉시 알려야 했다. 그녀가 황후의 손을 꽉 잡았다.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작은 손이 진땀으로 축축하다.

“당신은 충분히 강해요.”

“…….”

“그리고 이건 진심인데요. 나는 당신의 아이와 내 아이가…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애들은 솔직히 죄 없잖아요. 나는 누구 하나가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거든요. 누가 들으면 불가능하다고 비웃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노력조차 안 하는 건 그야말로 게으른 거잖아요. 저는 다른 세상에서 충분히 게으르게 살아서… 이번엔 좀 열심히 살아 보려고요.”

“…….”

“아이랑 꼭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제가 지켜 드릴게요. 용기 내서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쉬운 일 아니었을 건데. 전 솔직히 머리털 뽑힐 각오 했었거든요. 진짜로요.”

주책맞게 울지 않으려 애써 참고 있는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손을 맞잡은 황후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내가 왜 이러지….”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은 황후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해 손수건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혜미가 빨개진 코를 찡그리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하루에도 백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해요. 그거 너무 힘들지 않아요? 울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웃겨서 웃고 있으면 가끔 꼭 미친 여자 같다니까요.”

황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툭, 떨어지자 혜미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부연했다.

“아, 미친 여자는 그쪽 말하는 게 아니라 나요. 나 말하는 거였는데…?”

미리엄은 황제가 왜 이 여자에게 빠졌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생이 선하고 솔직한 여자. 그녀는 크리스티앙이 노력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걸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욕심 많은 황제는 그것마저 제 것으로 하고 싶었으리라.

***

혜미가 굳이 회복 중인 크리스티앙의 병문안을 갈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침실로 들이닥친 하이데거에게 반강제로 끌려오기 전에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십시오.”

제 누이동생에게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하자 안 그래도 정 없어 보이는 대공의 얼굴이 마치 인조인간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에게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자고 있는 거 구경하라고 데려온 건가요?”

“저하.”

“알았으니까 그럼 좀 나가 주세요.”

“폐하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 전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누워 있는 크리스티앙도 불편한데 대공까지 한자리에 있는 걸 견딜 마음은 없었다.

“둘만 있게 해 달라고요. 폐하도 그걸 원하시지 않을까요?”

하이데거는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지만 결국 자리를 떴다. 환자인 크리스티앙의 곁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회복할 때마다 황녀를 눈앞에 데려오라고 명령한 황제는 정작, 주인공을 데려오니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혜미는 마침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침실에는 이따금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잠들어 있는 크리스티앙은 마치 시체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숱이 많은 황금빛 속눈썹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사라진 자리에 우묵하게 들어간 눈매는 누군가 섬세하게 붓질을 한 듯 색이 조금 짙었다.

“넌 그렇게 눈 감고, 입 다물고 있을 때가 제일 괜찮아.”

혜미가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크리스티앙이 잠든 걸 보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났던 날도, 그는 이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환한 방에서 마치 정신을 잃은 천사처럼 늘어져 있던 이가 크리스티앙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넌 잠든 모습이 그나마 제일 봐 줄 만하다고…. 엄마, 깜짝이야….”

그가 스르륵 눈을 뜨는 바람에 혜미는 놀라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꿈인가.”

크리스티앙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혜미는 잠시 망설이다 침대 옆에 자리한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꿈이야.”

“…그런데 왜 그러고 있었어.”

“뭐가…?”

크리스티앙이 쑥 들어간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늘 또렷하던 그의 말투에 힘이 빠져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약을 먹고 취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왜 나를 번쩍 들어 안고 걷질 않지?”

“…뭐?”

“내 뺨에 손을 대고 죽은 거냐고 물어봐야지. 그리고 내가 눈을 뜨면 안도의 눈빛을 보여 주고….”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을 그대로 읊는 그를 보며 혜미는 마른침만 삼켰다.

“꿈속에서 너는 늘 그러하잖아.”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보며 조금 웃었다. 늘 피처럼 붉던 입술은 색이 연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미소 역시도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네게 키스하지.”

“…….”

“그 입맞춤이 나를 낭떠러지로 이끈다는 걸 정확히 알면서, 나는 매번 처음인 것처럼 환히 웃는다.”

침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던 그의 얼굴에 아주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혜미는 그의 얼굴에서 잠이 걷히는 순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소년의 머리에 무거운 왕관이 내려앉는 시간. 보이지 않는 압박이 그의 온몸을 휘감는 시간. 그 압박을 오만한 휘장으로 둘러 가린 채 황금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뜨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황제의 시간.

“…꿈이 아니군.”

마침내 그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또렷해진 말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바짝 올라간 눈썹 아래 눈동자에 흐릿한 빛이 사라졌다.

“왜 왔지?”

동시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혜미의 머릿속에도 상념이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빡인 후, 목소리를 높였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하이데거한테 질질 끌려왔거든. 그 인간이 네가 안 보는 데서 날 죽이기라도 하는 줄 알고 얼마나 졸았는지 알아?”

소리 내어 한숨을 푹푹 쉬는 그녀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입술을 비틀었다.

“다음엔 널 실망시키지 않게 그런 연극이라도 준비해 줘야겠네.”

“그 사람은 이때다 싶어서 날 진짜 죽일걸?”

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크리스티앙이 조소했다.

“이 성안에서 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나 빼곤 아무도 없어.”

“너랑 밥 먹다가 죽을 뻔한 게 이틀 전인 거, 벌써 잊었어?”

“그래서 네가 죽었나?”

크리스티앙이 건조하게 되묻자 혜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눈앞에 누워 있는 이는 달랐지만.

“…난 네가 정말 이해가 안 돼.”

혜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생각해도 머리만 복잡해졌다. 그녀가 아는 크리스티앙은 희생이란 걸 모르는 이였다. 사랑을 말하던 그의 마음을 그녀가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때문이다. 크리스티앙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짓밟을지언정 스스로 무너질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뭘 말이지.”

“거기서 네가 왜, 날 감싸 안은 거냐고.”

“구해 줘도 난리인가?”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혜미는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이데거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넌 죽었을 수도 있어.”

“그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당연하잖아.”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노려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설마 내가 상황 판단도 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나? 내가 그렇게 즉흥적인 사람이라고? 걸음걸이와 시선의 각도까지 계산하며 일생을 살아온 내가, 고작 맘에 둔 계집 하나 따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 생각하는 건가 설마?”

혜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착각이 과하구나.”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녀가 다쳤다면 대공이 진심을 다해 치료했을까? 가능성은 영에 수렴했다. 그러니 크리스티앙은 그가 대신 다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까.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너야.”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크리스티앙이 반격했다.

“너야말로 호아킴을 왜 죽이지 않았지?”

“…그건….”

“칼자루를 쥐여 줬는데도 발로 걷어찬 이유가 뭐야.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란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자 크리스티앙이 조소했다.

“설마 내가 네 복수를 위해 그를 죽이라고 명령한 거라고 착각한 건가?”

“그럼… 아냐?”

“기대를 깨서 안타깝군. 나는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부상당한 곳이 고통스러운지 크리스티앙이 작게 욕설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내가 호아킴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그자가 감히 내 아이를 밴 널 공격했기 때문이야. 이건 버젓이 황권 모독이지. 자리에 있던 시종만 열 명이 넘는 앞에서 건방지게 황제인 날 짓밟은 자에게 즉결 사형은 당연했다. 네가 날 막지만 않았더라면.”

크리스티앙은 그의 목을 베고도 남았을 것이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마터면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네 아버지잖아…!”

인상을 사납게 구긴 크리스티앙이 그녀의 팔목을 꽉 잡아끌었다. 혜미는 마치 앞으로 엎어지듯 그의 침상으로 이끌렸다.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닥쳐.”

“난… 눈앞에서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걸 지켜볼 수 없었을 뿐이야.”

“겁쟁이같이 뒤로 물러선 주제에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어.”

혜미의 보랏빛 눈동자에 뜨끈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며 결심하듯 속삭였다.

“걱정 마. 네가 보채지 않아도 그 사람은 반드시 죽일 테니까. 누구의 명령 따위가 아니라 법의 잣대로 심판대에 올릴 거야. 그가 이제껏 저지른 죗값을 치르게 될 거라고.”

“그전에 네 모가지의 안위나 먼저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넌, 널 없앨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호아킴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깡그리 날려 버린 거야.”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의 목을 눈앞에 디밀어 주었는데도 거부한 그녀에게 분노가 치미는 동시에,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크리스티앙은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는 그녀를 자극했다. 잡힌 팔목에서 강하게 박동하는 맥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불안한 시선을 꽉 붙잡은 채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사그라들었던 팔의 고통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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